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400
#399.
올라타다 (4)
문을 닫고 살짝 문 쪽으로 귀를 기울인 조규민은 다급한 이사장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몸이 달아야지.’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황정후가 그를 자신의 파트너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것은 원래 그렇다.
결코 내게는 돌아오지 않을 운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의 확률을 무시하지 못한다. 되레 그 확률에 모험을 거는 것이 객관적으로는 손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사람이 왜 로또를 사는데.’
붙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게 비록 팔백만분의 일의 확률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로또의 확률을 높이는 법은 로또 여러 장을 사는 것이다. 그럼 황정후라는 로또에 당첨되기 위해서 이사장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고치는 거지.’
학교에 생겨난 문제를 말이다.
조규민은 낄낄 웃으면서 건물 밖으로 향했다. 저 멀리 복도에서 헐레벌떡 뛰어서 이사장실로 향하는 사내들을 보며 조규민이 마음속으로 빌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비록 그들이 지금껏 학교 내에 벌어지고 있던 왕따를 방치해 온, 무능한 존재들이라고 하더라도 이제는 그들을 돕기 위해 필사적이 될 것이다.
“다음 학교로 가볼까?”
조규민은 현관으로 나가서 하늘 높이 떠 있는 해를 바라보았다.
“너무 늦기 전에 말이야.”
차로 향하는 조규민의 발걸음이 가볍기 그지없었다.
* * *
“진성아, 도시락 놓고 갔어.”
“…….”
저 여자가 미쳤나?
한진성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뒷문을 바라보았다. 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는 아무리 다시 봐도 최연하다.
“도, 도시락?”
이런 미친! 급식 세대가 된 지가 언젠데, 급식충 소리도 못 들어봤나, 저 여자는?
“진호 씨가 가져다주라던데, 아냐?”
“아…….”
최연하는 선글라스를 벗고 가볍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애가 도시락을 놓고 가서요.”
“아…… 하하하, 하하하하…… 도, 도시락요? 하하하하하하…….”
한진성의 볼이 푸들푸들 떨리기 시작했다.
‘웃든지, 황당해하든지 둘 중 하나만 하세요. 너무 좋은데 황당하다는 얼굴 하지 마시구요!’
그런 표정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저 얼굴을 사진 찍어 보여주고 싶을 정도였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
도시락이라니.
누가 봐도 이상한 구실로 교실에 얼굴 한 번 내보이겠다는 의도잖은가. 이런 미친 짓을 왜…….
“최, 최연하다…….”
“최연하!”
하지만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마치 신음처럼 퍼지기 시작한 그 목소리가 이내 교실을 폭발적으로 메우기 시작했다.
“우아아아아아! 최연하다!”
“최연하가 여기 왜 왔어?”
아이들이 난리가 났다. 한 아이는 조금이라 최연하의 얼굴을 자세히 보기 위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 위로 뛰어올라갔고, 어떤 아이는 다짜고짜 자리에서 튀어나가 뒷문 쪽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수업이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정말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는 최연하이지만, 한진성은 그녀의 엉덩이에서 살랑거리는 아홉 개의 꼬리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니들, 속는 거야, 이 병신들아.’
저 여자는 니들이 아는 그런 여자가 아냐! 웃는 얼굴로 남자 하나 말려 죽이는 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그런 여자라고! 얼굴에 속지 마!
하지만 한진성이 단단히 잘못 알고 있는 것도 있었다.
설사 이곳에 있는 아이들이 최연하의 성격이 그렇다는 것을 알았어도 상황은 별로 달라질 것이 없었을 것이다.
착한 게 따로 있나, 예쁜 게 착한 거지.
최연하 정도 예쁘면 성격이 마녀여도 좋다고 할 남자가 대한민국에 절반은 넘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최연하는 마녀까지는 못 되는 유약(?)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음, 잠깐만. 잠깐만, 얘들아.”
최연하가 손가락을 들어 까딱까딱하자 아이들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일단은 도시락부터 전달하게 해줄래? 내가 오늘 배달이 좀 밀렸거든.”
“그, 그 도시락은 뭔가요?”
“애들이 요즘 영양이 부족한 것 같아서 내가 따로 만든 건데, 아침에 들고 가라니까 안 들고 갔네. 애가 건망증이 심하다니까.”
‘건망증은 얼어 죽을.’
나는 그런 소리 들은 적도 없다고!
최연하가 정말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자 지켜보는 아이들의 몸이 들썩거렸다. 최연하보다 자신들이 더 가슴 아프다는 제스처가 쏟아지고 있었다.
“왜 안 챙겨, 인마!”
“아, 아니지. 안 챙겨줘서 고맙다.”
“어? 그러네? 고, 고맙다.”
뭐가 고마운가, 뭐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 거야!’
당장에라도 이 미친 짓을 때려치우라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최연하의 눈빛이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
‘아아…….’
그도 어쩔 수 없는 남자인 건지, 최연하의 눈동자를 보자 반발할 의욕도 생겨나지 않았다.
한진성의 자리로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온 최연하가 싱긋 웃고는 그에게 도시락을 내밀었다.
“자.”
하트 보자기로 싸 오지 마세요.
이게 쌍팔년대 하이틴 영화 아니잖아요.
대체 이 컨셉을 누가 짠 거야, 누가!
이 시나리오가 먹힐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정말?
그때, 최연하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저녁에 좀 일찍 와. 오늘 저녁에 다 같이 밥 먹을 테니까. 피시방 가면 안 된다?”
“아, 안 가요.”
“응, 그래. 그럼 이따 보자.”
몸을 돌린 최연하가 선생님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수업 중에 죄송합니다, 선생님.”
“아, 아닙니다. 하하하하, 그럴 수도 있지요. 도시락까지 싸 주시고, 최연하 씨가 생각보다 굉장히…… 굉장히 뭐랄까…….”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멋진 수식어를 찾기 위해 살면서 처음으로 문학적이 되어버린 수학 선생님을 보며 한진성은 깨달았다.
‘아…… 시나리오가 중요한 게 아니구나.’
세상에는 그런 영화도 있다.
시나리오는 개판이고 연출은 쓰레긴데, 오로지 배우가 예쁘거나 잘생겨서 보게 되는, 그런 영화 말이다.
지금 한진성은 살면서 처음으로 배우라는 존재들이 가진 아우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있었다.
한진성의 머리를 두어 번 톡톡, 두드린 최연하가 손을 흔들며 뒷문으로 향했다.
“사, 사인! 사인 좀 해주세요!”
“연습장에!”
“제 노트북에!”
“제 가슴에!”
“가슴이라고 한 새끼 누구야!”
난장판이 벌어졌다. 아이들이 미쳐 날뛰고 있는데도 선생님은 저지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이 순간까지도 최연하를 수식해야 할 가장 완벽한 수식어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벌컥! 벌컥!
그리고 그때, 복도로 향하는 모든 창문이 깨질 듯이 과격하게 열리면서 남자아이들의 머리가 안으로 불쑥불쑥 들이밀어졌다.
“최, 최연하!”
“진짜다! 최연하가 왔어!”
“으아아아아아! 최연하다아아아아아!”
계엄령이 발동되었다.
‘지옥 같다.’
최연하 난입 사태라고 불러야 할 거대한 소요가 지나간 자리에 한진성은 녹초가 되어 한껏 늘어져 있었다.
‘불태웠어, 새하얗게.’
남자지만!
그도 같은 남자지만!
저놈들이 대체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이상한 건가?’
최연하고 뭐고, 어차피 그냥 같은 여잔데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최연하가 1층으로 내려가자 다급한 마음에 2층에서 뛰어내린 놈의 다리가 부러져 앰뷸런스에 실려 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애들을 통제한답시고 이리저리 뛰어다닌 학생주임의 머리가 땀에 젖어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였다.
소요는 진압되었지만, 그 파동은 어마어마했다. 최연하를 본 놈들은 하나같이 꿈을 헤매는 것처럼 점심시간이 다 되도록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물론 그중 가장 대미지가 큰 것은 한진성이었다.
‘……내가 오늘 보육원 가면 다 뒤집어엎는다.’
이런 미친 시나리오를 짠 사람을 붙들고는 수치를 줄 것이다. 그가 오늘 겪은 것보다 몇 배는 더 큰 수치를 주고 수치사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밥이나 먹자.”
한진성이 터덜터덜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으로 향했다. 복도를 걷는 내내 아이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과도하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원숭이 아니다.’
동물원의 원숭이가 이족 보행으로 복도를 걸어 다니면 이리 볼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하트 무늬가 들어가 있는 보자기로 싸여진 도시락의 그의 수치 강도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었다.
“휴우…….”
겨우겨우 식당에 들어선 한진성은 전교생이 자신을 돌아보는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나름 사람들 앞에서 기가 죽지 않는 강단 있는 타입이라 스스로 평가하던 한진성은 배우라는 직업이 얼마나 대단한 직업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그저 이만한 사람의 시선이 모이는 것만으로도 다리에 모터라도 장착된 듯이 전자동 16비트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으아아아아, 미치겠네.’
고개를 푸욱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 구석에 있는 자리에 앉은 한진성이 도시락을 올려두고는 고민을 시작했다.
‘이걸 먹어야 한단 말이지…….’
급식충은 급식을 먹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은 그 급식을 먹기가 힘들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도시락을 받았는데, 그걸 안 먹으면 안 먹는 대로 문제다.
이래도 꼬투리, 저래도…….
‘모르겠다.’
한진성이 과감하게 도시락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비켜봐. 아, 비키라고!”
거친 목소리와 함께 그의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조금씩 옆으로 물러섰다.
‘헐…….’
왜! 왜!
하필이면 저런 애의 관심을 끌어버린 것인가.
학교에서 제일 성격 더럽기로 유명한 최수한이 그를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걸리적거리는 아이들을 팔로 훅훅 밀며 다가온 최수한이 한진성의 바로 앞에 떡하니 서더니, 가만히 노려보았다.
“아, 안녕.”
“야.”
“응?”
“그게 최연하가 싸 온 도시락이냐?”
“……어.”
“하, 씨발.”
최수한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더니, 정말 말 그대로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한진성을 노려보았다. 한진성은 영문도 모른 채 그 눈빛에 떨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한진성을 노려보던 최수한이 아주 조용히 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한입만.”
“응?”
“……한입만.”
“…….”
조용하다.
모두가 조용하다.
이 타이밍에, 이런 상황에 왜 조용한 건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이해하고 싶지도 않지만! 세상이 고요에 빠져들었다.
그 무거운 침묵을 이기지 못한 한진성이 자신도 모르게 도시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머, 먹을래?”
“먹어도 되냐?”
“으응.”
“진짜?”
“……응.”
최수한이 갑자기 한진성에게 와락 달려들더니, 그의 어깨를 잡고 두어번 정도 팡팡, 두드렸다.
“……너, 좋은 놈이구나.”
“응?”
“감동했다.
“…….”
한진성은 웃었다.
‘이 새끼들…… 미쳤어.’
평소에 귀신보다 더 무서워하던 놈들이 민낯을 드러내는 것을 본 한진성의 심정은 무척이나 복잡미묘했다.
대체 이게…… 이게 무슨 상황인가.
‘이젠 나도 모르겠다.’
한진성은 도시락을 열어 위에 올려두고 고개를 젖혀 버렸다. 그러자 아이들이 슬금슬금, 마치 사람을 포위하는 좀비 떼처럼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좀비 떼의 한가운데에서 한진성은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