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319
#318.
방문하다 (3)
“강박?”
“예.”
황정후는 이해를 못하겠다는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강박이라니. 바르게 살겠다는 내 자세가 잘못되었다는 건가?”
강진호는 답답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자꾸 말씀을 드리는 것 같은데,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황정후 회장님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겁니다. 회장님은 누구보다 바르게 살아오셨고, 앞으로도 바르게 사시겠죠.”
“그런데 뭐가 문젠가.”
“그래서 힘들고 외롭다는 겁니다.”
황정후는 반박하지 못했다. 강진호는 지금 황정후의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머리로는 하고 싶은 말이 천 마디도 넘는데, 그 말 중 어느 것도 입으로 나오지 못했다.
강진호가 던진 말의 무게가 그를 짓눌렀다.
“사람은 그리 바른 것만 하고 살 수 없으니까요. 바른 것만 할 수 없으니, 바른 것만 하고 산 사람들이 성인이라고 불리는 겁니다.”
“마치 악마가 나를 유혹하는 것 같군. 자네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는 것…… 알고 있나?”
황정후가 살짝 말을 돌리고 있었다.
“회장님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는 제게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느끼기로는 회장님의 결벽적인 성격이 되레 회장님을 힘들게 만들고 있다는 겁니다.”
“결벽이라고? 그놈들이 저지른 짓을 생각해 보게. 내가 제때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재경을 말아먹었을 거야.”
“그럴지도 모르죠.”
“재경은 나만의 것이 아닐세. 함께 일해주고, 함께 청춘을 바친 모두의 피와 땀이 어려 있는 곳이야. 재경에서 먹고사는 이들의 수가 몇인지나 아는가? 그 많은 이들의 밥줄을 끊어놓을 뻔했는데, 그걸 용서하라는 말인가?”
강진호는 정말 이해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
“용서 못할 이유는 뭡니까?”
“이보게, 진호!”
“그들이 그래서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뭐?”
강진호는 가만히 황정후를 보며 말했다.
“살인과 살인미수를 같은 범죄로 두고 벌하지는 않습니다. 재경을 말아먹을 뻔했다는 것과 재경을 말아먹었다는 명백하게 다른 일이니까요.”
“자네가 아니었으면 빤한 결과가 나왔을 거야.”
“경찰이 출동하지 않았으면 살인이 벌어졌다고 해서 살인죄로 사람을 처벌하지는 않습니다. 법적인 책임은 물릴 것이 없고, 도의적인 책임만이 남은 겁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얼마나 벌을 줄 것인가는 온전히 회장님의 선택일 뿐이죠. 회장님이 어떤 결정을 내린다고 해도 누구도 그 선택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는 겁니다.”
황정후는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그저 내 선택이라고?”
“그렇죠.”
“이보게, 진호. 나는 이미 선택을 했지 않은가. 그놈들과 인연을 끊는 것이 내 선택일세.”
“그랬죠.”
강진호가 담배를 물었다.
“사실 저는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황정후의 눈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그저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입니다. 회장님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건 회장님의 몫이죠. 자식들을 다시 받아들여 따끔하게 가르쳐 보는 것도 회장님의 몫이고, 잘못을 저지른 자식들을 용서하지 않는 것도 회장님의 몫입니다. 다만…….”
강진호는 살짝 말을 끌었다.
“그 선택이 다른 것에 좌우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것?”
“살아온 길.”
강진호의 목소리에 무게가 실렸다. 결코 빠르지 않고 느릿한, 하지만 선명한 목소리였다.
“사람은 살아온 길을 등에 업고 삽니다. 나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기 마련이죠. 그러다 자신이 정작 원하는 것이 살아온 길과 다르다고 느꼈을 때는 쉽사리 선택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
“저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삽니다. 평범하게 살려고 하는 이유도 간단하죠. 남들과 다르게 산다는 것은 이미 지긋지긋하게 경험해 봤으니까요. 그런 삶은 평범한 삶 이상의 무언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이제는 평범하게 사는 것도 쉬운 게 아니라는 걸 알아버렸지만 말이죠.”
강진호가 싱긋이 웃었다.
“저는 제가 추구하는 행복에 방해가 된다면 무엇이라도 버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라면 굳이 제가 지켜야 할 원칙은 없는 법이죠. 하지만 회장님은 너무 많은 원칙에 얽매여 살고 있습니다. 한 번쯤은 내려놓고 돌아볼 필요도 있는 거죠.”
강진호가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방진 말씀을 드려 죄송했습니다. 앞으로는 이 일에 대해 꺼내지 않을 겁니다.”
“잠시만.”
몸을 돌리려는 강진호를 황정후가 불렀다.
“……내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뭔가?”
강진호는 진지한 황정후의 눈을 보고는 가만히 입을 열었다.
“행복했으면 좋겠으니까요.”
“행복?”
“네, 행복이요. 이제는 저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복도 생각할 여유가 있는 것 같네요. 그런데 제 주변에서 가장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누군가를 떠올려 보니, 그게 회장님이더라구요.”
황정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행복하지 않다?
그건 불행하다는 뜻이었다.
천하의 황정후를 불행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강진호가 유일할 것이다. 누구도 감히 그의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을 테니까.
“내가 불행하다 말하고 싶은 건가? 이 황정후가?”
황정후는 자존심이 상한 듯이 강진호를 노려보았다. 어쩌면 그의 말은 황정후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이룬 것이 많다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강진호가 딱 잘라 말했다.
“때로는 이룬 것이 많기에 행복할 수 없는 경우도 있죠. 채워지지 않는 것을 자꾸 다른 곳에서 채우려 드니까요.”
“내가 왜 불행한가?”
강진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다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황정후는 가만히 강진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강진호의 말에서 나오는 울림이 그조차 숨죽이게 한 것이다.
“손만 뻗으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진정으로 제가 원하는 것은 아무리 손을 뻗어도 가질 수 없더군요.”
강진호의 얼굴에 씁쓸한 빛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랬다.
전 중원이 그의 발아래 조아린 상황이었음에도 그는 조금도 행복하지 못했다. 무언가를 이룬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다.
“회장님이 찾아야 할 답은 제가 찾은 답과는 다를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찾은 답은 그랬습니다.”
강진호가 가볍게 웃었다.
황정후는 지금 강진호가 짓는 미소가…… 그가 강진호를 본 이래 가장 밝다고 생각했다.
“가족이 아니면 채울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죠.”
강진호는 가만히 황정후를 향해 웃어주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구구절절 더 말을 늘어놓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황정후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강진호가 말한 하나에서 열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 황정후였다. 그러니 이 정도면 될 것이다.
“저……!”
등 뒤에서 누군가 뛰어나오는 소리를 들은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예?”
황정후가 아니라 황정후의 가정부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이거…….”
가정부가 내민 것은 유리병에 담긴 주스였다.
“네?”
영문을 몰라 하는 강진호를 보며 그녀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고마워서요.”
그녀가 조금은 회한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나쁜 분들은 아니에요. 다들 굶주렸을 뿐이죠. 아버지가 성과를 내지 못하면 인정을 해주지 않다 보니, 어떻게든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죠. 마지막에도 그랬을 거예요. 회사를 자기 손으로 장악하지 못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제가 굳이 알 필요는 없는 이야기 같군요.”
“네, 그래요. 그저 그렇게라도 말을 해주셔서 고마워서요. 그러니 들어요.”
강진호는 손에 들린 주스를 가만히 보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가보겠습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네, 그럼.”
강진호는 미련 없이 집을 나섰다. 그러고는 대문을 나와 뒤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집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
황정후의 집이 예전에 그가 살던 높고 큰 전각과 겹쳐 보였다. 겉으로 보면 웅장하지만,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온기라고는 한 점도 찾을 수 없던 그 삭막한 전각을 떠올리며 강진호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가족이란 그런 것이다.
서로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이해하고 받아들여 줄 수 있는 게 가족이지만, 때로는 크지 않은 문제로도 완전하게 갈라서게 되는 것.
그리고 가벼운 갈라짐에 시간이라는 것이 끼어들게 되면 되돌리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시간은 이상한 것이라서 쌓이면 쌓일수록 손을 뻗기 어렵게 만든다.
그러니 그럴 때는 누군가가 등을 밀어주어야 한다. 강진호가 한 것은 그저 그것뿐이었다.
그들의 잘못이 얼마나 큰지, 과연 그 잘못이 영원히 용서될 수 없는 것인지는 황정후가 판단할 것이다.
비록 다시 손을 뻗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가슴속에 쌓여 있는 응어리가 조금이라도 풀릴 수 있다면 그걸로 좋겠지.
강진호는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걸었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는 황정후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말만은 진심이었다.
가족이 아니면 채울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다.
강진호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차 키를 꺼냈다.
* * *
“야.”
“응?”
“누가 보면 너 성공한 청년 사업가인 줄 알겠다?”
“……왜?”
“아이고, 사장님이 늦게 출근하신다는데 월급 받고 일하는 저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저희야 제때 월급만 주시면 아무 불만 없는 무지렁이들이지요.”
주영기의 너스레에 강진호가 주춤 밀려났다.
“야, 30분 늦었다.”
“어허, 이 사람 보게!”
주영기가 ‘떽!’ 하는 얼굴로 강진호를 보다가 박유민에게 물었다.
“야, 유민아.”
“응?”
“회사에서 30분 늦으면 어떻게 되냐?”
“글쎄? 나는 회사 안 다녀봐서 잘 모르겠는데, 우리 연습실에서 연습 시간에 30분 지각하면 그날은 초상난다고 봐야지.”
“그런데 겨우 30분밖에 안 늦었다고 하는 분이 계신다. 잘 봐라, 유민아. 저것이 오너다. 오리지널 금수저의 힘이다!”
“크으, 눈이 부신다.”
강진호는 쭈구리가 되어 구석으로 슬슬 밀려났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요즘 자꾸 밖으로 나돌면서 가게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의 가게다. 그가 시작한 일인데, 실제로 가게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주영기와 박유민이었다.
“내가 진짜 미안하다. 너희한테는 정말 고맙…….”
“하지 마! 오글거린다!”
주영기가 치를 떨었다.
“저게 요즘 어디 좋은 것만 처먹고 다녔나? 입에서 빠다가 줄줄 흐르는데?”
“진호야, 하지 마라. 닭살 돋았다.”
“……미안.”
박유민이 피식 웃더니 강진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얼른 준비하자. 조금 있으면 오픈 시간이야.”
“그런데 유민아.”
“응?”
“너, 연습 안 해도 되냐? 준비한 지 오래됐잖아.”
“때와 시기가 있는 거야.”
“그래?”
“다음 시즌 시작하려면 한참 남았어. 그때는 울고불고 매달려도 여기 안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얼른 준비해.”
“……알았다.”
강진호는 박유민에게 등 떠밀려 탕비실로 향하면서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한 곳 더 있긴 하네.’
채울 수 있는 곳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