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382
#381.
기획하다 (1)
‘보통은 그런 거지.’
최연하는 매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아니! 좋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진심으로 도움을 구해온다는 것은 기분 나쁠 일이 아니다. 특히나 그 도움을 구하는 이가 쓸데없이 타인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는 이라면 더더욱이나 말이다.
그런 이가 타인에게 도움을 구한다는 것은 신뢰를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충분히 좋아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보통은 그런 거란 말이야.’
도움을 구하는 대상이 젊고 아름다운 여자라면 남자들의 도움이라는 말은 보통 구실일 뿐이다.
도움이라는 말 뒤에는 상대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기 마련이었다. 상대에게 살짝 우월감을 심어주는 동시에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고, 그 과정을 통해 어떻게 한 번 좋은 사이가 되어보겠다는, 빤히 보이는 수작질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마련인데…….
“수작을 부리라고!”
하지만 이 인간은 그런 수작질을 부릴 인간이 아니었다. 정말 담백하고 다른 의도가 없는, 말 그대로의 도움요청이 최연하를 빡치게 만들고 있었다.
“뭔 인간이 이리 순수하냐고!”
물론 흑심을 품고 있는 인간을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동안 선한 얼굴로 흑심을 품고 다가오는 인간은 지긋지긋하게 봤고, 지긋지긋하게 시달렸다.
양심적으로 말해 개중 정말 좋은 의도로 다가온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눈에 차야 말이지.
하지만 지금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이 인간은 여러모로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최연하는 오늘 처음으로 사심이 없다는 것이 사람을 열 받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다 마음에 안 들어!”
태연하게 연락해서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나, 그 말에 제대로 튕겨보지도 못한 채 바로 좋다고 해버린 자신도.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음 날 아침부터 약속을 잡아버린 자신이!
그리고 이른 아침부터 약속을 잡아놓고 약속 시간 한 시간 전부터 나와서 대기하고 있는…….
“내가 문제네.”
최연하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차근차근 생각해 보니, 이건 최연하의 머리에서 나사가 빠졌다. 강진호를 탓할 일이 아니었다.
‘나사 조여야 해.’
최연하는 위기감을 느꼈다.
어차피 그녀가 무슨 짓을 하든 강진호는 신경도 쓰지 않을 확률이 높지만, 사람은 인상이라는 것을 남기게 된다. 그 인상이 모이고 모여서 호감이 되느냐, 비호감이 되느냐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꾸 정신 못 차리고 헛짓만 하다 보면, 강진호에게 허당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그 인간은 똑 부러지는 여자 타입을 좋아할 거야.’
강진호 본인이 살짝 맹한 타입이지 않은가.
필요할 때는 확실하고 빠릿한 타입이지만, 평소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를 만큼 맹한 스타일이다.
그 사실을 알아내는 데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던가.
얼굴이 워낙 쿨한 스타일이라서 성격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연기를 시키고 연기하자고 꼬시다 보니 칼처럼 자르는 모습만 봤지.
평소 모습이 그렇게 어리벙벙하고 맹할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얼굴에 속았어.”
최연하가 나직하게 이를 갈았다.
그런 얼굴로 맹하지 말라고!
씩씩거리던 최연하는 딸랑, 하는 차임벨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강진호를 보니 이상하게 심장이 쿵쾅거리는 느낌이…….
‘그 얼굴, 그렇게 쓰지 말라고!’
아무리 그래도 여자 만나러 오는 자리인데, 목 늘어난 추리닝에 슬리퍼 신고 나오지 말란 말이다! 이 무심한 남자야!
최연하는 빠르게 표정을 정비했다.
아침부터 불뚝대는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것이 없었다.
인상은 화사하게, 그리고 말투는 부드럽게.
“뭐한다고 이렇게 늦었어요? 여자 기다리게 하는 게 매너가 아닌 거 몰라요?”
말을 뱉자마자 최연하의 표정이 암담해졌다.
‘난 죽어야 돼.’
이럴 줄 알았으면 또래 남자에게 부드럽게 말하는 법을 좀 익혀둘걸.
왜 반사적으로 이런 말이 나간다는 말인가!
최연하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쩔 수 없잖아!
살면서 대화를 하는 남자 중에서 그녀가 잘해줘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은 다 연상이었다. 그것도 최소한 스무 살 이상 연상인 사람들이어야 미소를 지을 가치가 있었다.
소속사의 사장이라든가, 새로 들어가는 영화의 감독이라든가, 그게 아니면 피디나 방송국 국장.
그 외의 젊은 남자들이라 봐야 어떻게 그녀를 한 번 꼬셔보겠다 작정하고 느끼한 수작을 펼쳐 오는 젊은 놈팽이 놈들이거나, 어떻게든 그녀를 괴롭히기 위해 작정을 한 매니저 같은 부류들뿐이니 젊은 남자만 보면 말이 곱게 나가지 않는 것이 너무도 당연…….
‘이것도 내 업보네.’
마음을 미리미리 좀 곱게 썼어야 하는 건데…….
이제 와 새삼 후회가 드는 최연하였다.
성격이 지랄 같다는 평을 들었을 때는 ‘굳이 내가 너희에게 좋은 성격을 보여줄 필요가 없어서 그런 거지, 나도 알고 보면 성격 좋은 사람이야’라고 속으로만 생각했는데…….
‘설마 내 성격이 진짜 개차반이었을 줄이야.’
자신 스스로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없다더니, 왜 하필 오늘 그런 것을 실감하게 되는지 새삼 저주스러운 최연하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쪽, 지금 십 분이나 일찍 왔거든요?’
십 분 일찍 왔는데 먼저 나와 있다가 네가 여자를 기다리게 했다는 식으로 폭언을 퍼붓는 여자를 보통 어떻게 생각할까?
‘뭘 어떻게 생각해, 미친년으로 보겠지.’
굳이 일찍 나와서 이미지를 깎아먹고 있는 자신을 보니,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 찻길로 뛰어들어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화 푸세요.”
최연하의 표정이 미묘하다 싶자 강진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최연하가 당황하여 소리쳤다.
“아, 아니요. 화난 거 아니에요.”
이 와중에도 하이 톤으로 쏟아지는 목소리가 서글프다.
이러고도 대한민국의 대표 연기자를 자부하다니.
그동안 나름 연기로는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그 모든 자부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진정하자.’
인정할 것을 인정하면 된다.
저 인간은 나의 평정심을 무너뜨린다. 안 되는 걸 자꾸 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냥 저 인간 앞에서는 내숭을 떨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연스럽게 있는 모습 그대로로 부딪치는 게…….
“있는 그대로가 개차반인데!”
“네?”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했나요?”
“개차반이라고.”
“가, 강진호 씨에게 한 말이 아니에요!”
최연하의 당황이 하늘을 뚫었다.
“제가 개차반이라구요! 제가!”
“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강진호는 아무 말 없이 앞에 놓인 냉수를 최연하 쪽으로 슬쩍 밀었다.
“일단 좀 진정하시죠.”
“……고마워요.”
끝났다.
최연하는 웃어버렸다.
‘망했어.’
이 일을 구실로 어떻게든 관계를 진전시켜 보겠다는 그녀의 계획은 강진호가 와서 앉은 지 1분 만에 산산조각이 났다. 관계 진전은커녕 정신병자로 의심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뭐, 뭐 좀 드셔야죠?”
“괜찮습니다.”
“좀 드세요!”
“……주문하고 올게요.”
“예.”
강진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최연하가 재빨리 거울을 꺼내 얼굴을 보았다.
“……주님.”
홍당무처럼 빨개져 있는 얼굴을 보니, 그냥 죽고 싶었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거리란 말인가! 어제 오늘 한 결심은 다 어디에 갔나!
최연하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나는 모솔이었어.’
연기를 하면서 수많은 연애와 연애 감정을 간접 체험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평론가들이 그녀가 애정이 아니라 생활 연기 쪽에 강점을 가진다고 평한 것은 진중한 연기를 잘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연애 연기를 못한다는 말을 돌려 한 거라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모태솔로가 남자를 꼬시겠다는 마음을 먹었으니 잘 풀릴 리가 없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최연하는 남자를 꼬시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하는지를 전혀 몰랐다.
‘이 정도 생기고, 이 정도로 능력이 있으면 그냥 알아서 꼬셔지겠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안 통하는 저 목석같은 인간에게는 대응책이 없는 것이다.
‘해탈하겠네, 진짜.’
뭔 놈의 깨달음이 이리 많이 찾아오는가. 그녀가 종교인이었다면, 오늘 이 한순간만으로 성인의 반열에 들었을 것이다.
최연하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좋은 인상을 주는 건 글렀다. 오늘은 여기서 더 망가지지 않고 상황을 봉합하는 것에 목표를 두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최연하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니, 이게 뭐라고 내가 전략까지 짜야 하냐고!’
생초짜 신인 시절, 오디션에 붙기 위해서 연습을 하던 때에도 지금처럼 뭔가 계획을 짜고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안면 근육을 움직였던 적이 없는데!
뭔가 억울한 최연하였다.
카운터 앞에서 음료를 기다리던 강진호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고 최연하의 건너편에 와 앉았다.
최연하가 심호흡을 했다.
‘일단 화제를 전환하자. 할 말이 없는데 자꾸 말을 하려다 보니까 실수를 하는 거야. 일상적인 일로. 그러니까…….’
“왜 불렀어요?”
“어제 설명 다 드렸는데요.”
“……그렇죠. 그랬겠죠. 그게 그런 거죠.”
“네?”
여기서 갑자기 내가 울기 시작하면 저 인간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건 그냥 생각이 아니다. 지금 눈가가 시큰해지기 시작했거든.
남자 앞에서 처음 보이는 눈물이 슬퍼서도 아니고, 가슴 아파서도 아니라 억울하고 분해서, 그것도 남자랑 전혀 관련 없이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다가 억울해서 흘린 눈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섬뜩해져 온다.
‘이건 흑역사다. 이불킥 20년감이야.’
여기서 눈물 한 방울이라도 떨궜다가는 그녀의 집에 있는 이불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다리는 이뻐지겠네. 자면서도 운동할 테니까!
“제, 제가 잠이 좀 모자라서 그런지, 지금 정신이 없네요.”
“……그래 보이세요.”
아니라고 해야지, 이 매너라고는 개미 눈물만큼도 없는 인간아!
내가 어쩌다가 이런 인간한테…….
“여하튼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뭐, 스케줄도 없고, 할 일도 없거든요.”
이것도 은근히 말실수 같다는 생각을 하던 최연하가 진지하게 그녀를 응시하는 강진호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뭘 저리 빤히 봐?’
의식을 하기 시작하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는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 예전이었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길 시선도 부담스럽고, 예전이었다면 별것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넘길 말들도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예쁜 모태솔로일지도 모르는 최연하는 자꾸만 그녀를 당황하게 만드는 생소한 감정을 느끼며 패닉에 빠져 있었다.
“말씀드린 것에 대해서는 생각을 좀 해보셨나요?”
“애들을 도와달라고 하신 것 말이죠?”
“예.”
“일단은…….”
최연하가 미간을 살짝 좁히고는 말을 이었다.
“대충 듣기는 했는데, 무슨 상황인지 정확하게 모르겠어요. 좀 더 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그게 말입니다…….”
강진호가 가만히 상황을 늘어놓기 시작하자 최연하가 턱을 괴고는 말을 경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