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384
#383.
기획하다 (3)
“왜 모은 거래?”
“저번에 한 그 조사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닐까?”
“……아, 진짜.”
한진성이 짜증이 잔뜩 담긴 얼굴로 주변에 모여 있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내가 쓸데없는 거 쓰지 말라고 했지?”
한진성의 목소리에 몇몇 아이들의 목이 움츠러들었다.
“유민이 형이 너희 아빠야? 유민이 형도 먹고살기 힘든 와중에 너희 신경 쓴다고 여자 친구 하나 제대로 못 사귀고 있는 거 안 보여?”
그때, 누군가가 번쩍 손을 들었다.
“뭐?”
“여자 친구를 못 사귀는 이유가 꼭 그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정한다.”
한진성이 헛기침을 했다.
“너희도 양심이라는 게 조금이라도 있으면 유민이 형이 다른 걱정은 안 하게 해줘야 할 것 아니야. 솔직히 유민이 형이 우리 보모도 아니고, 매번 우리 일 뒤치다꺼리한다고 저러고 있는 게 불쌍하지도 않냐?”
한진성의 말에 좌중의 분위기가 단번에 축 처졌다.
“저 형 돈 없는 것도 아니고, 할 일 없는 것도 아냐. 나이 저렇게 먹고 보육원에서 먹고 자고 하는 게 갈 데 없어서, 돈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거 너희도 알잖아.”
한진성이 짜증을 부리며 말했다.
“그럼 우리가 알아서 잘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자기 인생 살 수 있게 해줘야지, 그걸 못 참고 꼰지르고 있냐? 어?”
아이들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특히나 맞고 돌아와 이번 일의 시발점이 된 종수의 얼굴은 더 이상 안 좋을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그리고 유민이 형이 이 일을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냐, 이거야. 형한테 말해서 해결될 일이었으면 내가 먼저 가서 말하라고 했을 거다. 그런데 너희도 알잖아. 이게 말한다고 해결되는 일이야?”
“아니…….”
한진성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아이들을 한 번 돌아보고는 말했다.
“이건 그냥 같이 걱정하고, 같이 속 썩자는 것밖에 안 돼. 유민이 형은 이 일 아니더라도 충분히 고생하고, 충분히 속 썩고 있어. 새끼들아, 너희가 뭔데 유민이 형한테 ‘우리 일 같이 걱정해 주고, 해결해 주세요’ 그러냐고. 너희 유민이 형한테 원비 내냐? 생활비 줘?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이제는 아예 당연하게 부려 먹으려 하고 있네. 사람은 염치가 있어야 사람인 거야.”
모두가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한진성의 말은 틀린 게 하나 없었다. 만약 학교에서 당하는 일에 대해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면, 그건 보육원 측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박유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박유민은 이미 그들에게 과할 만큼 노력하고 있었다. 거기에 그 이상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도 염치가 없는 일이었다.
다만…….
결국은 박유민에게 말을 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믿을 사람이 박유민밖에는 없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것 같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눈치가 없다고는 해도 자신들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이와 반쯤은 직업적으로 자신들을 대하는 이들을 구분 못할 이는 없다.
보육원 내에 보육 교사들과 이사장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을 박유민 이상으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미안해, 형.”
하지만 그 믿음이 박유민에게 부담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이다.
한진성이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유민이 형이 보나마나 대책이 어쩌고 할 텐데, 쓸데없이 동조하지 말고 잘 한 번 해보겠다고 해. 그리고 앞으로는 학교에서 있던 일 절대로 여기서 말하지 말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응.”
보육원 안에서는 상급생과 하급생들 사이에 강압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는 일이 많지만, 원장 수녀님이 어린 시절부터 애정으로 보듬어온 아이들은 형제처럼 서로를 믿고 의지하고 있었다.
“말해봐야 소용없으니까 그런 거야. 이게 어른들이 뭐라고 해준다고 해결될 일 아닌 건 너희도 잘 알잖아. 괜히 유민이 형 마음만 아프게 하지 말자고. 유민이 형만 힘드니까. 알았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벌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박유민이 안으로 들어왔다.
“모여 있었네.”
“예, 형.”
박유민을 보고 마음을 다잡던 아이들은 문 뒤로 따라 들어오는 강진호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저 형이 왜 여기서 나와?’
계획이 뒤틀리고 있었다.
박유민은 사람이 좋아서 그들이 똘똘 뭉쳐서 ‘괜찮다, 아니다’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면 결국 한숨을 쉬고 물러나게 될 것이다. 착하고 좋은 형이니까.
하지만 강진호는 조금 달랐다.
‘어떻게 해?’
‘난들 아냐!’
아이들이 박유민을 친형처럼 믿고 따른다면, 강진호는 뭐라고 해야 할까…….
집에 가끔씩 들르는, 엄한 큰형이라고 해야 하나?
박유민에게는 어떻게 거짓말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강진호에게는 거짓말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통하지도 않을 것 같고, 무엇보다 강진호는 살짝 껄끄러운 면이 있었다.
‘껄끄러운 게 아니라 무서운 거겠지.’
강진호가 박유민만큼이나 그들을 위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한낱 강아지도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을 알아보기 마련인데, 사람인 그들이 강진호가 조금 무뚝뚝하다고 해서 그 안에 진심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좋아하고 사람이 좋은 것과 엄하고 무서운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점이다.
강지호가 안으로 들어오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서로 눈치를 교환하고 있지만, 이 상황에 대해서는 딱히 대책이 없지 않은가.
한진성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도 미묘한 기대감이 드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런 말을 한다면 박유민에게 미안하지만, 강진호는 박유민에게 기대할 수 없는 것을 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한진성에게 박유민과 강진호 중 누가 좋으냐고 묻는다면 한진성은 1초의 고민도 없이 박유민을 외칠 것이다. 더 신뢰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도 당연히 박유민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이건 별개의 문제였다.
세상에서 아버지를 가장 믿고 좋아하며 신뢰한다 해서 컴퓨터가 고장 났는데 아버지에게 가져가는 것은…… 아버지를 괴롭히는 일이다.
신뢰의 능력은 별개의 문제니까. 사람은 제각각 능력 있는 분야가 다른 것이다.
“그래서…….”
강진호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들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강진호가 가만히 아이들을 돌아보며 눈을 맞췄다. 강진호의 시선을 받은 아이들이 움찔했다.
“들을 필요도 없는 것 같고.”
강진호는 굳이 이들의 입에서 뭔가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사정은 박유민에게 충분할 만큼 들었고, 이제 와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게다가 바른말이 나올 것 같지도 않고.
“그냥 인원 파악만 해보자. 조금이라도 좋다. 조금이라도 아이들에게 부당하다 싶은 대접을 받고 있는 사람만 손들어봐.”
한진성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형은 진짜 사람 다룰 줄은 모른다니까.’
저리 말하면 누가 이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든다는 말인가. 한 사람, 한 사람 데리고 가 물어봐도 말이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는 판…….
‘저 새끼…… 왜 손 들어?’
한진성의 생각이 무색하게도 강진호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왔다.
“헐.”
한진성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들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슬쩍슬쩍 돌렸지만, 쫙 펴 든 손을 내리지는 않았다.
‘이것이 카리스마인가.’
구구절절한 말 없이 그냥 물어보는 것만으로 인원 파악을 끝낸 강진호가 입을 열었다.
“손을 들지 않은 애들은 문제가 없다는 거지?”
“예.”
“나는 너희 상황을 바꿔주려고 한다. 그런데 괜히 여기서 민망하다고 생각하고 손을 들지 않으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여기저기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라시는 거야?”
“쪽팔려 하지 말고 솔직하게 손 들래.”
그 대답이 나오자마자 손이 몇 개 더 올라왔다.
‘하, 이 새끼들 진짜…….’
한진성이 짜증이 잔뜩 어린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래서 이놈들은…….
그러면서 한진성도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렸다.
순간적으로 아이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우르르 몰렸지만, 한진성은 ‘왜? 뭐?’를 반복하며 아이들의 비난의 눈길을 필사적으로 물리쳤다.
“제일 연장자가 누구지?”
“저, 전데요?”
“고3?”
“아뇨. 형들은 공부하느라 바빠서요. 고3 형들은 입시 때문에 그런 문제가 없는 것 같아요.”
“그래?”
강진호가 턱을 긁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라고 해서 왕따를 시키던 애들이 변할 것 같지는 않았다. 본인들이 그렇다고 하니 따로 시간을 내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알았어. 손 내려.”
아이들이 손을 내리자 강진호가 의자를 빼 자리에 앉았다.
“이 말 하나는 꼭 해주고 싶은데…….”
강진호가 주변의 아이들을 쭈욱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너희는 잘못이 없다.”
아이들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내가 당한다고 해서 잘못이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어. 이게 당연히 감내해야 할 일이라고도 생각할 필요 없다. 너희는 잘못이 없어. 잘못이 있다면 그놈들이 잘못된 거겠지.”
“……예.”
“빤한 소리라는 거 알아. 도움이 안 되는 소리라는 것도.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지금부터 너희가 해야 할 일들이 너희가 잘못했기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짚어두고 싶어서다. 솔직한 본심을 말하자면…….”
강진호가 살짝 고민하는 듯한 얼굴로 머뭇거리더니,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때로는 약한 것도 죄가 된다.”
“…….”
“잘못이라고는 하지 않아. 하지만 내가 잘못이 없다는 사실이 내가 보는 피해를 보상해 주지는 않지. 저놈들이 나쁘다는 것이 너희를 위로해 주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야.”
강진호의 말에 몇몇이 고개를 푹 숙였다.
“웃기는 말이기는 하지만, 세상이 원래 그렇다. 너희가 힘이 없어서 겪는 일은 아무것도 아닌 걸로 치부될 만큼 더럽고 서글픈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게 세상이야. 아무도 너희에게 그런 말을 해주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내가 말해주지. 세상은 원래 그래. 힘이 없으면 서럽고, 가슴 아프고, 힘든 곳이 세상이다.”
강진호가 한숨을 쉬었다.
아이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해야 한다는 게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러니 결론은 하나밖에 없어. 서럽지 않고, 억울하지 않고, 분하지 않으려면, 너희가 강해지는 수밖에 없어. 누구도 너희를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강해지는 수밖에. 내가 이런 결론밖에 내줄 수 없는 한심한 놈이라 미안하다만…… 나는 교육학자도 아니고, 이런 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모른다. 나는 그냥 깔끔하게 해결할 방법을 찾는 것뿐이다.”
한진성이 손을 들었다.
“말해.”
“형, 죄송한데요, 그 깔끔하게 해결할 방법이 뭔가요?”
강진호가 좋은 질문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남자들은 제일 쉬운 방법이 있다.”
“그게 뭔데요?”
강진호가 종수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번에 너 때린 애들이 몇 명이라 그랬지?”
“다, 다섯 명이요.”
“음, 그게 문제였던 거지.”
한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이 집단으로 나오면, 이쪽에서는 방법이…….
“다섯 명이 덤비면, 다섯 명을 다 패버리면 돼. 지니까 문제인 거야.”
순간, 한진성의 어이가 하늘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