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305
#304.
함께하다 (4)
백화점은 겉으로는 평온했지만, 속으로는 지금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초긴장 상태였다.
점장은 일일이 매니저들에게 전화를 돌려 ‘오늘 실수가 있으면 내 목만 날아가는 건 아닌 줄 알아라’를 외쳐 댔고, 평소 지랄지랄하던 점장이 아니라 잔뜩 쫄은 점장의 기운을 감지한 매니저들은 알아서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회장님이라도 오셨대?”
“회장님이 쇼핑하러 오시는 거 봤어요? 재계에서 들려오는 말이 그 양반이 백화점을 한다는 게 건국 이래에 최대의 개그라잖아요.”
“그렇기야 하지.”
차를 사면 십오 년을 타고, 양복을 한 벌 맞추면 이십 년을 입는 사람이 백화점이라니.
심지어 그 차나 양복이 명품도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옷이야 걸치면 그만이고, 차는 굴러가면 그만이다. 신발이야 밑창만 갈면 얼마든지 신을 수 있다’를 몸으로 실천하시는 분이 소비의 정점인 백화점 체인을 운영하다니.
“그럼 대체 누가 온 거래?”
“아무도 모른대요. 그런데 비서실에서 연락 와서 바로 VIP로 등록시키고 점장님한테 제대로 편의를 봐드리라 그랬다잖아요.”
“헐.”
융통성 없기로는 대한민국 최고로 꼽히는 재경 백화점이 아닌가. 10년째 VIP 최고 등급을 유지하던 고객이 다음 해 해외에 잠깐 나가 있는다고, VIP 요건에서 백만 원인가가 모자랐다는 이유로 바로 강등을 시켜 버린 재경 백화점이다.
기분 나빠서 다른 백화점으로 옮겨야겠다고 협박하는 VIP에게 당시 점장이 대답한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고객님’은 지금까지도 재경 백화점을 대표하는 문구로 남아 있다.
소문으로는 그 고객의 연매출이 5억을 넘었다나 뭐라나?
잘나가는 기업의 사모님이었다는 말이 있다.
그런 사람조차 약간의 요건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칼날같이 등급 컷을 해버리는 곳이 바로 재경이었다. 그런 재경에서 VIP 등급 업도 아니고, 최고 등급 카드를 그냥 발급해서 드렸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회장님의 숨겨진 아들이 아닐까요?”
“아냐.”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 나는 그거 아니면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사실 회장님의 친인척이 아니고서야 이런 대접은 못 받는 거잖아요. 저번에 어느 기업 회장님이 왔을 때도 VIP 카드 없으면 라운지 못 들어간다고 막았잖아요.”
“그랬지.”
“그럼 내가 오늘 오천만 원 쓰면 되냐고 하니까, VIP는 연말에 갱신되니 그때 다시 오시라 그랬죠.”
“생각해 보니…… 우리 패기 쩐다.”
“그럼 친인척밖에 없잖아요.”
“아, 지호 씨. 그거 모르는구나?”
“뭐요?”
“옛날에 회장님 자제분 중 한 분이 우리 지점에 방문한 일이 있었거든.”
“네.”
“그때 좀 거들먹거리기는 했는데, 그리 크게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하나가 문제가 돼서 난리가 났어.”
“뭐요?”
“그때 그분이 점원한테 물 떠 오라 그랬거든.”
“…….”
“그걸 들은 회장님이 점장 좌천시키고 자제분은 따로 불러서 지팡이로 후려 팼다고 하더라고.”
“헐…….”
“뭐라고 그랬다더라? ‘점원이 니 종이냐? 어디서 못 배워먹은 짓거리로 그룹 얼굴에 똥칠을 하느냐’ 그랬다고 하시던데?”
“대박. 회장님이?”
“응. 그래서 그때 난리 났잖아. 바뀐 점장이 오자마자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백화점의 주인은 고객이 아니라 여러분입니다’ 그러고. 세상 천지에 그런 말 하는 백화점이 어딨냐.”
“생각해 보니 미친 것 같아요.”
“아들이면 더 엄격하실 분이 회장님이죠. 그리고 밑에 매니저들 말 들어보니, 절대로 그건 아니라고 하더라고.”
“왜요?”
“잘생겼대요.”
“아…….”
이해가 갔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지호 씨였다.
“온다!”
인이어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VVIP 지금 3층, 3층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3층 좌측 에스컬레이터입니다.]“이쪽이다.”
민지호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상대의 정체는 알 수 없지만. 그 상대가 말 한마디로 그녀의 목을 날려 버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절대 실수하지 말자.’
듣기로는 진짜 VVIP는 셋 중에 유일한 남자라고 했다.
‘어머니와 동생을 데리고 쇼핑 온 것이라고 했지?’
이런 경우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남자라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허세가 있다.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던 허세도 이렇게 돈을 쓰러온 곳에서는 마구마구 솟아나기 마련이었다.
이렇게 기분을 세우고 있는데 누군가 실수를 하거나 기분이 나빠질 만한 말을 하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것이 사람 아니던가. 그러니 몇 배는 더 조심해야 한다.
여자는 문제가 생기면 클레임을 걸지만, 남자는 아예 떠나 버린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냥 떠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많고 많은 백화점 중에 왜 여기냐고. 아, 씨. 화장실도 못 가고.’
언제 올라올지 모르니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1층과 2층에서만 무려 네 시간을 소비한 VVIP가 이제야 3층에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긴장한 민지호의 눈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일련의 일행이 보였다.
‘어머니는 인자하게 생기셨네.’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딸과 아들의 나이를 감안해 볼 때, 천성적인 동안인 모양이었다.
응대업에서 워낙 굴러먹다 보니 이제는 얼굴만으로도 상대의 스타일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된 민지호가 보기에 어머니의 응대 난이도는 D 이하. 좋은 말로 하면, 천성적으로 착해서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였다.
‘헐?’
그런데 그 뒤를 따라 올라온 여자가 심상치 않다.
‘A급 진상이다.’
뒤이어 올라온 젊은 여자에게서 진상의 오러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놓고 뒤집어엎는 타입은 아니지만, 앞에서 생글생글 웃은 다음, 뚜벅뚜벅 걸어 점장실로 쳐들어갈 타입이다.
저런 타입이 나이를 먹으면 S급으로 진화한다.
‘그런데…….’
쟤, 강세아 아닌가? 강세아가 여기에 쇼핑하러 왔다고?
민지호가 혼란에 빠졌다.
요즘 가장 잘나가는 여자 솔로 가수가 아닌가. 물론 가수도 쇼핑이야 할 테니, 백화점에 방문한 것이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녀를 혼란하게 만든 것은 강세아급이나 되는 연예인이 방문한 상황인데, VVIP가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긴장된 눈으로 강세아를 따라 올라오는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손에 축축한 땀이 느껴질 정도이지만, 막상 강세아를 뒤따라 위로 올라온 남자를 본 민지호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뭐지?’
양손이 아니라 양팔에 쇼핑백을 주렁주렁 열매처럼 매단 남자는 마치 쇼핑백이 열리는 나무 같은 몰골을 하고 있었다.
저게 지금 이 백화점의 개장 이래 처음으로 특급 경보를 발동시키게 만든 VVIP의 모습인가?
‘그냥 호군데?’
단순히 모습이 호구인 것도 아니다. 쇼핑력 0에 수렴하는 상호구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어느 매장을 들어가더라도 ‘고객님, 이 옷이 너무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머리를 멋쩍게 긁으며 ‘그런가요?’라고 말할 VVIP의 모습이 상상되고 있었다.
‘이상한 조합이네, 진짜.’
착한 아주머니와 표독한 딸내미, 그리고 호구 아들이라…….
조합상으로는 도무지 특급 경계 대상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주렁주렁 매달린 쇼핑백 열매들이 저들의 쇼핑이 무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 무난하지는 않아.’
남자의 얼굴에 새겨진 다크 서클이 턱까지 내려올 기세다.
자세히 뜯어보면 원판은 엄청 잘생긴 것 같은데, 워낙 표정이 썩어 있어서 잘생김이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여하튼 긴장.’
마주치는 순간 긴장이 확 풀리는 조합이지만, 실수를 하게 되면 저들이 아니라 점장이 그녀를 죽이려 들 것이다.
VVIP들이 그들의 앞을 지나가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진호야, 너는 왜 안 고르니? 뭐 좀 사지?”
“어머니, 저 죽을 것 같은데요?”
“호호호호, 우리 아들은 농담도 잘하지.”
아니요, 어머니.
지금 아드님 위험해 보여요. 앰뷸런스라도 대기시켜 놔야 할 것 같은데…….
강진호의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러다 보니 턱까지 내려온 다크 서클이 더욱 짙게 보인다.
병원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비주얼이었다.
‘저 청년은 대체 얼마나 험한 쇼핑을 겪었으면…….’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불과 세 시간 만에 영혼이 빠져나간 모습이 되어버린 남자를 보니, 안타까움이 절로 밀려온다.
“좀 쉴까?”
“……제발.”
“음. 뭐, 엄마는 아직 괜찮은데, 우리 아들이 힘들고 피곤하다니까 좀 쉬자꾸나.”
“엄살은! 지금 엄마가 쇼핑하시는데 피곤하다는 말이 입에서 나와?”
“피곤한 게 아니라…….”
“엄마 이름에서 외롭다는 말이 나왔으니, 오빠나 나나 오늘 죽도록 욕먹고 자갈밭에 굴러도 할 말 없는 거야. 그런데 겨우 세 시간 쇼핑으로 우는소리를 하다니.”
‘내가 칼밭에는 구른다.’
차라리 그게 낫지.
오독문이 자랑하던 독 연못에 맨몸으로 뛰어드는 것이 낫지, 옷 속으로 뛰어드는 짓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강진호였다.
홍의를 즐겨 입니 어쩌니, 청의가 상징이니 어쩌니 하면서 사실은 단벌로 십 년을 굴러먹는 중원의 무인들을 딱 두 시간만 쇼핑시키고 나면 나중에는 창칼 대신 옷으로 위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다들 기겁을 하며 무기를 던지고 도망가겠지.
‘문제는 내가 그리될 판이라는 거지.’
강진호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에이, 나약하긴!”
강은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엄마, 그럼 우리 이왕 카드도 받은 김에 VIP 라운지에라도 가 볼까?”
“음, 라운지?”
“응. 오늘은 내 허세가 솟구치는 날인 것 같아. SNS에 사진도 좀 올려야지.”
“내가 그런 것 하지 말라고 했잖니. 너는 취미도 이상하다. 왜 니 사진을 모르는 사람들 보라고 올리니?”
“그럼 안 갈 거야?”
“누가 안 간댔니? 엄마는 별 관심 없지만, 네 오라비 몰골을 보니 죽을 것 같구나. 가자.”
“히힛.”
쇼핑이 시작된 지 세 시간이 지났건만, 둘은 여전히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VIP 라운지를 향했다.
‘전혀 지치지 않았어.’
대체 저 체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쇼핑을 시작한 여자는 괴물 같은 힘이 솟구친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이건 과학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끄응.”
강진호는 담배 생각이 간절해지는 것을 느끼며 터덜터덜 둘의 뒤를 따랐다.
“여기 VIP 라운지가 어디예요?”
“이쪽입니다, 고객님.”
“아, 이쪽?”
강은영이 상큼한 미소를 짓더니,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가서 조금 있으면 부러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강진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리 좋을까.’
백현정 때문에 시작한 쇼핑인데, 강은영이 더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기분 좋으면 됐지.’
오늘은 희생의 날이다. 강진호는 오늘만큼은 싫은 소리를 하지 않겠다 다짐하며 안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새끼들아! 너희 내가 우스워 보여? 어?”
강진호가 미간을 좁히고는 안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