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310
#309.
조언하다 (4)
“황정후 회장님요?”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더구나 자신이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다른 이에게 관용을 베풀기는 어려워지죠.”
“그렇기야 하지만…….”
“황정후 회장의 아들들이 잘못을 했습니다. 그래서 황정후 회장이 그들에게 벌을 줬죠.”
“예. 명백한 그들의 잘못이죠.”
“그래서 누가 행복해졌죠?”
“…….”
조규민이 입을 닫았다.
이건 생각해 보지 못한 방향이었다.
누가 행복해졌냐고? 행복이야…….
‘아무도.’
그 누구도 행복해지지 못했다. 황정후 회장의 아들들은 나락으로 떨어졌고, 황정후는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는 했지만 그 넓은 저택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다.
자식들과의 연이 끊기면서 손주들이나 손녀들과의 연도 끊어졌고, 친척들은 딱히 없었다. 황정후의 아버지는 이북 출신이고, 황정후와 황정후의 형을 데리고 전쟁 통에 남한으로 내려왔다.
황정후의 형은 후사가 없었으니…….
‘철저하게 혼자로군.’
황정후가 강진호에게 왜 집착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 보입니까?”
“하지만…….”
조규민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만한 권력과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단순히 가족과 관계가 좋지 않다고 해서 힘들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황정후 회장님은 지금도 말 한마디로 나라를 뒤흔들 수 있는 사람입니다.”
“권력과 재력은 죽음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죠.”
“예. 뭐, 그렇습니다만.”
그거야 일반론이고.
가족 하나 없는 풍요로운 삶과 행복한 가족과 함께 꾸려 나가는 가난한 삶 중에 선택하라고 한다면 후자를 택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가족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대신에 황정후의 재산을 준다고 하면 대부분은 후자를 택할 것이다.
‘내가 너무 속물적인가?’
그렇게 생각을 하고 보니 엄마가 걸리기는 했다. 고향에서 자식 잘되기만 바라시는 부모님과 인연을 끊는다니.
“인륜이 천륜이 어쩌고 하는 빤한 소리를 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사실 인륜이 그리 대단하다고 생각한 시기는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음…….”
강진호가 살던 중원에서도 아비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 경우는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자기 자식을 죽인 군주나 아비를 죽이고 자리를 찬탈한 역사는 수도 없이 많다.
정보가 발달해서 사건이 벌어지기만 하면 이유를 밝혀내고 언론에서 대서특필을 하는 현대에서도 존속살해가 번번이 벌어지는 판인데, 제대로 사인을 밝혀낼 수도 없던 과거에는 그런 일이 얼마나 많이 벌어졌겠는가.
“다만, 뭐라고 해야 할까…….”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니까요.”
“……그건 그런 것 같습니다.”
“이제는 그리워지고 자식들의 빈자리가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제 손으로는 되돌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조금은 등을 밀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조규민이 미간을 찌푸렸다.
확언하건대,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반대였다. 뭔가 긁어서 부스럼을 만드는 기분이었다. 잘 풀리지 않는다면 괜히 황정후와의 관계가 조금 어색해질 것이고, 일이 잘 풀려서 황정후와 자식들의 관계가 회복된다면 강진호에게는 재경 내부의 견제자가 생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찌 봐도 손해인데요.”
“괜찮습니다.”
강진호가 싱긋 웃었다.
‘받은 것이 많으니까.’
그와 황정후는 계약으로 얽힌 관계다.
강진호가 그를 병상에서 일으켜 주었기에 황정후는 그에게 돈을 지급했다. 황정후가 거기서 멈췄다면 딱 거기까지인 관계였다. 황정후가 그에게 지불한 돈은 그가 생각한 이상으로 많았으니까.
하지만 황정후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강진호를 단순한 은인이라 여기지 않았다. 함께 삶을 살아가야 할 동반자이자 반쯤은 가족이라 여겼다.
그 이후로 강진호가 황정후에게 받은 지원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든 수준이다. 강진호가 그에게 해준 것은 딱히 없음에도 말이다.
받은 것이 있으면 갚아야 한다. 하지만 강진호는 황정후에게 해줄 것이 없었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건 단 하나였다.
“자꾸 같은 질문을 드리는 것 같은데…….”
“예?”
“정말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같은 질문.
하지만 물을 때마다 다른 대답이 나오고 있었다. 강진호는 가슴속 깊이 묻어둔 이유를 결국은 꺼내고 말았다.
“사람은 누구나 죽죠.”
“예.”
“그리고 그 죽는 순간이 찾아오면 주위를 돌아보게 됩니다.”
“…….”
“죽는 그 순간에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만큼 씁쓸한 일은 없죠.”
강진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자신을 복잡한 심사가 담긴 눈으로 바라보던 청마의 시선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가 조금만 더 주변을 신경 쓰고, 조금만 더 다른 이들을 생각했다면 그렇게까지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말이다.
파국으로 치닫게 된 대가는 하나뿐이었다.
세상과의 분쟁.
강진호를 제외한 세상 모두가 그를 적대시하는 기분이었다.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지금 황정후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평생을 쌓아 올린 회사를 되찾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는 기쁨을 느꼈겠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알게 될 것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회사 하나뿐임을.
마교를 부흥시키고 다시없을 명성을 쌓았다고 해서 죽는 순간에 뿌듯했던가.
천만에.
남은 것은 아쉬움과 후회뿐이었다.
강진호는 황정후가 그런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황정후의 자식들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느끼는 게 아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들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 그가 지금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혈육이기 때문에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있고, 그 부분을 그들만이 황정후에게 제공할 수 있는 명백한 현실이었다.
“자리는 만들어보겠습니다.”
조규민은 영 불만 어린 얼굴이었다.
아마 그로서는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약속해 주십시오.”
“뭔가요.”
“황정후 회장님이 거부한다면 그만두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그게 조건입니다.”
“그건 약속할 필요도 없는 일이네요. 저는 기회를 제공할 뿐입니다. 선택은 본인이 하는 거죠. 찬바람이 불도록 내친다고 해도 그게 회장님의 선택이라면 인정할 겁니다.”
“그렇다면야…….”
조규민은 마지막으로 남은 찝찝함을 털어버렸다.
‘이거 죽 쒀서 개 주는 기분이 좀 들기는 하는데.’
조규민과 강진호의 활약(?)으로 다시 키워낸 재경이 아닌가. 그런데 그 재경이 부활하자마자 다시금 후계자들을 사내로 불러들이는 기분이 들었다.
‘난 그 꼴은 절대 못 본다.’
조규민이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
강진호가 회사를 물려받지 않아도 좋다. 그는 강진호의 재력을 보고 강진호를 따르겠다고 결심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강진호의 주머니 안에 있던 것이 밖으로 굴러나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강진호가 재경을 가지지 않더라도 재경을 가질 수 있는 첫 번째 권한과 선택권은 강진호에게 있어야 한다. 강진호가 그것을 포기한 다음에 누가 갈라 먹든 그건 조규민이 알 바가 아니었다.
‘좀 움직여야겠는데…….’
일단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백영기 이사였다.
현재 재경이 이인자이자 황민재와 황민수에게 가장 치를 떨고 있는 사람이 백영기이니, 그와 상담한다면 좋은 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고기 맛있네요.”
“퍽퍽해 보이는데.”
“취향이니까요.”
조규민은 자신의 그릇에 놓여 있는 미디움 레어의 스테이크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다 같은 마음일 수는 없으니까.’
고기의 취향이 다르듯이 같은 사건을 두고도 그와 강진호가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의 방향을 맞춰 나가는 것이 그들의 관계를 꾸준히 좋게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하나는 감사드려야겠네요.”
“네?”
“이런 내용을 저와 상담해 주신 것이요.”
강진호가 빙그레 웃었다.
“제가 상담할 수 있는 사람이 딱히 더 있나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조규민이 붉은 기가 어린 스테이크를 썰어 입가로 가져갔다.
“집으로 가십니까?”
“그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어서요.”
강진호의 말에 조규민이 차를 가리켰다.
“타시죠.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뇨. 이미 사람이 온 것 같은데요?”
“네?”
조규민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주차장 한쪽 끝에서 익숙하고도 독특한 형태의 몸이 보였다.
‘그림자만 봐도 누군지 알겠네.’
정말 말 그대로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는 넓어 보이는 어깨와 짧게 깍은 머리만 봐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저 건들대는 인사법도 참으로 잘 어울린다.
‘직업을 잘못 택하셨네.’
누가 봐도 그쪽에서 일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굳이 손을 쓸 필요도 없이 얼굴과 분위기만 봐도 분쟁이 절로 해결될 것 같지 않은가.
‘하기야 별로 다를 것도 없지.’
무인이나 조폭이나.
차라리 조폭이 나은 면도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법이 무서운 줄은 아니까. 대한민국이라는 치안국가에서 저런 이들이 어둠 속에 암약하고 있었을 줄이야.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 아니요. 오랜만입니다.”
“뭐, 그리 오랜만도 아니죠.”
방진훈이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그냥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오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방진훈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그리고 그런 얼굴이라도 환히 웃으니 나름 봐줄 만했다.
방진훈 나름의 처세술인지는 모르겠지만…….
‘인화력은 있네.’
따르는 이가 많다고 하더니,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저런 얼굴에 성격마저 나빴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오늘은 제가 모셔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음, 어쩔 수 없네요. 넘겨 드릴게요.”
“잘 받았습니다.”
물건 취급을 받고 있는 강진호였다.
“우리끼리도 술 한잔해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방진훈의 말에 조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규민은 조규민 나름대로 방진훈이라는 사람을 알아가야 할 필요가 있었고, 방지훈은 방진훈 나름대로 조규민은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요주의 인물이군.’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더 강렬한 쪽은 아무래도 방진훈이었다.
그저 사회적인 지위라든가, 하고 있는 일의 중요도를 따지자면, 조규민은 굳이 그가 신경을 써야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하나 방진훈은 조규민에게 신경을 바짝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따로 둘이 식사를 할 정도라 이거지?’
그렇다면 측근 중에서도 최측근이라고 봐야 한다. 강진호의 입장에서는 방진훈이나 조규민이나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방진훈이 가지고 있는 압도적인 무력의 차이는 강진호의 시선에서는 도토리 키 재기가 될 뿐이니까.
결국은 친화도다.
누가 더 강진호와 친하고 발언력이 큰가에 따라서 권력 서열이 나뉘게 된다는 것을 방진훈은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그리고 강진호 씨!”
방진훈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강진호를 노려보았다.
“네?”
“언제 저랑 밥 한번 드시죠!”
“……네?”
강진호의 얼굴이 멍해졌고, 조규민은 고개를 돌려 웃음을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