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378
#377.
휴식하다 (2)
“왔어요?”
“네.”
강진호는 환한 얼굴로 자신을 맞이하는 최연하를 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의 최연하의 얼굴은 여전히 조금 낯설었다.
다만…….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것 같네요.”
“누구요? 강진호 씨요?”
“아뇨. 최연하 씨가요.”
“왜요? 저는 제 직업이 저와 엄청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강진호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냉장고 옆에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화장 안 한 얼굴이 더 나은 것 같은데, 직업 때문에 화장을 짙게 해야 하잖아요.”
“……아!”
최연하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쪽에 볼 것이 있는 게 아니라 강진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어서였다.
‘저거…… 선수야.’
무심하게 툭툭 던지는 게 보통 솜씨가 아니다. 이미 강은영을 통해서 그동안 사귄 여자가 얼마 없다는 정보를 확보하기는 했지만, 그 사실이 강진호의 순진함을 증명하지는 못했다.
아마도 여자가 없던 이유는 주변의 여자들이 제 풀에 포기를 했거나, 강진호가 워낙 여자에 관심이 없다 보니 대화를 할 여자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런 얼굴(?)로 뻔뻔하게 저런 멘트를 치다니.
최연하는 직업상 외모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 중의 하나이지만, 확실히 저 얼굴은 사기에 가까웠다. 누가 쳐도 닭살 돋고 유치한 멘트였지만, 멘완얼이라고 멘트도 얼굴이 커버하고 있었다.
‘이러니까 내가 무슨 얼빠 같잖아.’
단언하건대, 자신은 강진호의 얼굴만 보고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양심상 얼굴을 아예 안 보고 이런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얼굴만 보고 이러는 건 절대 아니다.
‘왜 이래, 나 최연하야.’
그녀는 톱 배우다. 그러니 당연히 함께 연기하는 배우들도 다들 얼굴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알아주는 이들일 수밖에 없다. 한국을 대표하는 미남 배우들을 작품 들어갈 때마다 접하는 그녀가 얼굴 하나로 넘어갈 리가 없지 않은가.
“무슨 생각 하세요?”
“네?”
“아니, 혼자서 인상 쓰다가 웃었다가…….”
“제, 제가 그랬다구요?”
“예.”
“잘못 보신 거겠죠. 전 그런 적 없어요!”
“……아, 네.”
강진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최연하의 얼굴은 이미 더 빨개질 수 없을 만큼 빨개져 있었다.
‘이거, 병이야.’
그것도 제대로 걸린 것이 틀림없었다.
회사 매니저들이나 그녀와 나름 친하다는 동료들이 지금의 이런 몰골을 보면 기겁을 할 것이 틀림없다.
도도가 컨셉이었는데!
도도가!
평생을 견지해 온 도도함은 어디다 팔아넘기고, 첫사랑에 빠진 사춘기 중학생처럼 부끄부끄하는 꼴이라니.
매니저는 억울함에 눈물을 줄줄 흘릴 것이고, 그녀처럼 한 도도하는 동료들은 비웃거나 정신 차리라고 호통을 치겠지.
“저, 정신이 좀 이상해져서 그래요.”
“네?”
“……아, 이거 아닌가?”
진정하자, 최연하.
지금 상황을 숨기기 위해서 미친년이 될 필요는 없잖아. 일단은 진정하는 게 먼저다. 일단 심호흡을 하고…….
“괜찮아요?”
“꺄아아아악!”
최연하가 베개를 들어 강진호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날아드는 베개를 자연스레 받아 든 강진호가 눈을 찌푸렸다.
“왜 이러는 겁니까?”
“가, 갑자기 얼굴 들이밀지 말라구요. 놀랐잖아요.”
“열이 있나 싶어서.”
“열 없어요! 저 멀쩡해요!”
“네, 뭐…….”
망했다.
저 얼굴은 ‘이 여자가 미쳤나’다. 그게 아니면 ‘맛이 가도 단단히 갔구나’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장르가 로맨스 코미디라면 방금 전 그녀의 행동은 귀엽게 보였겠지만, 안타깝게도 강진호는 로맨스 코미디에 출현하기에는 너무 진지한 배우였다.
‘장르에 안 맞는 개그는 관객의 외면을 부른다고.’
그리고 스토리를 뒤틀어놓지.
최연하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가.
“미안해요. 제가 정신이 좀 없어서.”
“아뇨, 괜찮습니다. 그래서 온 거니까요.”
무뚝뚝하게 말하는 강진호를 보며 최연하가 한숨을 쉬었다.
‘로맨스는 얼어 죽을.’
애초에 팔자가 달달할 팔자가 아니다. 장르 선정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남자 배우 캐스팅이 잘못됐다.
최연하가 빤히 얼굴을 바라보자 강진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뭐라도 묻었나요.”
“……아뇨. 가신 일은 잘되셨어요?”
“네. 뭐, 깔끔하게 처리하고 왔습니다.”
“흐응…….”
최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이제 돌아가 보세요.”
“예? 지금 왔는데요?”
“늦었잖아요.”
“밤이 무섭다고 밤에 오라고 했잖습니까.”
“그렇다고 다 큰 처녀 방에서 밤샐 생각이세요? 여기 간호사들도 있어요. 스캔들이라도 내서 제 밥줄 끊으려구요?”
“그런 의도는 아닙니다만.”
최연하가 가볍게 웃었다.
“그러니까 가보세요. 너무 늦게 집에 들어가면 그것도 문제잖아요. 그리고 여기 면회 시간 끝났어요. 보호자 아니면 같이 못 있어요.”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야.
“그럼 가보겠습니다.”
“네. 내일은 오실 필요 없어요. 모레 퇴원하기로 했으니까요.”
“예, 그럼.”
강진호가 손을 흔들고 문밖으로 나갔다.
최연하는 가만히 강진호를 향해 손을 흔들다가 문이 닫히자 침대로 등을 기대고 누웠다.
‘아무래도 나……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강진호가 왔다고 꺅꺅대며 혼자서 온갖 망상을 하던 게 방금 전인데, 그새 다시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쩌면 강진호는 그냥 위기에 빠진 사람을 내버려 둘 수 없었을 뿐이고, 그 위기에 빠진 사람이 자신인 것뿐일지도 모른다. 강진호의 말대로라면 그가 최연하를 위기에 빠뜨렸다는 죄책감 때문에 이곳에 와 있는 거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우울함이 몰려왔다. 순간적으로 기분이 확 좋아졌다가 다시 기분이 확 나빠졌다가가 반복되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결코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큰일이네.’
최연하가 무릎을 감쌌다.
이런 상태로 다시 연기를 할 수 있을까?
감정을 조절하는 게 가장 중요한 연기를 말이다.
최연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어둠이 마치 그녀를 향해 달려드는 괴물처럼 느껴졌다. 이불을 꽉 움켜잡은 최연하가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정신 차려.’
두려운 건 그녀가 이상하다는 점이 아니었다. 그만한 사건을 겪었는데도 멀쩡하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녀도 이해하고 있었다.
최연하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이 이상한 공포와 제어할 수 없는 감정적 기복이 얼마나 계속될까 하는 점이었다. 이제 곧 퇴원을 하게 될 텐데, 나아졌다는 기미가 없었다.
정말 이러다가 연기를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될까 겁이 났다.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까 봐 겁이 났다.
그리고…….
‘집에 가기 싫어.’
지금 이곳에서도 외롭고 쓸쓸한데, 그 넓은 집에서 다시 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무서운 최연하였다.
밤은 너무도 길고 어둡다.
최연하가 옆에 있는 벨을 눌렀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간호사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환자분, 호출하셨죠?”
“예, 간호사님. 죄송한데 수면제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수면제요?”
간호사가 곤란하다는 듯 운을 뗐다.
“추가 투약은 좀 곤란할 것 같은데요.”
“너무 불안하고, 잠이 안 와요.”
“그럼 조금 기다려 주시겠어요? 담당 선생님께 연락을 드려볼게요.”
“네. 부탁드릴게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밖으로 나가는 간호사를 보며 최연하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찰칵.
강진호는 가만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무심했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하지만 사람이 분노에 빠져 이성을 잃으면 순서를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강진호는 자신이 분노로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복수가 우선이 아니었다.
복수는 그저 감정을 푸는 일에 불과하다. 복수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은 쾌감밖에는 없다. 그러니 그가 가장 먼저 했어야 하는 일은 복수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안전과 안녕을 살피는 일이었다.
천천히 담배 연기를 내뿜은 강진호가 어둠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
내려앉는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이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시작할까?’
야심한 밤이 되자 강진호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입에 문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강진호가 고개를 돌려 높이 솟은 병원 건물을 바라보았다.
“흐음…….”
그의 몸에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의 몸을 감싸며 검게 물들였다. 어둠에 완전히 동화된 강진호가 소리 나지 않게 병원 건물을 향해 접근했다.
‘할 때마다 딱히 유쾌한 기분은 아니란 말이야.’
잠영술(潛影術)이야 기본적으로 익힐 수밖에 없었다. 강호공적이 되어 전 무림에 쫓겨 다닌 강진호다. 아무리 그가 강하다고는 하나 달려드는 이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으니, 필연적으로 몸을 숨기는 법을 익혀야 했다.
세상 모든 것은 배워놓으면 쓸데가 있다더니, 그때 배운 것을 이 세계로 와서 이리 활용하게 될 줄이야.
따지고 보면 당시보다 지금 세상에서 더 유용하게 쓰고 있는 느낌이었다.
물론 밤손님이 된 것 같은 기분은 감내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은밀히 외벽으로 다가간 강진호가 벽호공을 전개해 건물을 타고 올랐다. 매끈한 외벽을 끈끈이라도 바른 것처럼 가볍게 오르는 강진호였다.
‘빨간 쫄쫄이라도 하나 사야 하나.’
순식간에 최상층까지 올라간 강진호가 주변을 살폈다.
‘어디지?’
최연하의 병실로 통하는 창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한참 동안이나 이 창문 저 창문을 기웃거린 강진호가 마침내 최연하의 병실로 통하는 창문을 찾아냈다.
슬쩍 고개를 들이밀어 보니, 조용히 자고 있는 최연하의 모습이 보인다.
‘잠들었군.’
그럼 일이 좀 더 수월해진다.
강진호가 창문 가운데에 있는 잠금장치로 손을 뻗었다.
‘세심하게.’
창문 바깥에 손가락을 댄 강진호가 가만히 진기를 밀어 넣었다. 그가 손가락을 아래로 슬쩍 내리자, 잠금장치가 덜컥, 하며 꺾이며 창문이 열렸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창을 연 강진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좁은데…….’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창이 더 작다. 최상층이라 그런지, 아니면 이 병원이 원래 그런 것인지, 어린아이라 해도 이 창으로는 오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우득, 우드득.
순간, 뼈 으스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강진호의 육체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문어처럼 흐물흐물해진 몸이 되어 창문 안으로 들어간 강진호가 바닥에 내려서서 몸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축골공은 쓰고 나면 기분이 더럽단 말이지.’
몸이 제멋대로 줄어들었다가 다시 늘어나는 기분은 뭐라 말할 수 없는 찝찝함을 안겨주고는 했다.
순식간에 외부에서 최상층의 병실 안까지 잠입에 성공한 강진호가 낮은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최연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뇌에 파고든 탁기를 제거하는 것은 강진호의 특기 중 하나였다. 이 방법으로 최연하가 완전히 좋아질 것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도움은 되겠지.’
다짐을 굳힌 강진호가 가만히 최연하에게도 다가갔다. 막 손을 뻗어 최연하의 수혈을 짚으려는 순간.
“아…….”
잠들어 있다고 생각했던 최연하가 눈을 번쩍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