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359
#358.
시작하다 (3)
이건 대놓고 사람을 멕이는 짓이었다. 보통은 아무리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사람을 앞에 놓고 저리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의도로 부른 것은 아니라고 봐야 했다. 그 사실을 직감하자 절로 눈이 감겼다.
‘끝이군.’
설령 이곳에서 죽어 나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보복이 따를 것이다.
‘내가 뭐라고…….’
상대의 호의에 기대서 기어오르는 짓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이중걸도 회주고, 방진훈도 회주라면, 두 회주에게 동등한 대접을 해야 한다.
방진훈이 좀 더 민주적으로 말을 잘 들어준다면 그것을 감사히 여기고 그에 맞는 대응을 해야 하는 건데, 무작정 달려들어서 물어뜯으려 했다.
그 결과가 이거다.
참담한 심정으로 눈을 감은 이명환의 귓가에 강진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니, 사실이잖아요. 와, 내가 쪽팔려서.”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당사자들 앞에서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되죠.”
“뚫린 입인데 왜 말을 못합니까?”
“예전에야 그래도 되지만, 이제 회주이시잖아요. 그럼 말에 무게감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셔야죠. 그냥 농담처럼 한 말을 다른 사람은 농담으로 듣지 않으니까요.”
“에잉!”
이명환이 슬며시 눈을 떴다.
‘이게 뭔 상황이야?’
강진호가 자신들을 옹호해 주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그들이 공격한 것은 방진훈이라기보다는 강진호다. 기분이 나빠도 방진훈보다는 강진호가 기분이 나빠야 정상이다.
그런데 그 강진호가 지금 자신들을 옹호해 주고 있는 것이다. 얼떨떨한 기분에 이명환이 고개를 들어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 부탁하러 부른 사람들인데, 시작부터 면박을 주면 어떻게 합니까?”
“알아요, 압니다. 내가 속이 터져서 그러는 거 아닙니까.”
방진훈이 혼자 궁시렁대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웃음이 터지고도 남을 상황이지만, 이명환은 반쯤 넋이 나가서 상황을 파악하기에 바빴다.
이게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죄송합니다.”
강진호가 방진훈 대신에 사과를 하자, 이명환이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 아뇨! 아닙니다! 전혀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사과를 하려면 저희가 해야죠. 저희가 입을 함부로 놀렸는데, 당연히 저희가 사과를 드려야죠.”
“……네?”
강진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진짠가?’
연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저 얼굴에 저리 자연스럽게 연기를 할 수 있으면, 무인이고 나발이고 그냥 연예계로 직행하면 된다. 그런데 저 사람이 지금 이곳에 있다는 것이 저게 연기가 아니라는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였다.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이명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이자 공영길도 얼른 일어나 같이 고개를 숙였다.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뇨. 왜 이러시는지…….”
강진호가 난처하다는 얼굴로 일어나 둘을 살짝 밀어 자리에 앉혔다.
“딱히 사과받을 일을 당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저희가 말을…….”
“다 맞는 말만 들은 것 같은데요. 제가 이사 자리를 맡는다는 건 얼토당토않은 일이죠.”
그러자 방진훈이 옆에서 ‘줘도 뭐라고 하네’라고 중얼거렸지만, 강진호는 깔끔하게 방진훈의 말을 무시했다. 저 말을 일일이 대꾸해 주다가는 끝이 없었다.
“갑자기 튀어나와서 이사라고 하면 누구라도 반감이 들 수밖에 없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혹시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제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다고 말 좀 잘해주시기 바랍니다.”
“아…… 예.”
이명환의 등골로 스산한 무언가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정상인이네.’
그것도 멀쩡한 상식인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이명환을 더 공포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 강진호가 무엇을 했는지 몰랐다면, 그들은 지금쯤 강진호의 넓은 마음과 상식적인 대처에 감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들은 게 있었다.
그 행적이 사실이라고 하면, 이놈은 미쳐도 단단히 미친 놈이었다.
“그런데 부탁이라는 게…….”
“아!”
강진호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방진훈이 불만 어린 눈으로 둘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희, 담배 피우냐?”
“예?”
“담배 피우냐고.”
“……피웁니다.”
“그럼 한 대 피우고 시작하자. 속이 답답해서 한 대 피워야겠다.”
“예. 피우십시오.”
“새꺄, 흡연자 앉혀놓고 나만 담배 피우는 게 세상에서 제일 불편한 거야. 얼른 한 대씩 물어.”
“…….”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가, 예의를 지켜야 하는가 고민하는 와중에 강진호가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진 이명환이 담배를 물자, 공영길도 슬그머니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그러자 회주실 안이 순식간에 담배 연기로 가득 찼다.
“아오, 씨. 너구리굴이네.”
방진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창문을 열고 다시 돌아와 앉았다.
“다름이 아니고…….”
“예.”
“아직 공표한 건 아닌데, 아무래도 내일쯤 거사가 벌어질 것 같다.”
“거사요?”
“영남회.”
“아아!”
이명환은 자신도 모르게 반쯤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최근 영남회와 한판 제대로 붙는다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게 이렇게 급격하게 정해질 줄이야.
그동안도 한 번 붙는다고 변죽을 울리다가 제대로 결착을 내지 못하고 흐지부지된 적이 많았기에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는데…….
‘진짜로 할 셈인가?’
영남회와 총회가 전쟁을 벌인다면, 그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두 세력은 그동안 서로를 비난하고 견제해 왔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붙은 적이 없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그 여파가 너무도 크다는 것을 서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방진훈이 지금 전쟁을 입에 담고 있는 것이다.
“저, 정말 합니까?”
“그래.”
“……장난 아닐 텐데요, 그거.”
“그렇겠지.”
방진훈이 심드렁하게 말하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누군 하고 싶어서 하냐. 전쟁이 뭐가 좋다고 그 짓을 하겠어. 그런데 안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지금 일본 놈들이 한국으로 엄청 들어왔어. 이 새끼들, 우리가 서로 분열해 있는 틈을 타서 양쪽 다 집어삼키려고 한다.”
‘사실이었구나.’
일본 놈들이라는 말이 듣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처리반이 한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 일본 놈들이 강진호와 방진훈을 노렸고, 그놈들을 강진호가 피떡으로 만들어 죽인 것이 분명했다.
아마 사실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걸 새삼 검증받고 나자 강진호에 대한 두려움이 한층 더 커졌다.
“그, 그럼 협력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게 되면 지금까지 왜 이러고 있었겠냐.”
“……그건 그렇죠.”
“그러니 그냥 차라리 화끈하게 한판 붙어서 일통해 버리는 게 나아.”
이명환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방진훈을 바라보았다.
그게 쉽게 되는 일이라면 방진훈의 말대로 지금까지 왜 이러고 있었겠는가.
전력으로 따지자면 총회보다 영남회가 한 수 위였다. 그러니 짜증 나고 열 받아도 더러워서 피한다고 피해온 것 아닌가.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 일통이라니.
“쉽지 않을 텐데요.”
“어려울 것도 없어. 시간이 문제지.”
“……예?”
“너희한테 일일이 설명할 일은 아니지만, 여하튼 붙기만 하면 이쪽이 이긴다. 문제는 최대한 피해가 없이 이겨야 한다는 거지.”
이명환은 뭣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도 납득이 가지 않고,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회주였다. 그런 이가 저리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데 그게 뭔 개소리냐고 따져 물을 수는 없었다.
이미 한 번 그랬다가 저승길에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는가.
아니, 아직 나왔다고 확신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자신의 처지를 다시 한 번 실감한 이명환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그럼 저희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아, 그렇지. 어쩌다가 이야기가 여기까지 돌았는지 모르겠네. 네가 해야 할 것은 별거 아냐. 쉽게 말하자면,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네비게이션?”
“……예?”
이명환이 황당한 얼굴로 방진훈을 바라보았다.
“네비게이션이라기보다는 표지판 같은 역할을 좀 해줘야겠다. 그런 거 있잖아, 폴리스 라인이라든가 하는 거.”
“접근 금지요?”
“어, 그거.”
“어디를 막으라는 말입니까?”
방진훈이 턱짓으로 강진호를 가리켰다.
“여기.”
이명환의 시선이 강진호에게 가 닿았다.
“저…… 죄송합니다만, 제가 그리 똑똑한 편이 아니라서 그리 돌려 말씀하시면 알아듣기가 힘듭니다.”
“돌려 말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이 양반 주변에 접근하는 애들 좀 차단하라고.”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괴로워하고 있는 이명환을 보며 방진훈이 피식 웃었다.
“보니까 네가 인지도도 좀 있고, 애들도 너희를 알고 너희도 애들 얼굴은 대충 다 아는 것 같더라고.”
“그렇습니다.”
“막말로 요즘이 뭐 옛날 전쟁 치를 때처럼 나라랑 나라가 붙는 것도 아니고, 유니폼 입고 날뛸 것도 아니잖아. 복장이라 봐야 트레이닝복이거나 양복인데, 그거 입고 아군이랑 적군이 구분이 가겠어?”
“……아!”
그런 식으로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이명환이었다.
그도 무인계를 사는 사람이지만, 스무 명이 넘는 인원으로 싸워본 적은 없었다.
“확실히 그렇겠네요.”
“그러니 괜히 아군, 적군 구분 못해 얽히지 말고, 이쪽이 아군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려줄 이정표 같은 게 필요하다는 말이야. 괜히 애먼 놈이 적이다 싶어서 강진호 씨한테 달려들면 상황이 골치 아파지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 예. 그 정도야…….”
“그리고 강진호 씨 나름도 몇몇은 데리고 움직여야 하는데, 너희가 보고 좀 날랜 애들로 몇몇 뽑으란 말이야. 그리고 강진호 씨 잘 따라다니기만 하면 돼. 이해했지?”
“예.”
이명환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이게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일인가?’
물론 아군과 적군이 구분이 잘 안 되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주변에 호위병을 세워서 아군을 구분하게 해주라는 게 대체 무슨 발상인가.
강진호가 뭔 위험인…….
그때, 이명환의 등골에 짜르르 전기가 쳤다.
‘위험인물인 거야.’
아군에게도, 적군에게도.
괜히 아군이 오인식하고 달려들었을 때, 강진호가 그들을 피떡으로 패 죽여 버릴까 봐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까지 벌이면서 그런 상황을 막으려고 하는 것이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왜 방진훈이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인지 이해가 갔다.
그리고…….
‘그러니까, 나더러 폭발물 처리반을 하라는 거군.’
정확하게는 폭발물 이송반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이명환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이건 용서를 해주는 것이 아니다. 방진훈은 나름 그들에게 벌을 주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웃음기를 띤 채 생글생글 웃고 있는 방진훈의 얼굴이 그걸 반증하고 있었다.
‘아마 전쟁 내내 여기가 가장 위험할 테지. 여러 가지 의미로.’
이건 거절해야 한다.
설사 이 일을 거부해서 그들이 방진훈의 눈 밖에 나는 일이 잇더라도 이건 거절해야 하는 일이다. 가늘고 길게 살고 싶다면 결코 얽혀서는 안 된다.
이명환이 결심을 굳히려는 찰나, 공영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켜만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
명분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 것을 알아차린 이명환이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