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408
#407.
곤란하다 (2)
황정후는 노화가 치민 얼굴로 큰아들을 바라보았다.
“다 지껄였느냐?”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황민재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 지껄였느냐구요?”
황민재가 피식 웃었다.
“할 말은 아직 끝도 없습니다. 울분을 다 이야기하자면 하루 종일도 모자라지요. 자식 놈들 한데 처박아놓고 몇 년이 지나도록 모욕을 주시다가 이렇게 다시 부르시면 ‘예, 고맙습니다’ 하고 와서 어깨라도 주무를 줄 아셨습니까?”
“네 이놈!”
황정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애비가 병상에 누워 있는 틈을 타서 회사를 찬탈하려 든 것들이 어디 감히 되레 역정을 내느냐! 네놈들이 잘했다는 것이냐?”
그래도 둘째 아들인 황민수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지만, 황민재는 전혀 흔들리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뭐?”
“유언장 하나 만들어두지 않고 회장이신 아버지가 쓰러졌는데, 그럼 저희는 무작정 아버지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려야 했다는 말입니까? 의사도 가망이 없다고 하는데, 회장 자리를 비워두고 굿이라도 할까요?”
“이, 이놈이!”
황정후는 노화가 치밀어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네놈들이 정말 회사를 위해서 그런 짓을 했느냐? 애비가 병상에 누워 있는데 제대로 문병 한 번 오지 않던 것들이 뻔뻔스럽게 그따위 망발을 지껄여?”
황민재가 피식 웃었다.
“저희는 무너져 가는 회사를 다잡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말은 바로 하시지요. 저희가 회사가 박살이 나는데도 내버려 두고 아버지 병상을 지켰으면, 아버지는 저희더러 잘했다고 하셨겠습니까?”
“…….”
“무능한 놈들이 평생을 키워줬는데 회사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고 욕하셨겠지요. 이래도 욕을 먹고, 저래도 욕을 먹는 것 아닙니까. 그 와중에 저희는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것은 전 재산을 빼앗기고 쫓겨나는 것이었습니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저희가 뭘 잘못했습니까!”
황민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저희는 아버지가 급작스럽게 쓰러진 와중에서도 회사를 되살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평소 아버지가 얼마나 우리를 무시했으면 이사진이나 실무진도 저희를 무시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휘 체계라도 통일하려면 아버지의 지분이 필요했습니다. 자신이 역전의 노장이네 뭐네 하면서 거들먹거리는 이사진들이 저희 말을 듣게 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로비 한 번 안 했는데도 정부에서 나서서 도와주려 한 것 아닙니까!”
“네놈들이 선의로 그 짓을 했느냐? 선의로? 그런 놈들이 이전투구나 벌여?”
“하하하하.”
황민재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경쟁은 형제끼리도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니, 힘을 합쳐서 뭔가를 하려고 들지 말고 타인이라 생각하며 서로를 밟고 일어서라고 하신 분은 아버지 아니십니까?”
“……너.”
황민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했다.
“우리가! 우리가 대체 뭘 잘못했습니까! 회사를 살리려 했고, 아버지의 말에 따랐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변명도 들어주지 않고 쫓겨나는 것이었지요! 회장 아들이랍시고 낙하산으로 들어가는 주제에 큰돈을 받으면 염치도 없다고, 사장임에도 평사원만도 못한 돈을 받으며 근근이 버티던 우립니다. 그런데 그리 쫓겨나면 어디서 뭘 해야 합니까! 차라리 제가 가진 능력대로 그 시간 동안 다른 곳에서 일했다면 지금쯤 남부럽지 않게 살았을 겁니다. 그런데 재경에서 낭비한 시간 때문에 모아둔 돈은 없고, 재경의 방해 때문에 다른 곳에도 취직할 수가 없었습니다. 차라리 죽이시지 그러셨어요! 차라리!”
“다, 당장 나가라! 이 불효막심한 놈!”
“네! 나가지요, 나가요! 아버지 얼굴을 보기 싫은 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뭐하겠다고 여기까지 기어 들어왔느냐! 이놈아!”
“한 번은!”
황민재가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한 번은 아버지 앞에서 말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무슨 생각으로 버텨왔는지! 제가 왜 이 꼴이 됐는지! 그리고 이 말을 꼭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황민재의 얼굴에는 증오가 어려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쳐다본다고 하기에는 믿기 힘든 눈빛이었다.
“제게 잘못이 있다면 아버지 같은 사람을 부모로 둔 것뿐입니다. 그 잘난 회사 끌어안고 잘 먹고 잘사십시오. 다시는 볼 일이 없을 테니까요!”
“이 얼어 죽을 놈!”
“갑니다!”
황민재는 단숨에 몸을 돌리고는 저벅저벅 걸어가 문을 열었다.
벌컥!
그러다 그 앞에 서 있는 조규민과 강진호를 발견하고는 살짝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조규민.”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황민재가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억하다마다. 미안하다. 내가 네게는 못할 짓을 했지. 지금 사과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냐마는…….”
황민재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너는 승승가도를 달리고 있으니 용서는 못하더라도 아량은 베풀 수 있겠지. 승자의 입장에서 패자를 지켜보며 비웃는 걸로 만족해 다오. 그럼.”
조규민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가는 황민재와 강진호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황민재가 깔끔하게 강진호를 무시하고 밖으로 걸어 나가자 조규민이 그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선 채로 화를 삭이고 있는 황정후와 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황민수를 보고 있으려니, 지금은 적당한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을 정리하려는 순간, 황민수가 황정후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말했다.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아버지.”
“그래.”
황정후가 못내 고개를 끄덕이자 황민수가 씁쓸한 얼굴로 밖으로 걸어 나왔다.
“아…….”
강진호를 발견하고는 황민수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그럼 다음에.”
황민수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가자, 조규민이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고는 작게 말했다.
“조금 뒤에 찾아뵙겠습니다, 회장님.”
“그러도록 해.”
“예, 그럼.”
조심스레 문을 닫은 조규민이 주위를 보며 말했다.
“정리하고 회장님 냉수 한 잔 가져다 드려요. 아니, 냉수 말고 냉커피로 하죠. 냉수 드렸다가는 원샷해 버리실 테니까.”
“예, 실장님.”
조규민이 강진호를 끌고 몸을 돌려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난리도 아니네요.”
“그러네요.”
조규민이 씁쓸한 얼굴로 커피를 마셨다.
“표정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표정이 굳어 있는 것을 발견한 조규민의 말에 강진호가 침음성을 흘렸다.
‘하기야.’
이 일을 벌인 것이 강진호인데 그 결과가 이러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아마도…….
“제가 귀가 얇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말입니다.”
응?
이건 또 무슨 말이지?
강진호의 입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나오기 시작하자, 조규민이 당황하여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예.”
“가만히 듣고 보니 그 말이 틀린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예?”
“아까 그 장남이란 분이 한 말 있잖습니까.”
조규민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 입장을 듣고 보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거, 제가 귀가 얇은 겁니까?”
조규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시간이 이리 흘러서 새삼.’
당시에는 조규민 역시 황민재에 대한 분노에 불타던 시절이라 딱히 불만이 없었지만, 지금 와 돌이켜 보면 조금 과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조언자조차 허락하지 않던 황정후가 지분 인계에 대한 유언장조차 써두지 않고 쓰러진 상황에서 그 아들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황정후는 자신의 아들들을 옆에서 보기에도 무서울 만큼 다그치던 사람이었다. 다른 사장단들이 실수를 하면 ‘실패는 병가지상사다’를 외치며 다시 기회를 주었지만, 자식들이 잘못을 했다 싶으면 재떨이부터 날아갔다.
멍청한 놈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저런 한심한 것들에게 회사를 물려주기 겁난다는 소리를 여러 번 중진들 앞에서 해 댔다.
그런데 무슨 권위가 있겠는가.
그대로 시간이 조금 지나서 황정후가 두 아들을 어느 정도 인정해 주고 권한을 물려준 상태에서 이양이 벌어졌다면 회사 역시 큰 문제 없이 안정이 되었겠지만, 그 과정에 돌입하기 전에 황정후가 쓰러지면서 사단이 난 것이다.
‘너무 오래 잡고 계셨지.’
황정후의 카리스마는 대한민국 재계에서도 범접할 사람이 없는 수준이다. 그런 이의 공백은 쉽게 메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시대의 거인인 황정후의 옆자리를 지켰다는 자부심이 가득한 이사진들은 황정후가 깨어나기를 기다렸고, 회사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권한을 몰아 받아야 한다는 황민재의 말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일 년이나 걸렸지.’
참다못한 황민재가 정부 쪽과 말을 맞추어 황정후를 금치산자로 판정받고 지분을 강제로 상속하는 상황까지 가서야 이사들이 줄을 대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회사라면 회장이 쓰러지고 가망이 없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 벌어졌어야 할 일이 무려 일 년이나 걸린 것이다.
그만큼이나 황정후의 그림자는 재경에 깊게 박혀 있었다. 그 와중에 황정후의 세 아들들은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자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이전투구를 벌인 것으로 보이겠지만…….
‘황정후 회장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자식들에게 함께 일을 시킨 적이 없다.’
협력이란 것을 가르친 적도 없었다.
황정후는 권력을 나누는 법을 몰랐고, 자신이 죽은 다음에는 아들 중 하나가 모든 권력을 물려받기를 바랐다. 세 아들이 어정쩡하게 권력을 나눠 갖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리 평생을 교육받은 이들이 어찌 힘을 합쳐 회사를 끌고 나가겠는가.
“어려운 일이네요.”
조규민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당시에야 그저 황정후가 깨어나고 회사가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것에 집중하느라 깊게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가만히 상황을 다시 되짚어보니…….
“저도 귀가 얇은 모양입니다.”
“그렇죠?”
“다른 의미로는 강진호 씨가 한 말이 이해가 되기도 하네요.”
“네?”
조규민이 씁쓸하게 말했다.
“외로웠겠네요. 회장님도, 그리고 세 아들분들도 말입니다. 가족이되 가족이라 할 수 없는 관계니까요.”
“…….”
분위기가 조금 무거워졌다.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규민이 고개를 돌리자 문이 살짝 열리더니, 비서가 고개를 안으로 들이밀었다.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조규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강진호도 가만히 뒤따라 일어났다.
“아마도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으실 테니, 언행을 조금만 조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네. 그럼 가시죠.”
조규민을 따라 회장실로 향하며 강진호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바람 잘 날이 없구나.’
그의 주변이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