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347
#346.
복수하다 (1)
분위기라는 것은 사람의 판단을 흐려놓는다. 아무리 사람을 웃기는 데 목숨을 건 사람이라고 해도 엄숙한 장례식장에서 드립을 늘어놓을 수는 없다.
그게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라 하더라도 인간이란 본능적으로 주변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생물이니까.
지금 강진호는 분위기라는 게 사람을 얼마나 위축시킬 수 있는가를 체험하고 있었다.
귀신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얼굴을 한 강은영과 그 대상이 누군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의 머리채를 잡아 동네 한 바퀴를 시전할 듯한 기세인 백현정, 그리고 그 뒤에서 ‘내가 자식놈을 잘못 키웠지’라는 얼굴로 노려보고 있는 강유환은 그 셋이 내뿜는 기운만으로 이 넓은 거실을 싸늘히 식히고 있었다.
‘춥다.’
몸이 춥고, 마음이 추웠다.
그 고생을 한 끝에 도달한 곳이 따뜻한 가족의 품이 아니라 곧 죽일 듯 노려보는 시선이라는 점이 강진호를 서글프게 만들고 있었다.
‘그냥 교통사고당했다고 할걸.’
대충 머리를 살짝 다쳐서 3일 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다고 하면 지금쯤 온 가족이 달려들어서 ‘오구오구’를 시전하고 있을 텐데, 괜히 말을 이리했다가 귓빵맹이를 처 맞게 생겼다.
‘무능해.’
강진호의 주장에 조규민이 한 평가는 이랬다.
“그러면 강진호 씨는 좀 편해질지 모르겠지만, 부모님이 가슴 아프지 않겠습니까? 아들내미가 자전거 타고 퇴근하다가 차에 치여서 의식을 잃고 3일간 사경을 헤맸다고 하면, 부모님 가슴이 찢어지실 텐데요.”
맞는 말이다.
듣기에는 무조건 맞는 말이었다.
뉴스에 나오는 효자는 못 되더라도 부모님 가슴에 대못은 박지 말아야 한다는 신조로 살고 있는 강진호에게 있어서 그 말은 결정타였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부모님이 가슴 아프지 않고, 강진호가 좀 나쁜 놈이 되는 변명을 만들어보자’였는데…….
‘그게 왜 최연하와 여행을 갔다 온 게 되냐고!’
조규민이 만들어준 시나리오는 이랬다.
그날 밤, 퇴근하려는 강진호의 앞에 최연하가 나타났다. 그리고 갑자기 여행을 가자고 제안을 했다. 그 정도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알았다고 했더니, 최연하가 바로 강진호를 데리고 공항으로 향했다.
마침 여권도 챙기고 있고 해서 심야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갔다. 로밍하는 법을 몰라서 휴대폰이 통화권을 벗어나 있었고, 여행의 와중에 휴대폰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놀다가 지금 돌아왔다.
‘이게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인가?’
해석하면 ‘제가 이렇게 생각 없고, 멍청하고, 한심합니다, 여러분’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수준이었다.
물론 강진호에게도 최소한의 이성이라는 것이 있고,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했지만…… 조규민은 단호했다.
어설프게 다른 변명을 하는 것보다 최연하쯤 되는 미인에게 홀려서 헤헤거리며 해외를 다녀왔다고 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의견이었다.
다른 사람과 여행을 갔다고 하면 미친놈이 되지만, 최연하가 제안하는 여행을 거부할 수 있는 남자는 없다는 것을 부모님도 납득하시리라는 것이 조규민의 말이었다.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느냐는 반박에 최연하쯤 되는 여자와 여행을 갔다 왔다고 하면 부모님도 좋아하실 것이라며 강력하게 밀어붙인 조규민이었다.
연애는 원래 그런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말이다.
‘그 양반이 모태 솔로라는 것을 생각했어야 하는 건데…….’
말을 꺼낸 조규민도 멍청하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은 강진호도 멍청했다. 최소한 조규민에게는 연애에 관련된 말을 듣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내가 컴퓨터를 모르면 컴퓨터 전문가에게 가야지, 생전 컴퓨터를 만져 본 적도 없는 오지 사람에게 견적을 문의한 꼴이 아닌가.
그리고 그 대가는 지금 통렬하게 강진호를 때리고 있었다.
“연락도 없이?”
“……죄송합니다.”
“말도 없이?”
“…….”
“진호야?”
“예, 어머니.”
“그러니까, 우리 아들이 엄마한테 연락 한 통 없이 여자와 헤벌레거리면서 해외를 돌고 있었다는 말이구나. 가게도 내팽개치고 말이야.”
강진호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무능하다고!’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조규민에게 뛰쳐 가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대처를 상의하려면 주영기나 박유민을 불렀어야 한다. 조규민이 아니라!
“그리고 여행하는 내내 엄마가 걱정할 건 생각도 안 하고 전화 한 통 안 했다는 거지? 아프리카라도 갔다 왔니? 거긴 공중전화기도 없어?”
“……국제전화 거는 법을 몰라서.”
“우리 아들은 카톡도 못하니? 와이파이 없었어?”
“……폰을 잃어버려서.”
“최연하 씨도 폰을 같이 잃어버렸어?”
강진호가 점점 더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그 순간, 강은영이 입에서 말 그대로 불을 뿜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이 인간아! 차라리 어디서 교통사고가 나서 3일 동안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가 오늘 기억을 되찾았다고 해라! 어디 3류 막장드라마 시나리오만도 못한 변명을 들고 와서 헛소리를 내뱉고 있어!”
‘그 시나리오로 갈걸.’
강진호도 생각한 시나리오인데 이렇게 동생과 마음이 잘 맞을 줄은 몰랐다.
“3일 동안 연락 한 번 없이 잠적 탔다가 뻔뻔스럽게 얼굴 들이밀어 놓고는, 뭐? 여행? 여해애애앵? 관광공사가 알면 표창장 주겠네. 세상에 이렇게 여행 좋아하는 사람을 그동안 집에만 잡아뒀으니 얼마나 갑갑했을까? 내가 미안하다! 내가!”
집 안에 비난계의 샛별이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어쩜 저렇게 욕 한마디 안 하면서 사람 속을 이리 뒤집어놓을 수가 있단 말인가.
강진호는 서글픔과 감탄을 동시에 느꼈다.
“어디서 되도 않는 소리를 하고 있어! 똑바로 못 불어?”
“……사실인데.”
“사실?”
강은영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오라비의 탈선에 대한 증거를 찾겠다는 일념하에 강은영이 탐정 본능을 확인했다.
“야, 나 출입국 사무소에 조회해 볼 줄 알아. 해외 나간 거 안 찍혀 있으면 어쩔 건데? 여권 내놔봐.”
“여, 여권 잃어버렸어.”
“오호라?”
강은영이 백현정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마마마, 확신범입니다. 오라비의 변명은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주리를 틀어 자백을 받아야 할 것으로 아뢰오.”
“진호!”
“예, 어머니.”
“똑바로 말 안 할래?”
강진호는 그냥 웃어버렸다.
‘무능해.’
그냥 무능한 게 아니라 극도로 무능하다.
얼마 전, 그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지옥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너, 지금 엄마 앞에서 거짓…….”
그 순간, 강유환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강유환의 헛기침에 백현정이 입을 닫았다.
“여보.”
“음, 일단 잠시만.”
강유환이 백현정을 만류하고는 가만히 강진호를 보며 말했다.
“진호야.”
“예, 아버지.”
강유환이 가만히 강진호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보기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는 않은 거지?”
“예.”
강진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그가 한 일은 칭찬을 받을 일이지, 결코 꾸지람을 들을 일이 아니었다.
“그럼 됐다. 들어가서 쉬어라.”
“……예?”
“부끄러울 짓 한 거 없다며?”
“예.”
“그럼 됐지. 더 이상 이야기해서 뭐하겠어?”
“아빠!”
“여보!”
“쉿!”
강유환이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너도 이번에 잘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
“예. 알고 있습니다.”
“그래. 내가 아는 진호는 부모 생각 안 해서 연락할 수 있는데도 연락 안 하는 놈이 아니다. 네가 연락을 안 했으면 연락을 할 수 없던 이유가 있었겠지.”
강진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때로는 무겁고, 때로는 힘이 나는 일이었다.
“피곤할 텐데, 얼른 들어가서 쉬어라.”
“예, 아버지.”
강진호는 대답을 해놓고는 슬쩍 어머니와 강은영의 눈치를 보았다. 불만 가득한 얼굴의 두 사람이지만,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여기서 즉각 반대를 늘어놓는다는 것은 아버지의 체면을 깎아먹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자리를 피해 드려야겠네.’
강진호가 슬그머니 일어나서 살짝 목례를 하고는 방으로 향했다.
강진호가 들어가고 방문이 닫히자, 백현정이 도끼눈을 뜨고 강유환을 노려보았다.
“이렇게 끝낼 일이 아니잖아요, 여보!”
“그럼? 어떻게 하자고?”
“그래도 사정이 어떻게 됐는지 정도는 들어봐야죠. 아무리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요!”
“쟤 성격 몰라서 그러는 거야? 한 번 말을 안 하기로 했으면 절대 말 안 할 놈이잖아.”
“그래두요!”
“그러지 맙시다.”
강유환이 고개를 저었다.
“내 새끼가 부끄러울 일 저지르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걸 못 믿어주면 어떻게 해? 우리가 부모라고 쟤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믿어주는 것 하나 못한단 말이야?”
“……여보.”
“그리고 진호가 지금까지 어디 우리 걱정 시킨 적 있어?”
“안 그러던 애가 그러니까 더하는 거죠.”
“그게 잘못된 거라고!”
“……예?”
강유환이 단호하게 말했다.
“안 그러던 녀석이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하면 보듬어줘야지, 안 그랬으니까 더 그러면 안 된다는 건 무슨 논리야? 그런 식으로 자식에게 실수도, 실패도 하지 않는 삶을 강요하지 마. 실수 안 하던 애는 어디 사람도 아닌가? 부담감이 사람을 망치는 법이야.”
하지만 백현정은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앞으로도 진호가 비슷한 일을 한다면 그때는 제 행실의 대가를 치르겠지. 그 대가는 우리가 진호를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하게 되는 거고. 그건 그때 일이야. 지금까지 제 일, 제 스스로 잘하면서 부모한테 걱정 안 끼치던 자식이면 실수 한 번 해도 웃으며 넘어가 줄 수 있어야지. 100점 맞던 애가 80점 맞아 세상 끝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 대면, 애는 앞으로 100점을 못 맞으면 인생이 뒤틀린 것처럼 느끼는 법이야.”
백현정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적으로는 모든 걸 납득할 수 없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 것 같았다. 그동안 잘해오던 자식이 한 번 실수를 했다고 다그치고 화를 내면 그의 아들은 앞으로는 약간의 실수조차 두려워하게 될 것이고, 실수를 한다 해도 숨기려 들 것이다.
‘참 별걱정을 다 해야 하네.’
예전부터 생각해야 하는 부분이었는데, 고등학교 때 이후로 워낙 걱정을 끼친 적 없는 강진호이다 보니 이제 와 이런 걱정을 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생겨나고 있었다.
“다 큰 놈이 그럴 수도 있는 거라 생각하고 한 번 웃고 넘어가. 제 속 안 편한 게 얼굴에 다 보이는데, 그걸 굳이 꼬집어 물어뜯어야겠어? 우리 자식이잖아. 진호 못 믿어?”
“……믿죠.”
“그래. 그럼 된 거잖아. 애한테만 제대로 된 자식이 되라고 구박하지 말고, 우리도 훌륭한 부모가 되도록 노력하자고. 아직은 우리가 좀 더 노력해야 할 시기 아니겠어?”
“당신 말이 맞아요.”
백현정이 함락된 듯하자 강은영이 반기를 들었다.
“아빠! 나는 납득이 안 가는데?”
“그럼 너도 앞으로는 진호와 같은 기준으로 청문회 좀 열어볼까?”
“오빠는 잘못이 없습니다!”
현실과 타협한 강은영이 크윽, 신음 소리를 내며 침몰했다.
강유환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물론 나도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아. 저놈이 왜 그러나 싶기도 하지. 그런데 진호는 이미 충분히 마일리지를 쌓았잖아. 그럼 잘못을 했더라도 그동안의 공으로 이해해 줘야지. 끝까지 파봐야 감정만 상할 게 빤히 보이는데…… 믿어주고 넘어가자고.”
“예. 당신 뜻대로 할게요.”
극적 타결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 강진호는 문 앞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다른 무엇보다 내 자식을 믿는다는 말이 강진호의 가슴에 가장 와닿았다.
그리고…….
“그런데 저놈, 진짜 최연하 씨랑 여행간 건가?”
“……물어볼까?”
“다 큰 남녀가 삼 일이나 여행을 같이 갔는데, 별일 없을 수가 있나?”
“……아빠, 손주 보는 거 아냐?”
으드드득.
문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에 강진호가 이를 갈았다.
‘조규민.’
상황이 진정되는 대로 재경으로 쳐들어가야겠다고 새삼 다짐하며 강진호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