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352
#351.
몰아치다 (1)
밤이 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달가운 일일지도 모른다. 밤은 휴식의 시간이고, 재충전의 시간이니까. 직장 생활에 시달리고 삶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밤이란 타인에게 침범받지 않는 고마운 시간일지도 몰랐다.
다만, 최연하는 그 밤을 온전히 즐길 수 없었다.
직업상 밤을 휴식이라 느껴본 적이 별로 없는 최연하였다. 촬영이라는 것은 시간이 길어지면 낮밤을 가리지 않기 마련이고, 특히 세트장에서 이루어지는 촬영은 24시간을 우습게 넘기는 일이 다반사였으니까.
스스로를 올빼미족이라 생각하는 최연하이지만, 최근 그녀는 그래도 밤이 자신에게 꽤나 휴식을 주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과거의 그녀는 어둠이 내리는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으니까.
‘약해 빠졌네.’
그녀는 스스로 꽤 강한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녀의 생각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반 하나 없는 연예계에서 그 많던 유혹을 뿌리치고 바닥부터 여기까지 기어 올라온 최연하다.
어떤 이들은 그녀를 독종이라 불렀고, 어떤 이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년이라 매도했다.
그 시기와 질투가 등 뒤에서 끓어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최연하다.
그런 그녀였기에 모두가 그녀가 강하다고 믿었다. 심지어 그녀 자신조차도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런 믿음이 깨어지고 있었다.
트라우마라는 것이 정신력으로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조금 차갑다.
최연하는 병원 옥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었다. 서산으로 지고 있는 노을이 아름답게 붉어지고 있었다.
‘요즘은 좀 이상하네.’
최연하는 가만히 노을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이상한 기분이다.
최근에 그런 일을 겪었기 때문에 하는 생각이 아니었다. 이번 사고를 겪지 않았다고 해도 최연하는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 그녀의 삶은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
더 좋은 배우가 된다.
더 성공한 배우가 되고, 지금 달리고 있는 레일에서 결코 미끄러지지 않는다.
그 목적만을 위해서 달려온 최연하였다.
하지만 최근 그녀의 삶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레일에서 이탈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탈선이다. 과거의 그녀라면 본 궤도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 악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면 뭐 어떤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삶의 방식이라는 것은 반드시 한 가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어버렸다.
더 성공할 수 있다면 좋은 것이지만, 더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금을 버려야 한다. 훗날 그녀가 나이가 들어 그녀의 삶을 돌아보았을 때, 그저 성공한 배우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예전이라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강진호.’
보고 만 것이다, 강진호라는 사람을.
최연하가 보기에 강진호라는 사람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그토록이나 바라던 조건들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공이라는 것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이 보였다.
원하기만 한다면 부도, 명예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강진호는 친구들과 피자집을 하면서 가게를 말아먹고 있었고, 쉬는 날에는 보육원을 찾아서 일을 하고 있었다. 딱히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의 삶의 방식은 그녀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상한 사람이야, 진짜.”
그래서 관심이 갔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그저 강진호의 얼굴이 잘생겨서 적당히 써먹을 수 있겠다 싶었지만, 강진호와 엮이면 엮일수록 얼굴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에 관심이 갔다.
그녀와는 너무 상극인 삶을 살고 있는 이에 대한 호기심이랄까.
그리고 여러 가지 사건을 겪다 보니 한 가지 인상이 강하게 남았다.
강진호라는 남자의 삶이 올바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삶의 방식은 모두가 다른 것이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평할 수 있는 자격이 그녀에게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강진호는 자신의 삶을 충실히 즐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강세아가 들으면 절대 부정하겠지만, 최연하의 눈에는 그랬다. 그는 현재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을 즐기고 지금이 전부인 것처럼 사는 사람이었다.
그게 최연하의 눈에는 무척이나 눈부시게 보였다.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참는 것만이 능사라고 생각하던 그녀의 눈에 전혀 반대의 삶을 사는 사람이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의식하게 되었다.
‘그 결과가 이거고……. 휴.’
최연하는 숨을 쉴 때마다 떠오르는 강진호의 얼굴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공포감이 무뎌질 때마다 그 인간은 사람을 여기에 처박아두고 대체 뭘 하고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무심한 인간.’
할 일이 있어서 하러 간 것은 좋다. 그런데 사람이 혼자 병실에 있다는 것을 알면 틈틈이 톡이라도 해주면 얼마나 좋은가.
“진짜 센스 없다니까.”
강진호라는 인간이 배려심이 없고, 좋은 감정이 있어도 딱히 표현하지 않으며, 자상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쥐꼬리만큼도 없는 인간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일이었다. 사람이 잘못되었다기보다는 조금 예스럽다고나 할까.
‘그래도 하나는 아니지.’
최연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조금 자상하기는 했어.”
토굴 안에 갇혔을 때, 강진호는 평소 그녀가 알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그녀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그녀를 걱정해 주었다.
강진호에게 그런 면이 있을 줄은 최연하도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강진호가 아니었다면 그 시간을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나를 걱정해 주고,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의지처였다.
“미쳤나 봐, 진짜.”
최연하는 자꾸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손으로 잡아 내렸다.
여자가 혼자서 남자를 생각하면서 헤프게 웃는다는 게 자꾸 그녀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남자 친구가 생겼다면서 세상 다 가진 듯 웃는 후배들을 보면서 얼마나 비웃었던가.
그런데 지금 최연하가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 그녀들은 남자 친구가 생기고 나서 그런 반응을 보였는데, 혼자 옥상에서 헛물을 켜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헛웃음부터 나왔다.
‘정신 차려야지.’
하지만 한 번 꽂혀 버린 생각은 쉽사리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쩌면 조금 자상한 타입일지도 몰라.”
어색하고 숫기가 없어서 딱딱한 척하는 고슴도치과일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무뚝뚝한 사람이 보육원에서 아이들과 그리 편히 놀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강진호도 조금 귀여운 면이 있다고 생각하며 최연하가 낮게 웃었다.
* * *
우드드득.
그 소리는 너무도 선명하고, 또한 너무도 섬뜩했다.
노무라 료지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
‘이건 뭔가 잘못됐어.’
이야기는 이미 충분히 들었다.
한국에 출현한 새로운 귀환자가 구미에서 파견된 동료들을 살해했다. 그에 대한 응징과 그동안 미뤄졌던 한국 진출을 위해서 그들은 파견된 것이다.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응징이었다.
대일본제국의 무인들이 수준 떨어지는 한국 놈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는 않지만, 현실은 현실.
때때로 귀환자라는 놈들은 그들이 처해 있는 환경과 상황을 초월하기도 하니까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름 신중을 기했다.
목표가 한국의 수준을 뛰어넘는다 해도 반드시 처리할 수 있는 급으로 인원을 구성해서 들이쳤다.
그리고 지금 그 결과가 그의 눈에 보이고 있었다.
기이한 각도로 목이 꺾여 버린 그의 수하가 혀를 쭉 빼문 채 강진호의 손에 잡혀 있었다.
즉사.
불과 1분 전만 해도 생생하게 살아 있던 육체에서 온기가 급속도로 빠져나간다.
비현실적인 광경이다.
‘새삼스럽게 놀라지 마.’
료지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들 역시 사람을 죽이러 온 것이다. 그것도 지금 그들이 노리고 있는 것은 강진호였다. 계획대로 일이 흘러갔다면 지금쯤 목이 꺾여 있는 것은 강진호일 것이다. 그러니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왜 이리 위화감이 든단 말인가.
털썩.
강진호가 손을 놓자 이제는 시체가 되어버린 부하의 육체가 바닥에 처박혔다.
‘이거였군.’
그제야 료지는 자신이 느낀 묘한 위화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여기 있는 이들 중에서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아마도 대부분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혀본 경험이 있는 이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위화감을 느끼는 것은, 강진호에게는 최소한의 심리적 저항감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살인을 하는 사람은 어떤 감정을 느낄까?
멀리서 총을 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손에 잡힌 사람의 목을 꺾어버리면서 사람은 어떤 감정을 느끼겠느냐, 이 말이다.
보통은 섬뜩함을 느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껄끄러움이라든가 최소한의 저항감은 느껴야 할 것이다.
간혹 살인에 미쳐 버린 놈들은 그 와중에 쾌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진호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자연스러움, 그리고 익숙함.
일체의 감정을 배제한 채 그저 할 일을 하는 것이다. 감정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정육점에서 고기를 써는 사람이 고기를 자르면서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는 사람이 사과를 따는 도중에 감정을 느낄 리가 없다.
강진호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 그러했다.
살인이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사람의 목을 꺾어 방금 전까지 살아 있던 사람을 시체로 만드는, 그 끔찍한 일을 강진호는 마치 공장 노동자가 볼트를 조이듯 해내고 있었다.
‘저놈은 미쳤어.’
강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설사 강진호가 어린아이도 당하지 못하는 약골이라 하더라도 료지는 똑같은 평가를 내렸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있어야 한다. 인간이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을 때, 그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라 불릴 수 없다.
그렇다면…….
그는 강진호를 뭐라 불러야 하는가.
그때, 강진호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이야.”
우두둑.
강진호의 주먹이 쥐어지며 뼈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그 어떤 말보다 더 위협적이고 공포스럽게 들렸다.
“아직, 아직이다.”
강진호의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족히 한 달은 굶어서 굶주림에 보이는 것이 없어진 맹수 같은 그 눈을 보며 료지는 처음으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단 한 번도 그가 맹수의 이빨 앞에 놓인 양 같은 처지에 처할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강진호가 가만히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시작은 너희가 했어? 그렇지?”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야산에서 강진호의 붉어진 눈이 그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럼 끝은 내가 내야겠지.”
강진호가 미소를 지우지 않고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최연하의 생각은 반쯤은 맞았다.
의외로 강진호는 지금 자상함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고통 없는 죽음은 강진호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자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