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397
#396.
올라타다 (1)
“아, 짜증.”
“왜?”
“몰라. 아침부터 기분 별로야.”
민아란은 오늘은 특히 말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이유가 명백한 일도 있지만, 이유 없이 터지는 일도 꽤나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이유 없이 터지는 일이 더 심각할 때가 많았다.
예를 들면 지금 이미영의 기분 같은 것 말이다.
‘애들 잡겠네.’
소나기가 내리면 우산을 준비하지 않은 자신을 탓해야지,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를 탓해서는 안 된다. 소나기는 갑자기 내리니까 소나기인 것 아니겠는가.
이미영이 딱 그런 존재였다.
난데없이 기분이 나빴다가 난데없이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사람.
물론 여자 고등학생은 변덕의 대명사인 만큼 모두가 그런 성향이 아주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얘는 특별하지.’
그것도 아주 특별하다.
용모 단정, 학업 성취 우수, 운동 만능.
길게 휘날리는 생머리는 청순의 대명사라 할 만하고, 한 번씩 지어주는 부드러운 미소는 같은 여자임에도 시원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사람들이 말하는 여고생이라는 이미지를 빚은 듯이 구현해 낸 존재라고 할까?
딱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성격이지.’
겉으로는 청순함의 대명사처럼 생겼지만, 이미영의 속은 청순이라기보다는 악랄에 가까웠다.
말 그대로 여왕벌.
자신이 가진 우월한 점을 이용하여 확고한 지위를 확보하고, 그 지위를 바탕으로 다른 이들을 능수능란하게 조종한다는 면에서 그녀는 여왕벌이라는 이름에 딱 걸맞은 여자였다.
그리고 이 여왕벌은 꽤나 폭군이었다.
“오늘 하나만 걸리라고 해.”
민아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물론 이미영의 눈에 뜨이지 않게 말이다. 그녀의 눈에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그 ‘하나’가 그녀 자신이 될 수도 있으니까.
‘오늘 또 애 하나 잡겠네.’
기분이 나쁜 이유를 찾아서 무엇하겠는가, 중요한 것은 이미영이 기분이 나쁜 날에는 꼭 좋지 않은 꼴을 당하는 애가 하나쯤은 생겨난다는 것이었다.
물론 당하는 아이가 딱히 뭘 잘못한 것은 아니다. 벼락을 맞는 이가 잘못을 하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냥 그 시간에 거기에 있었다는 것이 때로는 잘못이 될 때도 있다.
본인이야 억울하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때로는 당하는 아이들이 불쌍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런 티도 내서는 안 된다. 언제 그 타깃이 이쪽으로 돌아올지 모르니까. 그러니 재미있다는 듯이 웃어야 한다.
아무리 그 행태가 지긋지긋하다 해도 말이다.
“아, 짜증나는데 윤혜미나 가지고 놀아야겠다.”
‘역시.’
벼락은 사람을 가리지 않지만, 이미영은 사람을 가렸다.
그녀가 가장 선호하는 허수아비는 윤혜미였다.
보육원 출신의 만만순이.
열 받아 학교로 뛰쳐 올 부모도 없고, 그렇다고 딱히 다른 아이들이 가여워할 매력도 없는, 그런 아이.
윤혜미가 이미영의 장난감이 된 이유는 그게 전부였다. 딱히 그녀가 뭔가를 잘못했다든가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만만하니까. 건드려도 돌아올 뭔가가 없으니까.
리스크라는 게 없으면 사람은 편안해진다.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는 일에 편안함을 논하는 게 웃기는 일이기는 하지만, 사실이 그런 것을 뭘 어쩌겠는가.
그럼 적어도 앙칼진 모습이라도 보여줘야 할 텐데, 윤혜미는 착해도 너무 착했다. 바보스러워 보일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착하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시대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은 착한 애들은 호구 잡히는 세상이다.
‘불쌍하게도.’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이 가장 가여운 점은 그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이다. 그저 괴롭히는 아이들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적당히 이용될 뿐이었다.
“무슨 생각 하는데?”
“아, 아니.”
“흐응?”
이미영의 시선이 그녀를 훑자 민아란은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아니, 우리 미영이가 왜 또 화가 났을까 하고.”
“뭐래?”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이미영을 보며 민아란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오늘 자신은 타깃이 아닐 것이다.
“아, 짜증, 짜증!”
오늘은 정말 이미영의 패악이 장난이 아니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부아아아아아앙!
‘뭐지?’
그건 마치 불법 개조를 한 바이크가 내뿜는 배기음 같았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어보니 확실히 달랐다. 바이크가 내뿜는 날카로운 소음과는 다르게 묵직한 저음의 엔진 소리가 강렬하게 울리고 있었다.
“헐?”
고개를 돌린 이미영과 민아란이 아침 햇살을 받아 강렬한 빨간색으로 빛나는 스포츠카를 발견하고는 눈을 치켜떴다.
“뭐야. 저거?”
“돈 많은 놈이 아침부터 쇼하는 모양이지.”
민아란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한 번씩 있다. 괜히 여고 앞으로 저런 차를 몰고 다니면서 쏟아지는 시선을 즐기려는 찌질이가.
짜증나는 것은 그런 의도를 빤히 알면서도 눈길이 자꾸 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부우우우우우웅.
엔진음이 잦아들고 스포츠카가 천천히 그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으응?’
이상한 일이었다.
우월감을 느끼려는 의도였다면 여기에 서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이곳에 용건이 있어서 왔다는 건데. 애들이 등교하는 시간에 여기에 스포츠카를 몰고 찾아올 이유가 대체 뭐가 있다는 말인가.
정문 앞에 커다란 스포츠카가 멈춰 서자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스포츠카로 모였다.
그러고는 운전석의 문이 위로 열리더니,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와…….”
민아란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가리고 감탄성을 냈다.
차에서 내린 남자는 사람의 시선을 한눈에 잡아끌 만큼 준수했다.
과히 힘을 주지 않고 가볍게 청바지에 하얀 반팔 셔츠를 입고 있을 뿐이지만, 그게 오히려 매력을 가중시키는 느낌이다. 저런 차에서 완벽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내린다면 언뜻 거부감을 줄 수도 있을 테니까.
신경 쓰지 않은 듯 무심한 차림이지만…… 적당한 키와 적당한 몸, 셔츠에서 빠져나온 팔에서 엿보이는 자잘한 근육이 되레 시선을 확 잡아끈다고 해야 하나?
비율이 좋다는 걸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얼굴이 빠지는 것도 아니었다.
시원하게 뻗었다는 말이 어울리는 얼굴은 ‘굳이 저 사람에게 저런 몸이 필요할까’라는 생각을 절로 들게 만들었다. 저 얼굴이면 여리여리하게 뻗은 몸이라도 어울릴 것이다. 물론 지금의 모습이 몇 배는 더 잘 어울리겠지만.
요즘 인기 있는 아이돌들처럼 날카로운 인상은 아니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취향이 의미가 없네.’
민아란 역시 조금은 날씬한 타입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지만, 지금 저 남자에게는 그런 것의 의미가 없었다. 그냥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데, 취향 따위가 다 뭐란 말인가.
민아란이 이미영의 팔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대박! 대박!”
“…….”
“미영아, 저 팔 보여? 팔?”
“…….”
“미영아?”
“응? 으응.”
조금은 더딘 듯한 반응에 민아란이 고개를 돌려 이미영을 바라보았다.
‘갔네.’
이미영의 눈이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아무래도 저 남자는 민아란보다 이미영에게 조금 더 직격탄인 모양이었다. 민아란이 영화배우를 눈앞에서 본 듯한 반응이라면, 이미영은 무슨 백마 탄 왕자님이라도 나타난 듯 환상 속을 헤매고 있는 듯했다.
그때, 남자가 손으로 얼굴을 한 번 가볍게 훑고는 보조석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보조석으로 일제히 집중되었다.
‘누가 탔어.’
저런 남자가 모는 차에 탄 다른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마치 보조석 앞으로 스포트라이트가 확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보조석은 열릴 기색이 없었다.
남자가 빤히 바라보다가 머리를 벅벅 긁고는 보조석으로 직접 다가가 문을 열었다.
“뭐해?”
“창피하단 말이에요.”
“창피하긴.”
민아란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지?’
들은 적 있는 것 같은 목소린데? 우리 반 앤가?
남자가 보조석 안으로 손을 뻗더니, 안에 타고 있는 이를 끌어내렸다. 이내 교복을 입은 아이가 밖으로 나오더니 몸을 배배 꼬았다.
좋은 의미로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창피해 죽겠다는 모습이었다.
“어어…… 어?”
민아란의 입이 헤~ 벌어졌다.
‘윤혜미?’
쟤가 왜 저기서 내리지? 윤혜미가 왜?
그녀가 아는 윤혜미는 보육원 출신의 가난뱅이다. 그런데 그런 애가 왜 갑자기 저 차에서 내린단 말인가.
‘무슨 소설의 한 장면 같네.’
무슨 삼류 동화책 속의 이야기도 아니고, 그동안 거지라 여긴 애가 알고 보니 엄청난 부자의 상속자였다…… 뭐, 그런 이야기?
자신이 생각해 놓고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 이야기가 실제로 벌어지지 않으니 현실인 것이다.
민아란이 고개를 슬쩍 돌려서 이미영을 바라보았다.
‘……난리 났네.’
이미영의 눈에 불꽃이 튀고 있었다.
그동안 열 받은 이미영을 한두 번 본 게 아니건만, 이건 정말 뭐라고 해야 할까…… 그 급이 다르다는 느낌?
그동안은 그저 화가 난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부모의 원수라도 본 듯이 이글대고 있었다.
하기야 왜 안 그렇겠는가.
그녀가 가장 만만하게 보던 윤혜미가 무슨 공주님처럼 등장하고 있는데.
그리고 그 광경을 다른 아이들이 다 보고 있다.
분명 이 광경은 자습 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전 학교에 다 퍼질 것이다.
“잘 다녀오고.”
“……자꾸 그렇지 마세요. 저 진짜 쪽팔려서 죽을 것 같단 말이에요.”
“저녁에 같이 밥 먹기로 했으니까. 다른 데 새지 말고 바로 와.”
“제가 새기는 어디로 새요.”
“그래.”
남자가 피식 웃더니 윤혜미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아! 하지 말라구요!”
윤혜미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소리를 빽! 지르자, 남자가 부드럽게 웃더니 정문 쪽을 가리켰다.
“가야지?”
“가, 갈 거예요!”
윤혜미가 가방을 꽉 움켜쥐고는 정말 말 그대로 전속력으로 교문 안으로 튀어 들어갔다. 남자는 가만히 차 앞에 서서 윤혜미가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남자와 눈이 마주친 이들이 하나같이 얼굴을 살짝 붉히고는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남자는 가볍게 웃어 보이고는 차에 올랐다.
부우우우우웅!
시동이 걸리는 것을 요란히 알리는 엔진음과 함께 붉은 스포츠카가 아주 천천히 교문을 떠나기 시작했다.
민아란은 살짝 허탈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뭔 꿈이라도 꾼 것 같네.’
뭔가 비현실적인 광경을 본 듯한 느낌이었다. 아침부터 교문에 나타난 스포츠카도, 거기서 내린 남자도, 그리고 그 옆에 윤혜미가 타고 있었다는 것까지……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뭐였지?”
동의를 구하기 위해 이미영을 바라본 민아란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고 말았다.
이미영의 얼굴이 마치 얼음이라도 한 겹 씌운 듯이 냉랭하고 차갑다.
“아란아.”
“응, 미영아.”
“들어가는 대로 윤혜미 나한테 오라고 그래.”
“혜미?”
“그래, 윤혜미. 윤혜미가 또 있어?”
“아, 아니, 알았어. 내가 꼭 데리고 올게.”
이미영은 그 말을 남기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교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민아란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그런 이미영을 따라갔다.
‘대체 뭘 하려고…….’
불길함이 그녀의 가슴을 울렁이게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