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321
#320.
방문하다 (5)
다음 날.
“……내가 미쳤지.”
최연하는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어설프게 약을 올려보려다가 덤터기를 쓴 상황이 아닌가. 차를 주차하고 내려서 오늘의 목적지를 확인한 최연하가 연신 신음을 냈다.
“보육원은 뭐냐고.”
그렇게 안 생겨놓고 의외로 건실한 청년이었다는 것이 첫 번째 충격이고, 오늘만큼은 그녀도 건실한 처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두 번째 충격이었다.
“왜 안 와!”
약속한 시간은 아직 30분이나 남았지만, 그녀에게 그런 것을 감안한 정신이 있을 리가 없었다. 부들부들 떨던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벌 받는 거지.’
괜스레 강진호에게 화풀이를 한 대가라면 대가였다. 평소에는 안 그러는데, 이상하게 강진호의 얼굴만 보고 있으면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딱히 특별 대접을 바란 적은 없지만, 지나가는 소 바라보듯 보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다시 끓어오르는 열을 식히려 손부채질을 하고 있으니, 저 멀리서 빨간색 스포츠카가 보였다.
‘얼씨구?’
눈에 띄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척하더니, 차는 또 저런 걸 타고 다니네?
“돈 많다더니…….”
저런 차를 몰고 다니는 것을 보니 정말 돈이 많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돈이 많으니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자신의 말에도 콧방귀를 뀌었겠지.
강세아의 말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녀가 평생 벌어도 가질 수 없는 돈을 이미 통장에 가득가득 쌓아놓고 있는 모양이던데.
“대체 정체가 뭐지?”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강세아나 본인이 하고 다니는 꼴을 감안하면 절대 재벌가는 아니다. 태생적으로 돈이 많은 인간들은 티가 난다. 그런데 강진호는 그런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차가 그녀의 차 옆에 멈춰 서고, 강진호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일찍 오셨네요.”
“빨리빨리 좀 다녀요.”
“미안합니다.”
충분히 일찍 온 걸 알고 있지만 괜히 심술을 부려봤는데, 저리 간단히 사과해 버리니 할 말이 없었다.
‘난 나쁜 년이야.’
무슨 사춘기 중학생도 아니고, 어제부터 계속 심술만 부리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가에 대한 자각이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자각도 있었다.
문제는 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입이 제멋대로 말을 내뱉는 다는 것이다.
“들어가시죠.”
“……네.”
조금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나오기 시작했다. 최연하는 가슴에 손을 얹고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연하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가 규방 규수인 줄 알았으면 오산이야.’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사실 강원도 두메산골 출신이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그리 만만하지는 않다.
“……이걸 다요?”
“네.”
최연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빨랫감을 바라보았다.
“이걸 손빨래한다구요?”
“네.”
최연하에게 빨랫감을 보여준 아주머니가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원래는 오늘 자원봉사자분들이 오시기로 했는데, 스케줄이 꼬여서요.”
“원래 그분들이 오셔서 이걸 다 해주시는 거예요?”
“보통은 그렇죠.”
“여, 여긴 세탁기도 없어요?”
“세탁기는 있는데, 세탁기 하나로 감당을 못해요.”
“헐…….”
최연하의 손이 덜덜 떨렸다.
저게 빨래인가?
천으로 만든 산이라고 해야 할 것들이 아닌가. 과장 조금 보태면 쌓인 빨래가 그녀의 머리를 넘으려 하고 있었다. 그녀가 결코 작은 키가 아니라는 것을 감안하면, 저 빨래의 위용은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걸 어떻게 사람 손으로 빨아요?”
“세탁기를 돌리기는 하는데, 애들만 서른이 넘다 보니 하루에 나오는 빨래도 장난이 아니에요. 거기에 이번에는 이불 빨래를 해야 하다 보니…….”
“…….”
“오늘은 대청소날이라 평소보다 빨래가 많은 거예요.”
“저, 저걸 제가 다 하는 건가요?”
“에이, 혼자 못하죠. 일단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주세요.”
최연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 짓이 살짝 미친 짓 정도로 격하되는 순간이지만,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어야 할 텐데? 그런 옷 입고 일할 수 있겠어요?”
“……다른 옷 안 가져왔는데요.”
“그럼 빌려 드릴 테니까, 입고 하세요. 여긴 옷 빼면 남는 것도 없는 데예요.”
“네.”
최연하가 빠져나가는 영혼을 애써 붙들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오빠, 왜 이리 오랜만에 왔어요?”
“미안하다.”
강진호는 트럭으로 배달된 쌀과 부식들을 창고로 나르면서도 졸졸 따라붙는 아이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이들은 마치 어미를 따르는 새끼 오리들처럼 그의 뒤를 일자로 졸졸 쫓아다녔다.
일을 하는 데 방해가 되는 건 사실이지만, 다른 사람들이면 몰라도 강진호는 그 정도는 커버할 수 있었다. 그가 짐을 나르는데 주변 사람이 다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휴…….”
창고 안의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새로 부식들을 다 쌓아놓고 나서야 시간이 좀 생겼다.
‘일이 만만찮군.’
딱히 체력적으로 힘들 것은 없지만, 그건 강진호니까 가능한 일이다. 일반 남자가 이 일을 했다면 지금쯤 녹초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을 것이다.
“식사하시래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강진호가 고개를 돌려 숙소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최연하 씨는 뭐하지?’
이미 이곳에 온 지가 세 시간이 넘어가는데, 도착한 이후로는 얼굴도 보지 못했다.
“오빠랑 같이 온 언니 어딨니?”
“빨래하던데?”
“빨래?”
강진호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보육원 안쪽으로 향했다. 일단 점심시간이니 같이 밥을 먹고 남은 일을 마저 하든 해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이 정도면 깔끔하게 정리가…….’
안으로 들어선 강진호의 눈이 부릅떠졌다.
“어…….”
나름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겪어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강진호이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그의 평정심마저 깨뜨리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빨간색 몸빼를 빼입고 위에는 대체 어디서 가져온 건지 알 수도 없는 꽃무늬 티를 입은 최연하가 전신이 물에 홀딱 젖어 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목욕하셨어요?”
“이이…….”
최연하가 보육원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생각도 없는 인간아!”
부우우우웅!
“사람이 눈이 있으면 상황을 보고 움직여야 할 거 아니에요! 그걸 보고도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다는 거 아냐! 돈 놔뒀다가 뭐 할 건데? 저승 갈 때 싸 가지고 갈 거야?”
“……미안합니다.”
“세상에 자원봉사자로 해결이 안 돼서 애들까지 살림하고 빨래하고 그런다는데, 그걸 보고 있었어? 이상한 걸로 생색내지 말고 있는 돈을 쓰란 말이에요!”
“예.”
강진호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빨래라는 게 그렇게 많이 나오는 건가?’
어린아이 하나만 있어도 집 안의 세탁기는 쉴 새 없이 돌아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아이가 서른이 넘는 보육원이 세탁기 한 대로 뭘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애들 옷 봤어요?”
“네? 옷이요?”
“으으으…….”
최연하가 막 발작을 하려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건 그냥 말을 말아야지.’
강진호가 옷을 입고 다니는 꼴을 보니 굳이 말을 해봐야 입만 아플 것 같았다. 이건 거의 아프리카 토인 수준의 마인드다. 철저하게 옷의 기능성에만 주목한 복장이 아닌가.
목이 다 늘어나고 보풀이 미친 듯이 일어나 멀쩡하던 후드가 양털 후드가 될 때까지 입고 있는데, 거기에 무슨 말을 하라는 건가.
‘강세아는 뭐하는 거지?’
제 오빠가 저리 입고 다니는 걸 매일 눈으로 볼 텐데, 왜 코디를 해주지 않는 건가. 대체 무슨 속셈으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뭔가 시커먼 느낌이 났다.
“빨리 가요! 애들 밥 다 먹기 전에 돌아가야 하니까.”
“아, 네.”
강진호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여자, 왜 이러지?’
그냥 따라온다기에 적당히 손이나 하나 더 있으면 좋겠다 싶어 데리고 온 건데, 갑자기 이리 열을 내는 영문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분위기에 어설프게 말을 꺼냈다가는 타박만 더 당할 것 같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이상하지, 참.’
처음 강진호를 만나면 다들 친절하던 사람들이, 조금 친해졌다 싶으면 이상하게 언성을 높이는 일이 잦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본인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전 매장에 들어선 최연하가 매의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일단 세탁기!”
“…….”
“따라와요!”
“……네.”
강진호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최연하의 뒤를 쫓았다.
‘옷이라도 좀 갈아입지.’
몸빼와 꽃무늬 남방을 걸치고 그 와중에 얼굴 팔리면 안 된다고 마스크와 선글라스까지 낀 최연하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얼굴만 가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듯이 당당하게 걷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찾으시는 물건 있습니까?”
“세탁기요.”
“아, 세탁기요. 혼수……는 아니고, 어머님……도 아니고…….”
혼란에 빠진 점원을 보며 강진호가 동정의 시선을 보냈다.
그럴 만도 하지.
“세탁기 어딨어요?”
“저, 저쪽입니다, 손님.”
점원이 재빠르게 최연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신혼이면 어떻고, 모자지간이면 어떤가. 팔면 그만이지. 세탁기를 진열해 놓은 곳에 도착한 최연하가 주위를 쭉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용량 제일 큰 걸로요!”
“용량 말씀이십니까? 그보다는 이쪽 제품은 어떠십니까? 꼭 용량이 크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이 제품은 위아래 두 개의 세탁조가 있어서 속옷이나 색깔 빨래를 따로…….”
“제. 일. 큰. 거.”
“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점원이 한쪽 구석에 진열되어 있는, 아름답게 커다란 세탁기를 가리켰다.
“저희 매장에 있는 제품 중 가장 큰 용량의 세탁기입니다!”
최연하가 그 웅장한 세탁기의 위용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배송되죠?”
“물론입니다.”
“바로 돼요?”
“아…… 그건 좀 어렵습니다. 내일까지는 어떻게…….”
“다섯 대.”
“……네?”
“세탁기 다섯 대. 지금 바로 배송되죠?”
“물론입니다, 사모님!”
강진호가 뒤에서 가만히 그 광경을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데자뷰인가.’
전에도 이런 광경을 본 것 같은데……. 아니, 봤다기보다는 겪은 것 같은데…….
“그리고 전자레인지!”
“이번에도 큰 건가요?”
“전자레인지가 큰 게 어딨어요. 적당한 걸로 소개해 주세요. 그것도 다섯 대니까.”
“최고의 가성비로 모시겠습니다.”
몸빼를 입고 마치 런 웨이를 걷듯 가전제품 사이를 활보하는 최연하를 보면서 강진호는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주방에 전자레인지 다섯 대를 놓을 데가 있나?’
“그리고 청소기 초대형으로, 흡입력 최강으로!”
“영혼까지 빨아들이는 청소기가 있지요.”
‘그런 거 없어.’
딴지 걸고 싶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강진호였다.
“아, 그리구요.”
“네?”
“쇼핑 끝나면 바로 출발할 테니까, 고르는 건 바로바로 실어주세요.”
“고, 고객님, 저희 매장이 크긴 하지만, 같은 물건을 다섯 대씩 보유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려면 타 매장의 물건까지 가져와야 하는데…….”
최연하가 뭐가 문제냐는 듯 되물었다.
“그럼 지금 타 매장에서 출발하라 그래요.”
“현명하십니다.”
“훗.”
목이 부러질 듯 허리를 세우고 앞으로 걸어가는 최연하를 보며 강진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저 여자…… 이상해.’
확실히 평범한 타입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