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306
#305.
함께하다 (5)
“고객님,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부드러운 말투이기는 하지만 왠지 모를 딱딱함이 담겨 있었다.
정중한 거절이라고 해야 할까? 화를 내게 만들려는 것은 아니겠지만, 기분 나쁜 사람이 들었을 때는 충분히 화가 날 만한 대응이었다.
그리고 상대는 지금 기분이 많이 나쁜 모양이다.
“곤란? 곤란해? 곤란하면 니들이 어쩔 건데?”
강진호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VIP로 가면 갈수록 돈을 쓰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야 당연한 사실이지만, VIP로 갈수록 진상이 많아진다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이만큼의 돈을 썼으니, 너희가 알아서 나를 모셔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갖춘 이들이다. 보기 흉한 꼴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한 업소에서 100만 원을 쓴 사람과 1억을 쓴 사람이 같은 대접을 받는다면, 1억을 쓴 사람은 굳이 그 업소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지는 거니까.
그러니 이해가 가기도 하는 일인데…….
“이 라운지는 VIP 손님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있잖아! VIP 카드!”
“죄송하지만 고객님, 그 카드는 갱신되지 않은 카드입니다. 현재 고객님께서는 저희 백화점의 VIP가 아니십니다. 이해 부탁드립니다.”
“너희, 내가 누군지 알아?”
강진호는 눈앞의 사내에게 신경을 끄기로 했다.
굳이 그가 나서야 할 일도 아니고, 굳이 그가 신경을 써야 할 일도 아니었다. 진상 손님을 감당하는 것은 점원의 역할이지, 손님의 역할이 아니다. 강진호가 단순히 재경의 손님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직책도 없는 그가 굳이 저런 일에까지 나설 필요는 없었다.
“그냥 지나가자.”
“왜? 재밌는데?”
“남의 곤란을 재밌어 하는 거 아니다.”
“오빠가 재미없다는 건 확실하게 알겠네.”
강은영이 혀를 쏙 내밀었다. 하지만 강진호의 말을 듣기로 했는지 멈췄던 발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강진호의 귓가로 날카로운 음성이 파고들었다.
“내가 누군지 몰라? 내가 황민수라고! 너희, 나한테 이러고도 뒷일 감당할 자신 있어?”
강진호의 미간이 좁아졌다.
‘황민수?’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다. 물론 재경 백화점의 VIP 라운지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만큼 패기 있는 자라면 보나마나 어디선가 한가락 해 먹던 자일 테니 그 이름을 들어본 것이 이상할 것은 없겠지만,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뉴스나 지나가는 말로 들은 것이 아니라 기억 속 어딘가에서 그와 연관이 있던 이름 같았다.
“……황민수 님?”
“그래! 이제 알았어?”
VIP 카드와 고객의 얼굴을 확인한 점원이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황민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강진호도 주의 깊은 눈으로 황민수를 바라보았다.
“옷이 좀 낡았는데…….”
강진호의 첫 감상을 들은 강은영이 바로 의견을 정정해 주었다.
“오빠, 저거 엄청 비싼 거야.”
“그래?”
“응. 저거 옷 한 벌로 경차 한 대 값은 나온다. 저거 정말 비싼 옷이야. 좀 오래되기는 했는데……. 저런 옷 입는 사람이 왜 VIP가 안 된 거지?”
의문 어린 강은영의 물음에 강진호가 가만히 황민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문 열어.”
“……고객님, 안 됩니다.”
“너희 내가 누군지 알고도 지금 이러는 거야? 너희 점장 어딨어? 점장 내려오라고 해!”
“고객님이 아니라 회장님이 오신다고 해도 VIP 카드가 없으면 이곳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이건 회장님이 직접 내리신 방침이십니다.”
회장님이라는 말이 나오자 황민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강진호의 눈이 살짝 커졌다.
‘기억났다.’
워낙 오래된 일이라서 잊고 있었다. 강진호의 비상한 기억력으로도 잠시 스쳐 지나간 이름을 일일이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
‘황정후 회장의 장남이 황민재, 그리고 차남이 황민수라고 했지.’
그렇다면 저 사내의 태도가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과거 황민수가 재경에 있을 당시라면 이들이 감히 그의 앞에서 고개를 드는 일 따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황민재나 황민수, 둘 중 하나는 재경 백화점의 사장이었을 테니까.
그런 황민수가 낡은 양복을 입고 지금 VIP 라운지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황민수의 뒤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중년의 여성과 그 여성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작은 아이를 보며 강진호가 미간을 좁혔다.
아마도 간만에 어린 아들을 데리고 쇼핑을 하던 중 VIP 라운지에 들어가려다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잔말 말고 문 열어.”
“고객님, 자꾸 이러시면 경비를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경비?”
경비라는 말에 황민수가 움찔했다.
그의 시선이 슬쩍 뒤로 가 닿는다.
불안한 눈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아이를 확인한 황민수가 이를 꽉 깨물었다.
‘빌어먹을.’
라운지에 들어갈 수 없게 된 순간, 뒤로 물러서야 했다. 그게 깔끔하게 일을 정리하는 법이다. 하지만 지금의 처지에 대한 짜증이 밀려오면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 소리가 시선을 끌었고,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적당히 물러나야 했지만, 그의 짜증 어린 마음과 단호한 점원의 태도가 나쁜 쪽으로 시너지를 일으켜 상황이 격화되고 말았다. 여기서 물러나는 것은 자존심상 할 수가 없다.
“불러!”
“고객님?”
“경비 불러. 내가 끌려는 나가도 내 발로는 못 가니까. 경비 부르라고.”
점원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다른 곳이라면 이런 경우에 대응이 힘들어지겠지만, 재경만큼은 대응의 여지가 하나뿐이었다. 전 사장이라는 이유로, 황정후 회장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우물쭈물하다가는 그가 목이 잘려 나갈 판이었다.
뒷감당은 그가 하는 게 아니라 상부에서 한다. 되레 누군가 난동을 피웠는데 빠르게 처리하지 못한다면 안쪽에 있는 VIP의 휴식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문책이 돌아올 수도 있었다.
“여기 VIP 라운지로 경호팀 불러주세요.”
무전을 치는 순간,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라운지 안에서도 사람들이 고개를 빼 상황을 살피고, 지나가던 이들도 힐끔힐끔 이쪽을 보았다.
이제는 황민수가 끌려 나가는 일밖에는 남지 않은 것이다.
“무슨 일이야!”
저 끝에서 아까 본 점장이 달려왔다. VIP 라운지는 백화점에서 가장 중요한 곳 중의 하나다.
“여기 고객님께서 VIP 라운지 입장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고개를 돌려 황민수의 얼굴을 본 점장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니, 빌어먹을.’
이 인간이 왜 여기서 행패란 말인가. 다른 백화점도 많은데 굳이 왜 여기로 와서 그의 골치를 썩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점장이 심호흡을 했다.
‘침착하자.’
이건 최악의 위기다. 응대 한 번을 잘못했다가는 그의 커리어가 완전히 아작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지금 응대를 하는 자리에 그가 부임한 이래 최악의 VVIP인 강진호가 지켜보고 있었다.
까딱 실수 한 번을 했다가는 바로 좌천이다. 강진호가 그럴 의향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 일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상부로 흘러 들어갈 것이다. 그가 보기에도 이건 매우 좋은 가십거리였으니까.
상부에 어떤 말이 흘러 들어가야 그의 커리어에 가장 좋은 결과일지 고민을 마친 점장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VIP 등급이 아니신 것은 확인했나?”
“예. 작년까지는 VIP이셨지만, 올해부터는 자격이 해지되었습니다.”
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이 끝났다면 이제 해야 할 것은 단 하나뿐이다.
“고객님, 죄송하지만 이곳은 VIP 회원이 아니고서는 출입할 수 없는 곳입니다. 더 이상 소란을 부리신다면 부득이하게 퇴거를 이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속뜻은 쫓겨나기 싫으면 당장 이곳에서 꺼지라는 뜻이었다.
황민수가 그 말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얼굴이 달아오른 황민수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쫓아내? 오냐! 쫓아내 봐!”
황민수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듯 목청껏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아! 내가 여기서 뭘 했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야. 몇 년 전까지 내가 여기서 얼마를 팔아줬는데, 그거 일 년 꼴랑 못 채웠다고 이런 식으로 구냐, 이거야! 이딴 식으로 하니까 제대로 팔아먹지를 못하는 것 아냐!”
“그건 고객님께서 신경 써주실 일이 아닙니다. 당사의 규정일 뿐이지요.”
“규정?”
“그 규정을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는 않으시겠죠?”
황민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규정을 만든 것은 황정후가 아니라 황민수였다. 황정후는 VIP 관리를 똑바로 하라는 의견을 내놨을 뿐이고, 등급과 등급에 따른 관리는 황민수가 이곳의 사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만들어놓은 것이다.
매출액에 따라서 칼같이 등급을 나누는 것 역시 그가 만든 규정이다.
그런데 그 규정이 지금 그를 곤란하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너, 안면이 있는데?”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더는 소란을 피우지 마십시오. 더 이상 소란을 피우신다면 강제로 내보내겠습니다.”
“해봐, 이 새끼야!”
“경비원!”
점장이 단호히 경비를 외치자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검은 슈트를 입은 건장한 청년들이 점장의 바로 뒤로 우르르 몰려왔다. 말 한마디만 더 떨어지면 당장에라도 황민수를 잡아서 끌어낼 기세였다.
“저도 일을 키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옛 상사에 대한 예의로 마지막으로 한 번은 참습니다.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마시고, 여기서 그만하시지요. 이러신다고 달라지는 게 없다는 것은 본인도 알고 계시잖습니까.”
황민수의 시선이 뒤를 향했다.
그러고는 다시 점장을 바라보았다. 아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이번만 좀 이해해 달라는 뜻 같았다. 하지만 점장 역시 상황이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강진호만 없었다면 그렇게 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쉬쉬하며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도 아비 되는 입장에서 황민수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제길.’
비록 권력욕이 강하기는 해도 황민수가 나쁜 놈은 아니라는 걸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이리 칼같이 매정하게 나오고 싶지는 않지만, 그가 어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가십시오.”
황민수가 막 소리를 지르려 하다가 고개를 떨궜다.
“……안 되면 할 수 없는 거지.”
그의 목소리에는 처연함이 어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점장 역시 속이 쓰려왔지만, 그 마음을 표정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규정에 따른 운영은 커다란 백화점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손님 나가신다. 길 터드려.”
“예.”
경비원들이 좌우로 물러서자 황민수가 힘없이 아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보.”
그의 아내 역시 반쯤은 울먹이는 듯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한때는 이곳의 사장이었던 남편이 이런 취급을 받는 광경을 마음 편히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만 갑시다’라는 말이 막 황민수의 입에서 나오려는 찰나였다.
“몇 명까지 동행 가능합니까?”
강진호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