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39
#38.
도움 받다 (7)
강진호는 황정후가 내민 통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가?
“아뇨, 제가 원한 건 많지 않은 금액입니다. 조금 편히 살 수 있는 돈이면 충분합니다.”
황정후가 강진호의 말을 듣고는 혀를 찼다.
“자네, 물가 감각이 없군. 서울에서 일억이면 집도 못 사네.”
“그렇습니까?”
“집만 못 살까. 그 돈이면 전세금도 안 되네. 겨우 일억으로 편히 살겠다는 건 꿈같은 이야기지.”
“…….”
강진호는 할 말을 잃었다.
일억이라는 돈은 강진호의 개념에서는 무척이나 큰돈이었다. 그런데 그 일억으로 전세도 못 들어간다니. 그럼 대체 얼마나 되는 돈이 있어야 편히 살 수 있다는 말인가.
황정후의 말을 듣다 보니 돈이 돈 같지가 않았다.
“보아하니 자네 집에는 동생도 있던데, 그럼 방이 세 개는 되어야 한다는 말 아닌가. 편히 살 수 있을 정도의 제대로 된 건물에 방 세 칸짜리 집이면 일억으로는 현관이나 살 수 있을까…….”
강진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요구한 일억이라는 돈이 목적을 이룰 수 없는 금액이라는 것을 이해한 것이다.
‘안일했다.’
이렇게 일억을 받아 챙기고 끝이 났다면 또 돈이 필요하게 되었을 것이다.
좀 더 계획적으로 조사를 해보고 움직였어야 하는 건데…….
“자네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고 좀 더 편히 살아보겠다고 돈을 받으려 한 것 아닌가?”
강진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억으로는 그분들이 편해질 수가 없네. 놀고먹는다면 일 년이면 날아가 버리는 돈에 불과해. 그 돈을 받는다고 자네 부모님들이 일을 덜 하실 것 같은가? 자네 학비만 따져도 그 정도 돈이야 금방 날아가네.”
강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정후의 말대로라면 확실히 돈을 좀 더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 이건 받아두게.”
“그래도 많습니다.”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걸세.”
“음…….”
“물론 일정 이상의 돈이 모이게 되면 더 많은 돈이 있는 것과 별 차이가 없어지지만, 백억으로는 그 정도 돈이 된다고도 할 수 없네. 그러니 일단 이 돈은 받게나. 생활이 편해야 날 치료하는 것에 전념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자네를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일세.”
“으음…….”
강진호가 고민하는 듯하자 황정후가 가볍게 웃었다.
“돈이 있어보면 생각이 달라지네. 그러니 일단은 받는 게 어떤가?”
결국 강진호는 웃고 말았다.
황정후는 강진호가 지금까지 가난한 삶을 살았다고 믿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그 말은 사실이다. 하지만 강진호는 이미 부의 극을 경험해 보았다.
오히려 지금 황정후가 가진 부는 우습게 여겨질 정도의 재화를 손에 넣고 휘두르던 시절도 있었다.
중원에서 말이다.
중원에서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지금에 비해 많지 않다. 하지만 과거 중원의 거부들은 지금의 부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았다고 봐야 한다.
지금은 아무리 좋은 차를 타고 다닌다고 해도 더 좋은 것뿐이다. 서민이라도 차 한 대쯤은 다들 굴리니까.
하지만 당시의 일반인들은 모두 걸어 다녔다. 그중 돈이 있는 자만이 말을 탈 수 있었고, 진정한 거부들은 명마들이 끄는 마차를 탔다.
발이 닳도록 걷고 또 걸어야 이동할 수 있는 이들에 비해 편히 침상에 누워서 마차를 타고 다니는 거부들의 삶의 질은 지금의 부자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절대적으로라면 지금의 중산층에 비해 그리 낫다고 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해야겠지만, 상대적으로 따지자면 당시의 거부들은 평민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삶을 살았다.
아무리 돈이 있어봐야 조금의 편의를 더 누리는 지금의 부자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말이다.
이미 그러한 극한의 부를 경험해 본 강진호였다.
황정후가 아무리 돈이 많다고는 하나 중원의 반 이상을 지배하다시피 한 마교의 부와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강진호는 부에 집착하지 않았다.
돈이란 일정 이상이 넘어가면 되레 거추장스러운 것이 된다는 게 강진호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일리는 있군.’
자신 혼자라면 모를까, 가족들을 위해서는 충분한 돈이 필요하다.
강진호의 행복과 가족들의 행복이 같을 수는 없으니까, 둘을 모두 고려한다면 돈은 많을수록 좋았다.
“알겠습니다.”
이윽고 강진호는 황정후가 내미는 통장을 받았다.
“그런데 명의는?”
“음, 그게 좀 문제인 게…….”
황정후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백억이라는 돈을 이유 없이 타 계좌로 옮기기는 쉽지 않네.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게 지속적으로 이어진다면 문제가 되기 마련이지. 나는 몰라도 자네는 분명 문제가 생길 걸세.”
“제가 말입니까?”
“황정후의 숨겨둔 자식? 아니, 손자쯤일까? 그렇게 소문이 나는 것도 금방이지. 그래서야 좋을 게 있겠는가?”
“이미 학교에서 그리 말을 했잖습니까.”
“그것과는 또 다르지. 손자 하나를 찾아가는 것은 별일도 아닐세. 하지만 지속적으로 황정후가 그 손자에게 돈을 보내고 있다고 하면 일이 커지지. 다른 때라면 그런가 보다 할 테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거든. 지금 재경에는 후계가 없네.”
만약 황정후의 자식들이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라면 갑자기 등장한 손자가 그리 화제가 될 것은 없다. 숨겨둔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루머야 돌겠지만, 그 정도야 감안할 수 없다.
하지만 후계 구도가 무너진 상황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숨겨둔 혈연은 가십거리가 되기 딱 좋았다.
황정후에게야 큰 변화가 없겠지만, 강진호는 수많은 관심을 끌게 될 것이다.
그건 좋지 않았다. 황정후에게도, 강진호에게도.
“예.”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해 보았지만, 당분간은 이게 가장 좋겠더군. 그냥 내 통장을 쓰게. 증여세 탈세의 문제가 있긴 하겠지만, 그건 내가 알아서 해결을 해보지. 나도 불법은 좋아하지 않는 주의라.”
“그런데…….”
“말하게.”
“돈은 어떻게 찾죠? 제 명의가 아니니 돈을 찾을 수 없는 것 아닌가요?”
황정후는 웃고 말았다.
이런 것까지 설명을 해주어야 하는 것인가?
“카드가 있지 않은가.”
“긁으라구요?”
“웬만한 건 그걸로 다 될 걸세. 인출기에서 뽑아 써도 괜찮고. 현금이 크게 필요한 일이 있다면 은행을 찾게. 가까운 지점에 이야기를 해뒀으니 별문제 없을 거네.”
“예.”
강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그럼 이번 달은 이걸로 된 것으로 알겠네. 다음 달에 치료가 끝나면 새로 입금하지.”
강진호가 눈을 크게 뜨고 황정후를 바라보았다.
“백억을 또요?”
“그러기로 한 것 아니었나?”
강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이걸로 됐어요.”
“부족할 걸세. 돈은 쓰면 쓸수록 부족하지.”
“그럼 그때 이야기하죠.”
“나를 통장으로 쓰겠다는 건가?”
“지금도 그러고 있죠.”
황정후는 껄껄 웃었다.
“과연 맞는 말이군.”
“대신 부탁할 게 있습니다.”
황정후가 눈을 빛냈다. 이런 식의 부탁이 쌓일수록 황정후와 강진호의 사이는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다.
물론 황정후의 입장에서 말이다.
“뭔가?”
“성심 보육원이라는 곳이 있어요.”
“자네 친구가 있는 곳 말인가?”
“자세히도 조사했군요.”
강진호의 말에 황정후는 미소를 지었다.
“유능한 놈이 있더군.”
“여하튼 거기가 지금 자금 압박에 시달리고 있어요. 딱히 빚이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니, 건물을 알아봐 주세요. 이전해야겠어요. 사람 살 곳이 아니에요.”
황정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의외의 일면이었다. 이 사람에게 이런 면도 있었다는 것이 이상했다. 타인에게 딱히 관심을 두지 않는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건물 말인가?”
“예.”
“그냥 새로 지으면 안 되겠나?”
“그래도 되죠.”
“그게 깔끔하고 더 처리하기 편하네.”
강진호는 부자의 깔끔한 마인드에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이건 조금 복잡한데…….”
“음?”
황정후는 조금 긴장한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재경 그룹에서 자전거도 파나요?”
“……응?”
황정후는 황당하다는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자전거?”
갑자기 웬 자전거가 튀어 나오는가?
“예.”
“아니, 우린 딱히 자전거는 취급하지 않는데.”
“그래요?”
“왜 그러나?”
“튼튼한 자전거가 필요해요.”
황정후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강진호를 나무랬다.
“그래서 내가 백억을 주었지 않나. 이탈리아 쪽에 명품 브랜드가 많으니, 최고 사양으로 구입하게.”
강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제 말을 잘못 알아들으셨네요.”
“…….”
“좋은 자전거가 아니라 튼튼한 자전거가 필요해요. 트럭에 부딪쳐도 구부러지지 않고 아무리 강하게 발을 굴러도 페달이 부서지지 않는, 강한 자전거가 필요하다니까요.”
“트럭에 부딪쳐도? 그게 대체 왜 필요한가?”
강진호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자전거가 자꾸 부서져서요.”
“부서진다고?”
“그냥 페달 밟고 타는데, 페달이 자꾸 부러지고, 크랭크가 부러지고…….”
황정후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이건 대체 무슨 말인가.
뜬금없이 말이 나온 것도 이상한데, 하는 말이 대체 무슨 소리인지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걸 뭐, 어떻게 해석해야 한다는 말인가.
황정후는 황당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아는 사람이 있을 걸세.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자전거로 주문 제작해 보지.”
“부탁드려요.”
“그럼 다 끝났는가?”
“예.”
“그럼 가세.”
“어딜요?”
“쯧쯧,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황정후는 미소를 지으며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자네 집으로 가야 할 것 아닌가.”
강진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가족은 엮지 마세요.”
황정후는 딱하다는 듯 강진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 생각해 보게.”
“뭘 말인가요?”
“그 돈, 어떻게 설명할 건가?”
강진호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듣고 보니 이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부모님께 드릴 수가 없다. 대체 이 돈이 어디서 났다고 설명하고 드려야 한단 말인가.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할 텐가?”
“…….”
“아니면 로또라도 맞았다고 할 셈인가? 백억짜리 로또가 몇 번이나 있었더라?”
강진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설명하는 게 낫겠지.”
“그렇겠네요.”
강진호는 황정후의 노련함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어버렸다.
분명 그가 황정후의 약점을 쥔 입장이었는데, 되레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하나부터 끝까지 강진호는 황정후에게 끌려가기만 했다.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옛 기억이 나 아련하기까지 했다.
그 사람도 이랬다. 언제나 자신을 어린아이로 만들어 버렸지.
“그럼 출발할까?”
“다음에 가죠.”
“음?”
“아직 수업이 덜 끝났거든요.”
“…….”
“퇴학이라도 당했다면 모를까, 아직 학생인데 수업을 빼먹고 집에 갈 수는 없죠.”
“그런가?”
“예.”
“그래, 그럼 들어가 보게. 수업은 받아야지.”
“그럼…….”
강진호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 강진호를 지켜보는 황정후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참 신기한 사람이군.”
때로는 굉장히 노회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굉장히 어리숙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간간이 번뜩이는 안광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황정후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만큼 날카로웠다.
“심심하지는 않겠어.”
할 일과 유희거리가 동시에 생겼다.
황정후는 새로 얻은 삶이 더없이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