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409
#408.
곤란하다 (3)
똑똑.
“들어와.”
황정후의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조규민이 침을 한 번 삼키고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래, 어서 와.”
황정후가 빙그레 웃으며 강진호를 맞았다.
“내 못난 꼴을 보였구만.”
“괜찮습니다.”
황정후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해해 주겠지. 이해해 줘야지. 세상에 자식 농사만큼 힘든 일이 없거든. 겪어보지 않았는가?”
“자식 낳아본 적 없습니다.”
“그럼 그 세월 동안 뭐했나?”
“…….”
강진호는 이 영감을 위로해야 한다는 마음을 싸그리 접어버렸다. 황정후는 황정후였다. 그 짧은 시간 만에 노화를 모두 다스리고는 평소의 그로 돌아가 있었다.
“일단 앉지.”
“예.”
황정후의 좌우로 강진호와 조규민이 자리했다. 인터폰을 눌러 커피를 가져오라 시킨 황정후가 강진호에게 담배를 내밀었다.
“한 대 하지.”
“예.”
이제는 사양도 없이 덥석 받아 드는 강진호였다.
사실 그가 어느 정도의 세월을 살아왔는지 이미 다 아는 상황에서 예의를 차리는 것도 우습기도 했다. 담배에 불을 붙인 두 사람이 가만히 연기를 뿜어냈다.
“내 이름을 팔았다고?”
“그렇게 됐습니다.”
“잘했네.”
“…….”
황정후가 빙그레 웃었다.
“자네가 아니었으면 팔아먹을 이름도 없었을 텐데, 그렇게라도 써주니 나야 고마운 일 아닌가. 이런 일이 아니면 자네에게 은혜를 갚을 일이 없으니.”
“예.”
“저놈들을 보고 있으니 새삼 자네가 내게 얼마나 많은 일을 해주었는지가 실감이 난단 말이야. 자네가 아니었으면 저놈들이 이 회사를 쥐락펴락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끔찍하네.”
순간, 강진호의 이마가 꿈틀댔다.
하지만 조규민이 황정후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필사적으로 강진호에게 눈치를 줬다.
“으음.”
강진호도 이제는 나름 눈치란 게 생긴 상황이라 불만스러운 얼굴이지만 딱히 뭔가를 말하지는 않았다.
“가까운 시간 내에 낚시라도 한 번 가는 게 어떻겠는가?”
“낚시라…….”
강진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하는 건지 모릅니다만?”
“그거야 배우면 되는 일이지. 낚시라는 건 잘하는 사람은 있어도 못하는 사람은 없는 거네.”
“재미있습니까?”
“해보면 알겠지. 사람들이 괜히 주말만 되면 강으로, 바다로 나가는 게 아닐세.”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후후후, 시원스럽구만.”
조규민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이야 이렇게 넘긴다 치더라도…….’
앞으로 있을 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천 근처럼 무거워지는 조규민이었다. 까딱하다가는 절대로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 황정후와 입바른 말은 죽어도 못하는 강진호가 정면으로 부딪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건 빅뱅이야.’
조규민은 허벅지 위로 양손을 모았다. 신이 있다면 제발 이 두 사람이 충돌하는 상황만은 만들지 말아달라고 기도하며 말이다.
물론 신이란 존재가 누구나 기도한다고 다 들어준다면 세상이 이리 험악할 리가 업었다.
* * *
“……그랬단 말이지?”
‘미안해요, 형.’
왜 사과를 하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왠지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괜한 말을 꺼냈다가 폭탄을 던져 버린 것 같은 느낌에 한진성이 처연하게 고개를 돌렸다.
다른 아이들도 비슷한 얼굴이었다.
자신들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다는 것을 실감한 아이들은 어색한 표정으로 최연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얼마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냉기를 풀풀 뿜어내는 최연하의 얼굴은 차마 정면으로 바라보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괜히 입을 열었다가는 하고픈 말 대신에 ‘살려주세요, 여왕님!’ 소리가 튀어나올 기세였다.
“한세연?”
“……예.”
“걔는 지금 뭐하는데?”
“자, 잘 모르는데요?”
“몰라?”
“…….”
“왜 몰라? 네가 알아야지!”
논리도 없고, 근거도 없었다. 하지만 반박할 수가 없다. 여기서 괜히 반박하겠답시고 입을 열었다가는 얼음송곳에 찔려 죽을 것 같다.
“그러니까, 뭐야? 하…….”
열불이 난다는 듯이 얼굴에 몇 번 손부채질을 한 최연하가 표독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그러니까 여자한테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는 거지! 이미 한 번 사귀던 여자가 있었다는 거잖아!”
“그, 그렇죠.”
“그럼 고자가 아니라는 거잖아.”
최연하 님.
당신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배우이십니다.
지금 하신 말씀을 기자들이 녹취라도 했다면 내일 연예부 신문 1면 장식은 따 놓은 당상입니다. 제~에발 체통을 좀 지키세요. 제~에발.
“왜 고자 아닌데!”
“누나, 지금 핀트가 좀 이상해요. 정신 차리세요.”
“고자여야지! 그만큼 사람 무시했으면 고자여야 할 거 아냐! 그런데 왜 고자가 아니라는 거야? 그럼 내가 그 한세연인가 뭔가 하는 애보다 못하다는 거야?”
한진성이 보기에 지금 최연하는 멘탈이 터져 있었다.
‘대단하다, 진짜.’
강진호나 최연하나 얼굴값 못하기로는 난형난제였다. 그 얼굴로 고자 소리 듣고 다니는 강진호나, 저 얼굴로 강진호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다는 말 듣고 좋아하던 아이돌 열애설 터진 것마냥 멘붕하는 최연하나.
‘얼굴 그렇게 쓸 거면 나 달라고.’
이 두 사람이 물과 기름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한진성이지만, 최근에는 생각이 조금 바뀌고 있었다. 어쩌면 이 둘은 환상의 커플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 그래도 고자가 아닌 게 낫지. 그럼 가능성이 있는데. 아냐. 차라리 고자인 게 나을 것 같은데? 그럼 내가 자존심이라도 좀 덜 상할 텐데. 뭐가 더 나은 거지?”
자아 붕괴 단계까지 들어가 버린 최연하를 보며 한진성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많은 이들 앞에서 딱딱대며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최연하를 보니 뭔가 안쓰럽기도 하고…….
‘멍청해.’
이런 젠장, 왜 이렇게 비슷하냐고!
저 둘이 만나면 부창부수의 표본이겠네.
“누나, 일단 진정하시구요.”
“으응.”
맛이 갔다.
한진성이 뭔 말만 하면 패악질을 부리던 그 최연하는 어디에 가고, 얼이 빠져서 고개를 끄덕이는 최연하만이 남아버렸다.
“야.”
“네?”
“객관적으로 보기에, 네가 봐도 그 한세연이라는 여자가 나보다 나아?”
“객관적으로요?”
“……조금은 주관적이어도 괜찮아. 누나가 너 참 많이 이뻐라 한 거 알지?”
한진성은 안구에 차오르는 습기를 걷어냈다.
대체 누가 이 여자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세상 부러울 것 없이 당당했을 이 여자를 말이다!
“이건 진호 형이 잘못했네.”
그 해답은 이 사태의 주범이나 다름없는 종석이가 내려주었다.
눈치 없는 걸로 올림픽을 하면 은메달리스트를 후드려 패면서 금메달을 따올 종석이가 혀를 차면서 말했다.
“그러게 누나가 이렇게 잘해주는데 그렇게 굴어버리면 누나가 뭐가 되냐고.”
“……조, 종석아.”
“와, 이렇게까지 하면 자존심이 안 남아나지. 말 그대로 KO패 당한 거 아냐. 아무리 첫사랑이라는 게, 그리고 첫 여자라는 게 기억에 강렬하게 남는다고 해도 이 정도 차이가 벌어져 버리면 적어도 진호 형이 생각하기에는 세연이 누나가…….”
“으아아아아아! 닥치라고, 이 새끼야!”
한진성이 옆에 있던 베개를 들어 종석이의 얼굴로 집어 던졌다.
“아, 왜!”
베게에 얻어맞은 종석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말하자, 상황을 지켜보던 여자아이들이 융단폭격을 가했다.
“나가 죽어! 그냥 죽어!”
“너는 생각이 없는 거니, 눈치가 없는 거니?”
“너는 웬만하면 입을 열지 마라. 입만 열면 속 터지니까!”
아무리 눈치가 없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입을 더 열면 맞아 죽는다 정도는 알 수밖에 없었다. 종석이가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꾹 다물고 슬금슬금 물러나자, 모두의 시선이 아주 천천히 최연하에게로 돌아갔다.
비틀.
최연하가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일이 있어서…….”
일이라니?
이 야밤에 할 짓도 없다고 놀러 온 사람이 무슨 일이 있다고?
“누, 누나.”
“내일…… 내일 올게. 얘들아, 잘 자고…….”
“누나!”
“아, 안녕.”
손을 흔들며 나가는 최연하의 얼굴 가에 뭔가가 그렁그렁한 것 같았다. 억울함과 분함에 악에 받친 최연하가 쿵쾅쿵쾅 뛰어서 밖으로 뛰어나가자 여자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진성에게로 꽂혔다.
“어쩔 거야?”
“우리 언니 불쌍해서 어쩔 거냐고!”
“아, 아니…….”
그리고 한진성도 억울했다.
“왜 나한테! 내가 뭘 잘못했다고!”
“오빠가 말을 이상하게 끌어서 그렇잖아!”
“그럼 종석이한테 뭐라고 해야지!”
“쟤는 말이 안 통하잖아! 오빠가 때려서라도 막았어야지!”
일리가 있다.
납득이 간다.
“……미안합니다.”
저 눈치라고는 개미 눈꼽만큼도 없는 놈이 사단을 벌이기 전에 어떻게든 철권 제제를 가했어야 하는데, 그것에 실패한 것이 패착이었다.
“누나…… 다시 올까?”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 내일 온다고 했잖아.”
“딱 보니까 멘탈도 엄청 깨진 것 같고, 시간 좀 지나면 엄청 쪽팔릴 텐데, 그러고도 다시 올까? 나 같으면 못 올 거 같은데?”
그 말을 들은 여자 초딩들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어, 언니 안 와?”
“……아니, 그게 아니라…….”
“안 와?”
순식간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아이들을 보고 한진성이 기겁을 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울지 마! 울지 마! 언니 올 거야! 안 오면 내가 어떻게든 끌고 올 테니까 울지 마! 하나 울면 여기 난리난다!”
아이들이 끅끅대며 울음을 참기 시작했다.
문제는 조금 더 심각했다.
여자 초딩들이야 그럴 수 있다지만, 중딩은 물론이고, 고딩들까지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특히나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분위기가 슬픔에서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어쩔 거냐고! 이제 언니 안 오면 오빠 진짜 평생 저주할 거야!”
“그래!”
한진성은 억울했다.
아무 지은 죄가 없이 역모로 몰려 삼 대가 몰살당한다고 하더라도 이보다 더 억울할 것 같지는 않았다.
“언니, 진짜 좋은 사람이란 말이야. 우리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맞아!”
“돈이 많은 게 아니고?”
여자아이들의 눈이 표독스러워졌다.
“그냥 와서 돈 좀 쥐어 주고 자기들 기분 좋으려는 사람이랑 진짜 우리가 좋아서 같이 놀아주는 사람도 구분 못할 것 같아? 눈칫밥만 십 몇 년을 먹었어. 표정만 봐도 귀신같이 안다고!”
그래, 보통은 그런 능력이 길러지기 마련이지.
그런데 종석이 쟤는 왜 저러냐. 뭔 놈의 외계인도 아니고.
“언니가 머리 묶어줄 때 너무 좋았는데…….”
“마사지 가르쳐 줄 때도.”
“옷 사 줄 때도.”
“비싼 음식 사 줄 때도.”
……너희, 무척 호사스러웠구나.
우리는 개고생했는데.
“어떻게 좀 해봐! 저렇게 좋은 언니가 이런 일 때문에 안 온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
“나라고 한들…….”
한진성이 난색을 표할 때, 종석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 나 생각 있는데.”
“너는 생각을 하지 마!”
“넌 생각 없어.”
“응, 돌아가. 안 들어줘.”
종석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니, 정말 생각이 있는데…….”
“뭐? 나중에 사고 치지 말고 그냥 여기서 말해라. 빨리 컷하게.”
기회를 얻은 종석이가 지체 없이 입을 열었다.
“이거, 애초에 누나가 형이랑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아서 생긴 일이잖아.”
“그렇지.”
“그럼 우리가 나서서 둘이 잘되게 이어보면 되는 거 아냐? 그럼 더 자주 올 건데.”
“이 새끼…….”
한진성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천잰데?”
눈치는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