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401
#400.
올라타다 (5)
“그러니까…….”
“이게…….”
“왜!”
“먹히냐고오오오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아이들은 고뇌에 빠져들었다. 뭔가 수치스러운 느낌이다.
이 빤한 시나리오의 일원이 되어서, 이 빤한 시나리오를 수행했다는 것이 그들을 좌절하게 만들었다.
물론 대부분의 아이들은 단순한 피해자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이건 시나리오라기보다는 몰카에 가까웠다. 그것도 매우 노골적인.
그런데…….
“아, 왜 먹히냐고!”
“먹힌다는 게 수치스럽다.”
“나…… 오늘 애들이 빵 사 줬어.”
“나는 저번에 삥 뜯긴 거 돌려받음. 개황당함.”
“어어버, 어어…….”
뭣도 모르고 좋다고 다가오는 아이를 안아 들며 한진성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쪽팔려 죽을 뻔했다.”
“나도.”
“그런데 더 쪽팔리게 생겼어. 애들이 보육원 한 번만 들르면 안되냐는데? 청소도 열심히 하고 개처럼 일한대. 봉사 활동 시간도 필요 없다던데.”
“……전에는 알아서 봉사 활동 서류 만들어 오라고 했는데…….”
“그러니까!”
한진성이 모르겠다는 얼굴로 드러누웠다.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냐?”
허탈하다.
너무 허탈하다. 그리고 그 허탈함의 이면에는 이 일이 꽤나 풀려 버렸다는 사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토록이나 고뇌하고 고통스러워하던 일이 이런 간단한 촌극만으로 이만큼이나 호전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진짜 인생 이지 모드로 산다.’
자괴감까지 들 정도였다.
그들에게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이 사태가 강진호나 최연하에게는 그저 얼굴 한 번 들이미는 것만으로 반쯤은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니, 인생의 불공평함이 다시 한 번 실감되었다.
“그래도 솔직히 좀…….”
“뭐?”
“도움이 되긴 했잖아.”
“…….”
“그 엄한 체력 단련보다는 백배쯤 나은 것 같은데…….”
체력 단련이라는 말이 나오자 한진성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잊고 있었다.’
다 해결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아마 그들이 채워야 할 부분일 것이다. 방진훈과 함께 말이다.
지옥을 보게 될 것이라 한 말과는 다르게 의외로 방진훈은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그들에게 교육의 목표와 교육의 효과, 각자 지금 가진 체력과 능력에 따른 단기 지향점과 장기 지향점을 일일이 설명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운동의 방식과 개인적인 과제를 따로 내줄 만큼 말이다.
그리고 강진호처럼 죽기 진전까지 무식하게 굴리지도 않았다. 운동이 끝나면 죽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상쾌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 정도였으니까.
‘그럼 이제는 우리끼리…….’
“아, 더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짜증 어린 얼굴의 최연하가 안으로 들어왔다.
“물 가져와! 얼음 타서 시원한 냉수로! 어차피 여기 아메리카노는 없지?”
동일인이다.
지금 저기서 패악질을 부리고 있는 최연하와 어제 그의 교실을 방문한 최연하는 동일 인물인 것이다.
“에어컨 없어?”
“이, 있는데, 저 안쪽 거실에만…….”
“뭐? 이 큰 데 에어컨이 달랑 한 대야? 강진호 씨는 대체 뭐하는 사람인데 그런 것 하나 안 달아줘? 돈도 많은 사람이. 여하튼 하나부터 끝까지 내가 안 챙기면 되는 일이 없어. 뭐가 돌아가야 말이지.”
세상에는 ‘에어컨이 없으니 새로 달아야겠구나’를 저리 기분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아니, 성격이 나쁜 거야, 좋은 거야?’
하나만 하자, 하나만.
헛갈리게 그러지 말고, 제발 좀 방향을 하나로만 잡아달라고. 역할따라 연기가 천변만화하는 건 영화에서만으로 충분하잖아. 그러니까 여기서는 그냥 한쪽으로만 가자. 제발!
“아니! 이 도시락 사태는 대체 누가 생각한 거예요?”
“나.”
최연하가 의자에 털썩 앉으면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너, 너무 시나리오가 올드하지 않아요?”
“니들이 시나리오를 알아?”
“…….”
“복잡한 시나리오에서는 배우 얼굴이 안 보이는 거야. 이걸 영화적 과장이라고 하는 거라고. 되레 너무 단순하고 조금은 촌스러워 보이는 시나리오에서 배우가 튀는 거지. 너는 자연스러운 상황이 좋았을 거 같아, 아니면 이런 상황이 좋았을 것 같아?”
한진성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쥐뿔도 아는것도 없으면서 아는 척하기는. 내가 설마 네가 생각하는 것도 생각 못하겠니? 꼬맹이가 괜히 아는 척하다가는 혼난다.”
“……네.”
뭔가 반론할 말이 없다. 아니, 반론할 말이 있어도 저 포스 앞에서는 도무지 반론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니가 지금 시나리오 탓할 처지야?”
“네?”
아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진짜 배우라면 시나리오가 어떻든 최선의 연기를 보여줘야지. 그게 뭐야? 네? 네? 내가 혼자 끌어가느라고 얼마나 스트레스 받은 줄 알아? 어떻게 머리 제일 굵었다는 애가 저보다 어린 애들보다 장단을 더 못 맞춰? 도시락 싸 왔다고 진작부터 친한 척 다 했는데, 그렇게 ‘나는 처음 듣는데요? 누구세요?’ 하고 있으면 나더러 뭘 어쩌라고?”
그에게 쏠린 시선이 마치 LED 전구가 순간적으로 색이 변하듯 일제히 비난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아, 아니!”
세상에 이리 억울한 일이 또 있을까.
“내가 어떻게 그걸 맞춰요! 미리 말이라도 해주든가!”
“말해줬으면 로봇 됐겠지. 오.셨.어.요?”
반박할 수가 없다.
“패, 팩트를 멈춰주세요.”
“시끄러워.”
최연하가 짜증 나 죽겠다는 얼굴로 손부채질을 했다.
“아, 얼굴에 열 오르는 거 봐. 피부 나빠질까 봐 내가 시즌 중에도 이런 과격한 일정 소화 안 하는데, 온 학교 다 돈다고 고생만 죽도록 했네. 너희 진짜 사람이면 내 은혜 잊으면 안 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네, 언니!”
여자들이 일제히 합창했다.
‘아니! 수치당한 건 우리 남자들인데, 니들이 왜 대답을 해!’
하고픈 말은 많지만, 차마 할 수가 없다. 여기서 괜한 말을 해서 여자 아이들의 폭격을 맞고 싶지는 않았다.
최연하는 무슨 짓을 했는지 그 짧은 시간 만에 여자아이들을 완벽하게 통폐합해서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어 버린 후였다.
“물은?”
“……저, 저요?”
최연하의 눈썹이 꿈틀했다.
“너는 나이 먹고 애들 부려 먹고 싶니? 뭔 애가 벌써부터 쥐꼬리만 한 권력에 찌들어서는.”
저 고2거든요?
나이 안 먹었거든요?
그리고…… 권력질한 적 없거든요?
“뭐해, 물 안 가져오고?”
“……갑니다.”
한진성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힘없이 얼음물을 탔다.
‘침 뱉을까?’
진지하다. 이거, 진짜 진지한 고민이다. 이게 색이 좀 진한 거였으면 다짜고짜 침 뱉었을 텐데.
부엌에서 돌아와 방문을 열어보니 기이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의자에 앉아 거들먹거리던 최연하가 바닥에 앉아서 여자아이들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스타일 바뀌어서 보기 좋다는 말은 안 하고?”
“……예쁘다고.”
“그렇지? 그렇지? 응, 응. 우리 수민이는 얼굴이 워낙 예쁘니까 조금만 살려줘도 확 살아나지. 그래. 원판이 이리 화사하고 예쁜데, 오죽하겠어.”
말끝마다 자상함이 묻어난다.
손짓 하나마다 정성이 배어 있다.
‘뭐지?’
이게 뭐야? 사람이 바뀐 건가, 아니면 저 여자가 남성 혐오증이라도…….
“아!”
방문 쪽에 강진호가 들어와 있었다.
‘저 불여시 같은 게…….’
불과 1분 전에 패악질을 부려서 그를 멘탈 붕괴 직전까지 몰아넣어 놓고는! 이제 와 다정한 척이라니!
‘불의를 보고 참는 자 어찌 사나이라 말하리오!’
내가 이 모든 것을 까발려…….
“…….”
그때, 모든 여자아이들이 귀신같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강진호는 뒤쪽에 있어서 그 눈빛을 볼 수가 없다. 오로지 그만이 그 시선을 보고 있는 것이다.
입이라도 잘못 뻥긋하면 잡아 찢어버리겠다는 눈빛이 사방에서 쏟아진다고 생각해 보라.
“…….”
그의 입에 지퍼가 채워졌다.
‘입 열면 죽는다.’
여자아이들.
아니, 친최연하 사단은 만약 강진호에게 쓸데없는 소리가 조금이라도 돌아가면 너를 삶아 먹겠다는 의지를 확고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개중에 ‘나중에 크면 그에게 시집오겠다’던 초등학교 3학년 꼬맹이 민주의 앙칼진 눈까지 발견하자 눈가가 시큰해져 왔다.
‘마녀야, 저 여자는 마녀야.’
마녀가 따로 있는가.
속이 시커멓기 짝이 없는데 겉으로는 착한 척을 하고, 사람들을 현혹시켜 조종한다.
이게 마녀지! 이게!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중세가 아니고, 마녀가 화형을 당하기는커녕 TV에 나와서 우상이 되는 시대였다. 서글픔이 밀려왔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때, 최연하가 벌떡 일어나 한진성에게 다가와 물을 받아 들었다.
‘이젠 고맙다고 하겠지?’
가증스러운 여자, 네 행동 패턴 따위는…….
하지만 최연하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몸을 빙글 돌리더니, 냉수를 강진호에게 내밀었다.
“드세요.”
“저요?”
“네. 목마르실까 봐.”
“아, 감사합니다.”
파악 못했네.
야, 이건 몰랐네.
자신이 최연하를 너무 쉽게 봤다는 것을 인정한 한진성은 힘없이 구석에 쪼그려 앉아 무릎을 감싸 안았다.
‘오늘은 이상하게 혼자 있고 싶네.’
주체할 수 없는 서글픔이 밀려오고 있었다.
“……뭐가 잘됐는지는 모르겠다.”
강진호가 어색하게 운을 뗐다.
“나름 한다고는 했는데, 이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고…….”
“도움 많이 됐어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강진호가 고개를 저었다.
“신경을 썼다는 것 정도로 생색내고 끝내려 했으면 애당초 시작도 안 했을 거야. 좀 더. 좀 더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같이 찾아보자. 어쩌면 이런 부분에 있어서 나는 부족하겠지만……. 사실 오늘 생각을 해봤는데, 정말로 부족한 것은 대화였던 것 같아.”
“…….”
“우리가 해결을 한다기보다는 일단 너희 말을 들었어야 하는 것 같은데, 다짜고짜 해결을 하려 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음, 그래. 미안하다.”
꽤나 많은 반성을 한 하루였다.
원장 수녀님이라면 이렇게 일을 벌이기 전에 우선은 그들의 말을 다 듣고 같이 울어주었을 것이다. 강진호가 원장 수녀님의 자리를 대처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런 노력이라도 했어야 하는 건데.
강진호의 말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구석에는 눈가를 훔치는 아이들도 있었다.
뭔가 말을 더 하려 입을 열던 강진호는 등 뒤에서 과격하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사내의 말에 저지되었다.
“아직 감상에 빠지기는 이릅니다!”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온 조규민이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아직 메인이벤트는 시작도 안 했습니다. 이제 진짜 상황을 정리해야 할 때죠. 반성회는 그다음에 합시다!”
“……또 뭘 합니까?”
“에이! 이게 뭐 얼마나 대단한 거라고 이걸로 다 해결을 합니까? 본인 얼굴에 자신감이 너무 과하시네요.”
니가 시켰잖아!
생전 처음으로 억울함을 온 얼굴로 표현한 강진호가 막 항의를 하려고 할 때, 조규민이 손가락을 들어 강진호의 말을 막았다.
“고1이 제일 무서워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시험?”
“쯧쯧.”
조규민이 손가락을 까딱까딱 젓더니 말했다.
“아니죠. 정답은 고2입니다.”
“……네?”
“지금부터 이해하게 되실 겁니다.”
그 말이 끝나자 문으로 육중한 덩치의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이제 제 차롑니까?”
방진훈이 사악하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본 강진호와 아이들은 왠지 모를 오한에 떨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