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434
#433.
대면하다 (3)
꾸우욱.
일본도를 닦아내던 사이토의 손에 과도한 힘이 들어가며 도신이 부르르 떨렸다.
“협조할 기미가 없다?”
“송구스럽지만…… 그렇습니다.”
“이유는?”
“그것이…….”
오이즈미가 이마에 흐른 식은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반도에서 변화가 벌어지고 있는 것은 확실히 무시하지 못할 사항이지만, 묵은 원을 걷어내고 손을 잡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합니다.”
“있을 수 없다?”
“반도라는 땅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처리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 일단은 본토 내의 결착을 보는 것이 먼저라는 의미 같습니다.”
“모두 그렇다는 말인가?”
“두엇 정도 동조하는 곳도 있지만, 대세가 그렇습니다.”
“멍청한 놈들.”
사이토가 일본도를 닦던 삼베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저들 목구멍에 칼이 들이밀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다는 건가? 지금의 반도는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걸 왜 모른다는 말이냐!”
“송구합니다.”
그 자신이 사과할 일은 아니지만, 오이즈미는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빌어먹을.”
사이토가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
‘과도한 무시가 조선에 대한 껄끄러움의 반증이라는 것을 왜 인정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세계에서 가장 한국을 무시하는 나라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일본이다. 이제는 객관적으로 일본을 뛰어넘은 중국조차 한국을 일본만큼 무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무시의 바탕에는 일본이 정체되어 있는 동안 한국이 빠른 속도로 따라잡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껄끄러움이 깔려 있었다.
무시라는 것은 상대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하나 일본은 한국을 관음에 가까울 정도로 의식하고 있지 않은가.
무인계는 다르다.
겉으로 드러난 세계의 격차는 빠른 속도로 따라잡히고 있지만, 일본의 무인계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한국에게 위협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
고려 시대 이후로 일본의 무인계는 한국의 무인계를 압도했고,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주도권을 내어준 적이 없었다.
딱히 위협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큰 격차가 벌어져 있던 것이다.
“언제까지 그게 유지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한 번 벌어진 차이가 영원히 지속될 리가 없었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과거에는 조선에서 신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이 거꾸로 조선을 압도해 나가기 시작했지만, 이제는 거꾸로 그 격차를 따라잡히듯이 지리멸렬해 있는 한국의 무인계라고 해서 영원히 그 상황을 유지할 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변화의 싹이 발아했다.
강진호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싹이 돋아 나무가 되어버린 후에는 벌목을 해야 한단 말이다. 지금이라면 손쉽게 싹을 뽑아버릴 수 있는데! 그깟 원한 따위 때문에 이런 위기를 좌시하겠다는 것인가!”
“하나…….”
오이즈미가 눈가를 살짝 비볐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선 놈들이 뭉칠 것을 우려하시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만, 그 일이 본토의 모든 협사들이 뭉쳐야 할 만큼 큰일이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놈!”
“그 작은 위기로 뭉치기에는 서로 간에 골이 깊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더더욱 뭉쳐야 하는 것이다.”
“예?”
“너는 다른 구미들을 믿고 전력을 한국으로 뺄 수 있겠느냐?”
“…….”
오이즈미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강진호 하나를 제거하기 위해서 일본의 구미들이 협력을 해야 한다는 말은 납득하기 힘든 소리였다. 강진호에게 그 정도의 힘이 있다면 이미 싹이라고 불릴 수 없을 테니까.
‘굉장히 미묘하군.’
한 개 구미의 정예를 모조리 동원한다면 한국이라는 땅을 한 달 내로 초토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사이 다른 구미들이 나나호시 구미의 영역을 그대로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쌓여 있는 불신이 그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협조는 바라지도 않는다. 적어도 휴전이라도 해줘야 하는데, 그것조차 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사이토가 미간을 찌푸렸다.
“과도하게 과격했지. 그리고 빨랐다. 마치 이쪽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아직 어리고 세상을 몰라서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설마 여기까지 읽은 것인가?”
“그건 너무 과도한 평가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
사이토가 묵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착각을 하는 것이지. 한국의 무인계가 그 수준이 떨어진다고 해서 그 지략마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비슷한 수준의 이들이 서로 맞붙었는데 너무 일방적인 결과가 나왔다는 것은 두 가지 중 하나지. 한쪽이 일방적으로 변수를 가졌다는 것. 그 변수가 무력일 수도 있지만, 지력일 수도 있다. 강진호라는 놈의 이미지를 우리가 너무 평이하게 가져간 것일 수도 있어. 돌이켜 보면 놈은 무서운 놈이다. 내가 한국에 있었다고 해도 강진호처럼 쉽게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는 없었을 거야.”
“하나…….”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실패의 지름길이다.”
오이즈미는 할 말을 목구멍으로 꿀꺽 넘겼다. 사이토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거기에 토를 다는 것은 옳지 못했다. 납득이 간 것은 아니지만, 납득하기 전에 따르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무사도였다.
“다들 답답하기 이를 데가 없군. 한국이라는 땅이 얼마나 넓은지 모르는 건가. 좁아터진 본토를 수십의 구미가 갈라먹고 있는 와중에 한국이라는…….”
말을 하던 사이토가 입을 다물었다.
한참을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사이토라 홀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고정관념이라는 게 이렇게나 무서운 것이었군. 스스로도 같은 짓을 하고 있는 와중에 남 탓만 하고 있지 않았는가.”
뭔가 깨달은 얼굴로 사이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슌스케!”
“예!”
“회의를 소집해라.”
“예?”
“구미 단독으로 조선을 친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총장!”
오이즈미가 기겁을 해서 소리쳤다.
“한국으로 이 이상 전력을 빼버리면 영역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이미 회합의 결과로 우리가 언제 한국으로 전력을 돌릴지 주시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이 이상 전력을 돌리게 된다면 남겨진 이들이 이리 떼 사이로 던져진 양처럼 물어뜯기게 될 겁니다. 부디 현실을…….”
“상관없다.”
사이토가 깔끔하게 오이즈미의 말을 끊었다.
“예?”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오이즈미가 불안한 눈으로 사이토를 바라보았다. 언제고 명확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던 사이토가 어째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말인가.
“너도 나도…… 모두가 눈이 멀어 있던 게지. 다른 놈들을 탓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멍청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중국은 서로를 견제하느라 움직이지 못한다. 우리는 움직일 수 있지만, 뒤통수가 간지러워 움직이지 못하지. 거기에 우리의 영토마저 비어버리게 된다면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벌어질 것이고, 더더욱 움직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이토가 가만히 입술을 핥았다.
“조선 땅은 그 와중에는 누구의 침략도 받지 않는다는 뜻이 되겠지. 무주공산인 그 땅이 말이야.”
오이즈미가 눈을 크게 떴다.
“좁아터진 영역에 집착할 필요가 없던 게지. 저기에 저리 기름진 땅이 있지 않은가. 적당한 시기다. 좋은 시기다. 지금 조원들을 이끌고 넘어간다면 한국이라는 땅을 우리 나나호시 구미의 영토로 만들 수 있다.”
오이즈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이토가 하고 있는 말이 너무도 파격적이고 엄청나서 머릿속으로 순간 정리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전혀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야.’
실리적으로 볼 때는 현 하나도 차지하지 못하는 작은 영역에 만족하느니, 드넓은 한국 땅을 노리는 것이 이득이 컸다.
“하나 본토를 버린다는 것은…….”
“바보 놈! 언제부터 우리가 이 작은 땅에 집착했다는 말인가. 선조들께서도 저 드넓은 중원 땅을 원하지 않으셨던가. 반도는 우리가 중원을 도모하기 위해 반드시 차지해야 하는 땅이다. 대동아 공영권의 원대한 꿈을 잊지는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사이토가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무인계였지.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회의를 준비해라. 조선을 칠 것이다.”
“알겠습니다.”
다급히 밖으로 나가는 오이즈미를 보며 사이토가 입술을 핥았다.
‘길이 보이는군.’
당장은 힘들지 모르겠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반도의 무인계를 장악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단숨에 전력을 확충시킬 수 있을 것이다. 본토 내의 다른 구미들이 이전투구로 그 전력을 소모할 때 견제조차 받지 않고 전력을 키워 나갈 수 있을 테니까.
“머리를 너무 굴렸어.”
사이토가 큭큭대며 웃었다.
강진호는 혼란스러운 일본이나 중국이 결코 자신을 치지 못할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하나 사이토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게 그의 불행이었다.
“곧 만나게 될 거야. 그럼 그 실수를 통감하게 되겠지.”
사이토가 다시 자리에 앉아 바닥에 떨어진 삼베를 주워 들고 일본도를 천천히 닦기 시작했다.
“기다려지는걸?”
그 얼굴이 일그러질 때가 말이야.
* * *
“일본이요?”
“예.”
방진훈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전에 이중걸 이사와 얽혔을 때, 일본 놈들과 원한을 맺지 않으셨습니까?”
강진호가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이야 막아서니 잡아 죽인 것뿐이지만, 원한을 맺었다는 건 사실이다. 원한이라는 건 전후 과정을 생각하고 고려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니까. 내가 기분이 나쁘면 생기는 게 원한인 것이다.
전후 사정을 고려하면 한국인들끼리의 암투에 끼어들어 앞을 막아선 놈들이 잘못되었다고 확신하는 강진호였지만 말이다.
“거기다가 저번에도 한 번 거사를 치르셨죠.”
“거사요?”
“거하게 잡아 죽이셨잖아요.”
“음…….”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말이 좀 뭐랄까, 강진호가 과하게 일을 치렀다는 어감이 팍팍 묻어나고는 있지만, 굳이 그런 사실을 정정해 줄 필요는 없겠지.
“그러니 그놈들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런가요?”
“확신합니다.”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말씀해 주시죠.”
“예?”
“계획이 있으시죠?”
강진호가 멀뚱한 눈으로 방진훈을 바라보았다. 방진훈이 그 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의 행보를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강진호 씨는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는 것 같아도 반드시 다음 일을 생각하고 계시더군요. 일본 놈들 역시 마찬가지였겠죠. 그렇게까지 할 것 없는 일이었는데 그토록 잔인하게 놈들을 모두 죽였다는 것은 일부러 일본을 도발한 것 아니었습니까? 슬슬 그놈들의 반응이 돌아올 때가 됐습니다. 아니, 지났죠. 그러니 이제는 제게도 무슨 계획이신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알아야 대처가 쉬울 겁니다.”
방진훈의 확신에 찬 말을 들은 강진호가 눈을 살짝 크게 뜨고 말했다.
“그런 거 없는데요.”
“네?”
“그런 거 없다구요.”
“…….”
방진훈이 턱을 덜덜 떨며 물었다.
“그, 그럼 그때는 왜 그렇게 과격하게?”
“기분 나빠서요.”
“…….”
“…….”
“끝?”
“네.”
방진훈이 빙그레 웃었다.
‘이 인간, 정말 대책이 없구나.’
그리고 그런 강진호를 믿은 그도 대책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