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38
#37.
도움 받다 (6)
황정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복도를 울렸다.
최명길을 비롯한 이들은 사색이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강진호는 한숨을 쉬었다.
‘이게 무슨…….’
절로 한숨이 나오는 신파극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심각하지만, 당사자인 황정후와 강진호는 어이가 없고 웃음이 터지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황정후는 이사장을 무시하고는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너는 왜 나와 있느냐?”
“집에 가려구요.”
“집에 간다고? 이제 겨우 오전인데?”
“퇴학당했거든요.”
“……퇴학?”
황정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사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시선에 반응한 것은 이사장 최명길이 아니라 교장 선생이었다.
“아, 아직 아닙니다! 아직 결재는 하지 않았고, 어떤 결정이 내려진 것도 아닙니다!”
“퇴학당할 만한 일을 했다면 퇴학을 당해야지. 이 기회에 우리 재단으로 옮기는 것은 어떠냐?”
“교육 재단도 있으세요?”
“원래 대기업은 그런 것 하나씩 끼고 있어야 욕을 덜 먹는다. 가까운 데 우리 학교도 있는데, 어떠냐?”
“전 여기가 좋아요.”
“그래?”
황정후는 교장 선생을 바라보았다.
“우리 손자가 퇴학당하는 이유가 뭔가?”
“그, 그게…….”
황정후는 교장의 반응만으로도 모든 것을 알았다는 듯 이사장을 보며 말했다.
“이런 버러지 같은 놈이.”
“회, 회장님…….”
“더럽게 쌓아 올린 자리면 반성하고 살 것이지, 그 자리를 이용해서 사람을 핍박해? 나는 너 같은 놈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검찰 조사?”
황정후가 조규민을 바라보았다.
“전화해서 취소시켜.”
“예?”
“이런 놈은 검찰 조사까지 갈 필요 없어. 백영기.”
“예, 회장님.”
“삼 일 내로 알거지로 만들어.”
“알겠습니다. 다만, 회장님…….”
“왜?”
“그와는 별개로 검찰 조사는 받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한 짓을 보아하니 형사처벌도 받을 것 같습니다만.”
“형사처벌?”
“예.”
“교도소에 간단 말이야?”
“그렇습니다.”
최명길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쯧쯧쯧.”
황정후는 한심하다는 듯이 백영기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왜 이렇게 사람이 무른가?”
“예?”
“요즘 교도소가 어디 교도소라고 불릴 만한가? 등 따시지, 밥 잘 나오지, 운동도 시켜주지! 돈 있는 놈이 가기에는 험한 곳이지만, 돈 없고 갈 곳 없는 놈이 가기에는 교도소만 한 곳도 없지. 어차피 알거지로 만들 거면서 뭐하러 편히 지낼 곳을 마련해 준단 말인가.”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황정후는 혀를 찼다.
“이런 놈에게 세금으로 밥 주는 교도소는 사치야.”
강진호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며 한숨을 쉬었다.
강진호의 입장에서 최명길은 힘을 가진 권력자였다.
다른 이들의 눈이 없는 곳에서는 강진호가 더 강하겠지만, 현대의 시스템 아래에서는 강진호가 최명길보다 약했다.
강진호의 입장에서 최명길은 손조차 대보지 못할 정도로 까마득한 위에 있는 자였다.
중원에서는 이렇지 않았다.
강진호가 중원에서 가지고 있던 힘은 폭력뿐이지만, 권력의 최정점에 있던 황제도 강진호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중원에서의 폭력은 모든 힘에 우선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런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일국의 군대와 상대할 힘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 힘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말도 안 되는 숫자의 희생자가 쌓일 거라는 점이었다.
그것이 강진호를 옭아맸다.
그런데 황정후는 말 몇 마디로 최명길을 나락까지 떨어뜨렸다.
폭력이 더 큰 폭력 앞에서도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는 반면, 권력은 더 큰 권력 앞에서는 너무도 초라했다.
‘필요한 건가?’
조금 더 쉽게 살기 위해서 권력이라는 것이 분명 필요해 보이기는 했다.
당장 강진호만 하더라도 현재의 열악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황정후를 치료해 주지 않았던가.
고민하던 강진호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재력은 편리를 가져다주지만, 권력은 쾌감을 가져온다. 그에게 편리는 필요했지만, 쾌감은 필요치 않았다.
권력으로 얻는 편리는 다른 이들의 시간이나 상황을 희생시켜서 얻게 되는 것이다. 강진호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저 평온일 뿐.
“회, 회장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윽고 최명길은 황정후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학생들이 보고 있다는 사실이나 체면 같은 것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가 아는 황정후는 한 번 한다고 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루고 마는 인간인 것이다.
“놔.”
당연히 황정후는 매정하게 최명길을 떼어냈다.
“그리고 저 인간의 편을 들어서 헛소리를 늘어놓은 인간들도 교사라는 이름으로 먹고살기는 너무 추악하구나. 사람이면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교사는 그래선 안 되겠지?”
학생주임과 교장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조규민이 둘에게 살짝 눈빛을 주고는 황정후를 향해 읍을 했다.
“조치하겠습니다.”
“음…….”
황정후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강진호를 보며 미소 지었다.
“자리가 시끄럽구나. 차로 가서 이야기를 좀 하지 않으련?”
“그러죠.”
강진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정후를 따라 걸으며 강진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비참하게 바닥에 쓰러져 흐느끼고 있는 최명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서글프군.’
추하기보다는 되레 서글픈 모습이었다. 권력을 쌓아 올리기 위해 온갖 더러운 짓을 저지르던 자가 권력을 잃었으니, 이제 그에게 무엇이 남을 것인가.
“뭐하자는 거죠?”
차에 탄 강진호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정후는 미소를 지었다.
“자네, 낮에 보니 꽤 잘생겼구만.”
“본론만 이야기하지요.”
“유머 감각이 없는 남자는 인기가 없다네.”
강진호가 멍하니 황정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황정후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상황을 조사해 본 김에 곤란해 보여서 점수도 좀 딸 겸 왔네.”
“뒷조사를 했다는 건가요?”
“당연한 것 아닌가?”
황정후가 되레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자네 입장에서 나야 한 달에 한 번 찾아가서 치료나 해주면 그만인 사람이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자네가 유일한 구명줄이네. 혹시나 자네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거나 해서 내가 치료를 못 받게 된다면 난 그날로 죽은 목숨인데, 어떻게 태연하게 자네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라는 겐가?”
“…….”
“나쁜 의도는 아니네. 자네의 생활에 관련된 편의를 봐주고, 보호하려는 의도네.”
“보호?”
“자네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네. 자네는 누구도 믿지 못할 능력을 보여주었고, 보안이 철저한 내 병실을 제집 드나들 듯 들어온 사람이지. 하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아. 자네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세상의 세파에 휩쓸리면 아무것도 해볼 수가 없을 때가 있네. 이미 겪어보았을 텐데?”
강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만 해도 강진호는 속수무책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의 눈이 사라지기를 기다려 이사장 최명길에게 보복을 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미 일이 벌어진 뒤 앙갚음을 하는 것으로는 그가 입은 피해를 되돌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이런 일을 했네.”
“흠…….”
강진호는 차 시트에 기댔다.
마음에 드는 방식은 아니었다.
우선 자신과 상의하지 않았고, 자신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덕분에 최악의 상황을 모면했다는 것은 인정해야 했다.
황정후가 빨리 움직이지 않았다면 상황을 복구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낭비해야 했을 것이다.
“일단 고맙다고 해두죠.”
“자네, 말투가 꽤나 부드러워졌구만.”
지금껏 태연하게 반말을 하던 강진호가 지금은 존대를 해주고 있었다.
“낮이니까요.”
“음?”
기묘한 말이었다.
하지만 황정후는 어쩐지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지금의 강진호는 부드러워졌다기보다는 이전까지의 강진호와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았다.
처음에 보았던, 인간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던 강진호.
그리고 두 번째 보았던, 조금은 빈틈이 보이던 강진호.
그리고 지금의 강진호.
어느 쪽이 진짜 강진호일까?
황정후는 첫 번째라고 생각했다.
그때의 강진호는 꾸며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수많은 사람을 보아온 황정후다.
그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사람도 있었고, 저절로 감탄이 일 만큼 위대한 이도 있었다.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의 강진호처럼 기괴한 느낌을 주는 이는 단언컨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신은 대체 누군가?”
“상황이 나아지니 궁금증이 생기는 모양이군요.”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겠나? 젊디젊은, 그것도 고등학생밖에 되지 않은 사람이 기이한 능력을 갖추고 있고, 과감하게 나를 치료하겠다는 결단까지 내렸는데, 사람이라면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황정후는 가볍게 웃었다.
“내가 종교를 믿었다면 기적을 보았다고 생각했을 거네. 지금쯤 메시아를 만났다고 기도하고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지.”
“종교가 없는 게 다행이군요.”
강진호는 황정후를 보며 말했다.
“궁금한 게 있겠지만, 그냥 모른 척해 주십시오.”
“그래야 하겠나?”
“부탁드리죠.”
황정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에게 과도한 호기심을 가지지 않는 것도 장사치의 덕목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편하게 말을 놓으세요.”
“내가 그래도 되겠나?”
“음…….”
강진호가 가만히 황정후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보이는 겉모습뿐 아니라 이 세계에서의 삶과 중원에서의 삶을 모두 합쳐도 황정후보다는 나이가 적지 않을까?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그럼 알겠네. 이번에는 용건만 전하고 가도록 하지.”
“용건?”
황정후는 품 안에서 통장을 내밀었다.
“약속한 돈일세.”
강진호는 통장을 받아 들었다.
“확인해 보게.”
“맞겠죠.”
“확인할 게 있네.”
황정후가 재촉을 하자 강진호는 통장을 펴 들었다.
“음…….”
통장은 강진호가 아닌 황정후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어디 보자, 영이 하나, 둘, 셋…….’
강진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금액이 잘못되었습니다.”
“돈이 틀리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강진호는 통장을 황정후에게 내밀었다.
“나는 분명 한 장을 달라고 했을 텐데요?”
황정후가 ‘그럼 그렇지’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장을 달라고 해서 한 장을 준비했지만, 너무 액수가 적다는 생각은 그도 하고 있었다.
마냥 순진해서 그런가 싶었는데, 그가 말하는 한 장과 황정후가 알아들은 한 장이 서로 다른 의미였던 모양이다.
“……내가 잘못 알아들은 모양이네. 사과하지. 돈은 빠른 시간 내에 준비하도록 하겠네. 얼마가 필요한가?”
황정후가 내민 통장에는 백억이라는 돈이 들어 있었다.
‘그럼 1조인가?’
준비하지 못할 돈은 아니다. 하지만 그 돈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무척이나 많았다.
하지만 강진호의 답변은 황정후의 예상을 산산이 깨트렸다.
“일억입니다.”
“음?”
황정후가 눈살을 찌푸렸다.
잘못 들은 건가?
“지금…… 일억이라고 했나?”
“예.”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 정말 일억이라고 했다고?”
“뭐가 잘못됐습니까?”
“이 황정후의 목숨 값이 고작 일억이라고?”
“…….”
“그래서 돈이 많다는 건가?”
“……예.”
황정후는 기이한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돈이 적게 들어왔다면 모를까, 더 많이 들어온 경우 굳이 그것을 거절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것도 백억이라는 거금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이 청년은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돈에 초탈한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황정후는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자신에게 내밀어진 통장을 다시 스윽 밀었다.
“가져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