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322
#321.
받아치다 (1)
이제 와 말하는 것이지만, 의외로 강진호는 쇼핑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면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은 인간이라면 다 가지고 있는 습성이다. 그 정도가 덜한가, 더한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과거 중원에서도 그랬다.
무(武)가 아니면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을 것 같은 무인들조차 자신의 의복의 색은 쉽사리 바꾸지 않았고, 좋은 병기가 있다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중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이도 있었다.
현대의 아이템에 대한 집착이 그 시대에는 현실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강진호 역시 그런 습성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처음 적루를 넣었을 때, 얼마나 뿌듯했던가.
적루를 처음 손에 잡았을 때, 착 감기던 그 감촉이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였다.
게다가 차를 고를 때도 나름 재미를 느꼈다는 것을 떠올려 보면, 강진호는 쇼핑을 싫어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강진호가 어머니나 강은영과의 쇼핑을 지옥처럼 느끼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지속해야 한다는 고통 때문이었다.
똑같은 두 개의 치마를 들고 어느 쪽이 더 예쁜가를 논해야 한다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강진호는 긴 치마와 짧은 치마의 기능성을 논할 수 있는 수준은 되지만, H라인 스커트와 A라인 스커트의 심미성에 대해서는 세 살 아이보다 지식이 없었다.
더구나 더욱 그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어느 쪽이 더 나은가’에 대한, 질문은 있지만 그에 대한 대답이 그들의 결정에 단 0.01%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이해할 수 없고, 영향력을 끼칠 수 없으며, 고려되지 않는 것에 대해 몇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것은 정신 고문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쇼핑은 강진호에게 있어서 그리 나쁘지 않은 쇼핑이었다.
아무리 강진호가 쇼핑에는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TV가 뭔지는 알고, 세탁기가 뭔지는 아니까.
하지만 문제는 지금 그가 함께 쇼핑을 하러 온 사람은 강진호도 아는 기본적인 상식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고객님, 이 TV는 이번에 나온 신제품으로, 곡면 화면이 화면에 대한 집중력을 키워주는 제품으로.”
“뭐야? 이거 왜 휘었어?”
“휜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만든 겁니다.”
“평면으로 보여줘요.”
“이, 이게 더 좋은 제품입니다.”
‘더 좋은 거라잖아.’
“이봐요.”
최연하가 다리를 살짝 들었다가 바닥을 강하게 내리밟았다. 평소처럼 하이힐을 신고 그런 동작을 하면 바닥이 쾅, 하고 울리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최연하가 신고 있는 것은 국민템이라고 할 수 있는 삼디다스 운동화였다. 그것도 시장표.
찰팍거리는 효과음에 조금 당황한 최연하였지만, 전혀 티를 내지 않고 말했다.
“평면으로 보여 달라는 내 말 못 들었어요?”
“아닙니다! 고객님, 이쪽으로 가시죠.”
기겁을 한 점원이 최연하의 앞에서 허리를 접은 채 이동하는 기술을 선보였다.
강진호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자신이 저런 대접을 받기 위해서 사용한 돈과 최연하가 쓴 돈의 차이는 극심했다.
하지만 최연하는 아직 많은 돈을 쓴 것도 아니고ㅡ 결제를 한 것도 아님에도 점원들이 제 알아서 몸을 숙이게 만드는 포스를 뿜어내고 있었다.
저렇게 입고 말이다.
‘타고났네.’
보통 사람은 평생을 교육받는다고 해도 결코 낼 수 없는 분위기를 꽃무늬 남방과 몸빼바지를 입고 뿜어내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런데 TV가 꼭 있어야 합니까?”
최연하의 고개가 획 돌았다.
검은 선글라스 안의 눈이 커다랗게 커진 모습이 강진호의 눈에 들어왔다.
“강진호 씨.”
“네?”
“강진호 씨가 미디어라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충분할 정도로 잘 알고 있는데요, 보통 사람들은 미디어를 봐야 해요.”
“굳이…….”
“남자는 몰라도 여자애들은 어제 화제가 되는 드라마를 안 챙겨 보면 말도 잘 안 통해요. 그게 자기가 다른 일을 하다가 놓치는 게 아니라, TV를 제대로 볼 수 없어서 놓치는 거라면 얼마나 속이 상하겠어요? 안 그래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 같았다. 순간 말문이 막힌 강진호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본 최연하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강진호 씨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아요. 강진호 씨는 자연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라 지금 주변을 장식하고 있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다 벗어던진다고 해도 지금처럼 살 수 있겠죠.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안 그렇거든요. 그냥 못하니까 참는 거지, 할 수 있다면 남들 하는 건 다 해보고 싶은 게 사람들이에요. 무슨 소린지 알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논리와 명분에서 학살당해 버린 강진호가 흐물흐물해졌다.
“크흐흐흠, 옳으신 말씀입니다.”
누구에게 비벼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한 점원이 강진호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려 버리고는 최연하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일단 평평한 TV로. 방이 몇 개더라? 애들 방에는 안 들어갈 테니까, 너무 큰 거 말고 적절한 사이즈로 보여줘요.”
“아, 방방마다 넣으시는 모양이네요. 그럼 이 모델은 어떻습니까. 30인치 중에서 가장 잘나가는 모델인데.”
“저기요.”
“네?”
“30인치로 TV 보면 뭐가 보여요?”
“…….”
“40인치는 되어야지. 더 큰 거!”
“예, 고객님! 지당하십니다!”
강진호는 하염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최연하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기관차처럼 폭주했다. 세탁기와 전자레인지, TV와 청소기까지 구비한 최연하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1층의 휴대폰 매장이었다.
최신 휴대폰 50대를 가져오라는 말에 기겁을 한 점원이 주변 매장에 전화를 돌려서까지 50대를 맞춰왔다.
“이것이 최신폰입니다.”
“이거 국산이죠?”
“……구, 국산이긴 한데?”
담당자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고객님, 휴대폰은 국산이 제일 좋습니다? 다른 나라도 다 한국산을 씁니다?
이 사람이 정말 국산폰을 무시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사과 모양 폰을 찾는 것인지를 깔끔하게 알아채지 못한 담당자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음, 이건 취향 문젠데…….”
“그, 그렇습니다. 선호하는 폰이 보통 이 둘 중 하나죠.”
“그런데 애들한테 물어보고 오지를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음…….”
최연하가 머리를 살짝 긁더니 고개를 돌려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대놓고 ‘저 인간에게 물어봤자 아무런 도움이 안 되겠지’라는 얼굴로 획 돌더니, 어디인가로 전화를 걸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전화를 마친 최연하가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는 얼굴로 상큼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거도 50개 준비해 주세요.”
“고객님, 그럼 총 휴대폰이 100개가 됩니다만?”
“네. 그중 50개는 반품할게요.”
“예?”
“박스 안 까면 되는 거 아니에요? 50개씩 깔아놓은 뒤 고르라고 하고, 남은 건 다시 가져오면 되죠. 무슨 문제라도?”
기계 100개를 준비하고 직접 방문하여 50대를 팔았을 때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대한 계산을 순간적으로 마친 담당이 너무도 화사한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문제가 있으면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오케이.”
최연하는 충분히 밥을 먹고 만족한 고양이처럼 갸르릉거렸다.
“그럼 고객님, 결제는?”
“여기요.”
최연하의 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이 나온다.
“아니, 제가…….”
강진호가 카드를 꺼내려고 하자 최연하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자신의 카드를 점원에게 건넸다.
“결제해 주세요.”
“예?”
점원이 살짝 최연하의 눈치를 봤다. 가격이 만만한 것도 아니고, 보통 이렇게 남자와 여자가 서로 계산하겠다고 나설 때는 여자가 못 이기는 척 남자에게 계산을 넘기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뭐하세요?”
“아…… 네.”
하지만 최연하는 단호했다.
“내가 쇼핑하는 걸 왜 강진호 씨가 결제해요?”
“아이들한테 쓰는 거니까요.”
“아이들에게는 나만 돈을 쓸 수 있다는 그 마인드가 좀 미묘하네요. 그리 애들을 위한다 싶으면 평소에 좀 잘하세요. 쌀 나르고, 창고 문 고치는 일 정도야 할 사람 많잖아요. 람보르기니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자기 가는 보육원 애들 옷이 다 해지고 있는데, 그걸 보고도 그러려니 하고 있어요?”
“몰랐습니다.”
“관심이 없는 거지.”
최연하가 딱 잘라 말했다.
“걱정 말아요. 나도 생색낼 생각 없으니까. 이 정도 썼다고 생색낼 자격 없다는 것 알아요. 내가 오늘 쓴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정말 힘들게 일하시는 분들이 조금씩 모아서 낸 후원금만 한 가치는 없다는 것 알아요. 그냥 기분이나 내는 거니까, 그냥 냅둬요.”
“예.”
최연하가 만족했다는 듯이 기지개를 쭉 켰다.
“그럼 다음은 애들 옷을 사 줄까?”
“아뇨.”
강진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제가 할 테니 내버려 두세요.”
“강진호 씨가요? 그쪽으로는 별로 같은데…….”
“편히 쇼핑하게 만들어줄 수 있습니다.”
“흐응.”
강진호가 재경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떠올린 최연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고개를 돌린 최연하가 환히 웃었다. 마스크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 얼굴 그대로 최연하가 점원을 보며 말했다.
“준비 끝났죠? 출발하면 되나요?”
“고객님, 아직 준비가…….”
“아직?”
“그, 금방 끝내겠습니다.”
“네. 뭐, 그럼 배송해 주세요. 휴대폰은 저녁에 애들 다 들어와야 하니까 열 시까지 와주시고, 개통까지 알아서 해주세요.”
“예, 고객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 참고로…….”
“네?”
“이쪽 아저씨는 사고 나면 그냥 끝이지만, 나는 그런 것 없어요. 배송이라든가 설치라든가, 또는 서비스가 좀 부족하다 싶으면 전부 다 반품시키고 옆 매장 가서 다시 살 테니까 알아서 해요.”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확언하는 점원과 그 뒤에서 열의를 불태우는 점장을 보니, 확실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최연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강진호 씨.”
“네.”
“강진호 씨가 찾아가서 하루 놀아주고 잡일해 주는 것의 몇 배를 내가 해줬다는 거 인정하죠?”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식이 다르기는 하지만, 원장이나 보육원을 운영하는 이들이 오늘의 강진호와 최연하 중 누굴 선택할 것인가를 역으로 생각해 보면 답은 쉽게 나온다.
“그렇죠.”
“그럼 강진호 씨가 오늘 해야 할 일을 내가 해준 거라고 생각해도 되죠?”
“미묘하게 다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되겠죠.”
“그럼 강진호 씨가 오늘 보육원 간다고 나랑 안 놀아주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
“커피.”
“네?”
“커피 한 잔 쏴요. 오래 잡아두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지금 내가 한 것만 해도 강진호씨가 내게 커피 한 잔 사 줄 이유는 될 것 같은데요? 아닌가요?”
……차고 넘쳐서 문제다.
조금 전 결제를 꼭 자신이 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강진호가 깊이 한숨을 쉬었다.
“가시죠.”
“우선은 보육원으로.”
“어째서요?”
최연하가 살짝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강진호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 꼴로 카페 가서 커피 먹느니, 혀 깨물고 죽을래요.”
“…….”
진심이 느껴져 순간 소름이 돋은 강진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