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430
#429.
수습하다 (4)
“뭔 짓을 저질렀기에 그놈이 연락을 다 해?”
“별일 아닙니다. 놀이공원에 사고가 터졌길래 빨리 대피시키라고 연락을 줬을 뿐입니다.”
“그걸 지들이 알아서 해야지, 네가 전화까지 해줘야 하는 건가?”
“결정할 권한이 없으니까요. 만약 나중에 권한 문제나 손해액 때문에 문제가 된다면 재경 이름을 대고 면피받을 수 있다는 계산을 만들어준 겁니다.”
“거…….”
황정후는 눈을 몇 번 끔뻑이다가 크게 웃어버렸다.
“꼴통 같은 놈.”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이 아니지. 애초에 이름이라는 것은 요상한 것이야. 있으면 쓸데가 많을 것 같은데, 막상 쓰려고 하면 쓸데가 없거든. 적절한 곳에 적절하게 잘 썼으면 그걸로 좋은 거지.”
“감사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는 조규민을 보며 황정후가 조금 의미심장한 눈빛을 했다.
‘볼 때마다 비상하단 말이야.’
조규민에게서 천재적인 번뜩임을 느낀 적은 많지 않다. 하지만 조규민은 무슨 일을 맡겨도 안정적으로 상황을 해결한다. 상황을 뒤집고 반전시키는 일은 그리 없지만, 안정적으로 그 상황마다의 최선만을 밟아간다.
적절히 리스크를 감수할 줄도 알고 말이다.
‘경영자로서는 이 이상이 없을지도 모르지.’
한창 도전해야 하던 시기의 재경이라면 이런 타입은 써먹을 수 없겠지만, 지금의 재경에 가장 필요한 이는 조규민일지도 몰랐다.
“경영 수업 한 번 받아볼 생각 있나?”
“경영이요?”
조규민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갑자기 웬 경영입니까?”
“아무래도 나도 이제 나이가 있잖아.”
황정후가 씁쓸하게 말했다.
“나이가 들다 보니 나중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어. 요즘은 전문 경영인을 쓰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나는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영 탐탁지 않아. 그 사람들은 경영을 하다가 실적이 나빠지면 떠나 버리면 그만이잖아. 회사를 자신의 분신같이 생각하고 일해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강진호 씨는…….”
“그놈은 틀렸어.”
황정후가 답답하다는 듯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조규민이 재빨리 황정후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그놈이 뭐하러 재경을 이어받겠는가? 제 돈 있겠다, 제 권력 있겠다, 게다가 이제는 영향력으로 따지면 내가 그놈에게 가서 빌어야 할 판이 아니냐.”
조규민은 고소를 머금었다.
예전부터 황정후는 강진호를 재경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꾸준히 해왔지만, 딱히 좋은 결과를 보지 못했다. 무엇보다 강진호가 이쪽으로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믿을 만한 경영자가 필요해. 내가 보기에는 네 녀석이 조금만 배우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떠냐?”
“말씀은 정말 감사합니다만…….”
“에잉.”
황정후는 조규민의 뒷말을 듣지도 않고 역정을 냈다.
“그래, 이놈아. 안 할 줄 알고 있었다. 강진호가 그렇게 좋으냐? 재경의 사장 자리도 마다할 만큼?”
“재경의 사장 자리는 정말 탐이 나는 자리입니다. 솔직히 제 인생에서 그런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을 정도로 벅찬 자리이기도 하죠.”
“그런데?”
“다만…….”
조규민이 살짝 머리를 긁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재미있을 것 같지는 않네요.”
“망할 놈들.”
황정후가 깊게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고는 거칠게 뱉어냈다.
“참나, 오래 살아볼 일이지. 이 재경의 사장 자리가 동네 노점상 주인 자리도 아니고…… 이놈이고, 저놈이고 안 하겠다고 안달이니.”
조규민이 빙그레 웃었다.
생각해 보면 웃긴 상황이긴 하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을 물려준다는데도 싫다니. 강진호도 그렇고, 자신도 그렇고…… 제정신은 아니었다.
“아드님들은 어떻습니까?”
“말도 꺼내지 마.”
황정후가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비벼 껐다.
“뭔 말만 하면 내 탓이라고 언성을 높이는데, 내가 아주 환장하겠어. 강진호가 아니었으면 그놈들에게 손도 내밀지 않았을 텐데, 기껏 생각해서 한 번 굽혀줬거늘,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조규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릿속에 강진호의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생각을 해보니 딱히 그들이 잘못한 게 없던 것 같다는 그 말이.
‘뭐, 입 밖으로 낼 말은 아니지만.’
때로는 진실도 장소와 상대를 가려야 하는 법이다. 지금 황정후에게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불에다 기름을 끼얹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관계는 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없어.”
황정후가 손을 내저었다.
“자식 이기는 아비가 없다는 것도 옛말이야.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내가 왜 져줘야 한다는 거야. 내가 그놈들을 다시 받아들이고 하는 것도 그놈들이 먼저 반성을 했을 때의 일이지. 이번에 다시 보니 반성은커녕 독기만 키웠더구만!”
“…….”
“그리고 현실적으로…….”
황정후가 조금 맥이 풀린 듯이 말했다.
“큰놈은 독기가 너무 찼어. 누구 잘못이든 경영을 하는 놈은 그런 식으로 남을 원망해서는 안 돼. 원망이나 증오 같은 것은 사람의 눈을 흐리거든. 그래서 안 돼.”
“두 분이 더 있잖습니까.”
“둘째 놈은 맥아리가 너무 없어졌어. 예전에는 자신감이 철철 넘치던 놈이었는데. 셋째는…… 셋째는 안 돼. 예전부터 형들에게 휘둘리기만 하던 놈이야. 그놈이 그룹을 이어받으면 수렴청정받는 허수아비 꼴이 되겠지. 그럴 바에야 형들에게 주는 게 나아.”
조규민은 살짝 감탄한 눈으로 황정후를 바라보았다.
자식들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상황이지만, 황정후는 단순히 감정적인 면에 머무르지 않고 자식들을 경영자로서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 말인즉, 아무리 감정이 나쁘다고 해도 자식들 중 하나가 적임자로 보였다면, 그룹을 물려줄 의향도 있었다는 뜻이 된다.
“사실 그때, 이해가 잘 안 가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감정이 좋지 않다고는 하지만, 회장님께서 화해의 손을 내민다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모르실 분들이 아닌데…….”
“그게 말이네…….”
황정후가 답지 않게 얼굴을 살짝 붉혔다.
“내가 좀 과하기는 했어.”
“예?”
조규민이 놀란 눈으로 황정후를 바라보았다.
이 옹고집쟁이 노인은 결코 자신이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은 정말 큰 잘못을 했다는 뜻이었다.
“대체?”
“……거, 막상 그놈들을 불러서 화해를 하자고 하니, 내가 잘못했다고 비는 꼴이 되는 것 같았단 말이야. 기분이 좀 그렇더라고. 그놈들이 보기에는 내가 늙고 외로워지니 저들을 찾는다고 생각했을 것 아닌가.”
‘딱히 다르지 않잖습니까.’
마음속에서 뭔가 외침이 들려왔지만, 조규민은 말을 꾹 눌렀다.
이건 사회생활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다 한다면 목이 잘리지 않을 직장인이 어디 있는가.
“그러실 만하죠.”
“그래서 놈들 앞에서 내가 유언장을 보여줬거든.”
“유, 유언장이요?”
“음, 방금 작성했는데. 네놈들에게 물려줄 건 하나도 없으니, 유산에는 눈독 들이지 마라. 대신에 일을 하고 싶다면 재경에서 일을 하게 해주겠다고 했지.”
“거…….”
조규민의 입술이 달싹이기 시작했다.
말하고 싶다.
말하고 싶다아!
‘적당히 좀 하시지 그러셨어요!’
재회하는 자리에서 그런 취급을 받으면 누가 기분이 좋겠는가. 당일 흥분해서 소리치던 큰아들의 심정이 절절이 이해가 가는 조규민이었다.
“고얀 놈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아비한테!”
조규민은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틀렸다. 이 사람은 틀렸어.
이 사람은 회사를 운영하는 것 말고는 인간관계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말해.”
“그런데 자제분들꼐 그 유산이 가지 않으면, 유산은 다 어디로 갑니까? 사회에 환원하십니까?”
“멍청한 소리. 이 그룹을 재단이나 정부에 주면 갈기갈기 찢어 먹으려 들 거야. 앞으로 창출할 수 있는 수많은 돈에는 관심도 없이 당장 배를 불리려고 하겠지. 내가 그런 꼴을 볼 것 같은가?”
“그럼?”
황정후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누굴 것 같은가?”
“……설마?”
황정후가 키득대며 웃기 시작했다.
“경영을 하기 싫으면 제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 제 것이 되면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겠나?”
“…….”
조규민이 고개를 돌려 먼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기도 글렀어.’
이제 확신할 수 있다.
황정후도 정상은 아니었다.
* * *
“안녕하세요?”
최연하가 화사하게 웃으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강유환은 환한 미소로 최연하를 맞았고, 강진호는 조금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표정이 왜 그래요?”
“말도 없이 여긴 웬일입니까?”
“카페에 커피 먹으러 오는데, 말을 하고 와야 해요?”
“…….”
말문이 막힌 강진호가 뭔가 항변할 말을 찾으려고 할 때, 강유환이 빙그레 웃으며 최연하의 말을 받았다.
“물론 이유는 필요 없죠. 사장인 제가 하는 말이니 틀림없을 겁니다.”
“네. 저도 잘생긴 사장님 뵈러 온 거예요. 저기 궁상맞게 앉아 있으신 분에게는 별 관심 없거든요.”
“아주 눈이 정확하시군요. 물론 아메리카노?”
“따뜻한 걸로요.”
“진호야, 커피 타라.”
“예?”
“타라고.”
“……예.”
강진호가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메이커로 걸어갔다. 등 뒤에서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르바이트가 커피 내려도 되나요? 못 믿겠는데?”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고, 융통성도 없는 놈이지만, 어울리지 않게 커피는 좀 내릴 줄 압니다. 유일한 능력이죠.”
“아버님께서 잘 가르쳐 줘서 그런 거죠.”
“하하하, 물론 그렇죠.”
강진호가 한숨을 쉬며 커피를 내렸다.
내 쉴 곳은 어디인가.
세상이 이리도 넓건만, 편히 쉴 곳 하나 없구나.
커피 세 잔을 내려 테이블로 돌아가자 강유환과 최연하가 어느새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들놈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에이, 거짓말이시죠? 그럴 사람 아닌 거 아는데.”
“말이라는 게 꼭 입으로 해야 하는 게 아니죠. 저놈이 난데없이 소파에 앉아서 뭔가 생각하며 히죽이고 있다거나, 밖에 나갈 때 거울을 자주 본다든가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아니겠습니까?”
“어머? 진짜요?”
그런 적 없어요.
그런 적 없다구요, 아버지.
강진호는 억울하기 짝이 없지만, 귀찮은 듯 그를 바라보는 강유환의 시선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강진호가 아무리 강하고 아무리 능력을 키운다고 해도 부모는 평생 이길 수 없는 법이다.
“커피 맛있네요.”
“몇 안 되는 재주 중 하나죠.”
“아버님께 물려받은 재능이겠죠. 그래도 저는 아버님이 내려주시는 커피가 더 맛있어요.”
“하하하, 그래봐야 카피본인데, 원본만 하겠습니까?”
순식간에 열화판이 되어버린 강진호가 뜨거운 커피를 단숨에 들이켜고는 말했다.
“여기는 어쩐 일로?”
태연히 커피를 마시러 왔다고 대답할 것 같던 최연하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강유환에게 말했다.
“아드님 좀 빌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잘 쓰시고 제자리에만 가져다 두십시오.”
“확실하게 반납할게요.”
“네.”
최연하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들었죠? 나가요.”
갑자기 심각하게 불안해지는 강진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