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462
#461.
배웅하다 (1)
“용케 왔네요?”
참 고질병이다 싶다.
말을 하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한숨부터 나온다.
‘나는 언제쯤이나 솔직해질 수 있을까?’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달라지는 이 고질병을 어떻게 해야 할 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최연하는 겁을 먹지 않았다.
이해해 줄 테니까.
건너편에 서 있는 저 남자는 자신의 가시 돋친 말에도 웃어줄 수 있는 남자였다. 이상한 데서 쪼잔하고 소심해서 결코 마음이 넓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넓은…… 모순 가득한 사람이었다.
문자 하나 보내지 않아서 사람을 애닳게 만들어놓고,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공항에 나타나는…… 그런 사람.
무심한 듯하면서 세심한,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그런 사람.
최연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선수야, 이 남자.’
본인이 전혀 그런 의도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이 남자는 그럴 깜냥이 안 된다. 여자의 마음을 잘 모르니까. 그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뿐인데, 그게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조금 늦었네요.”
“뭐예요, 연락도 없이.”
목소리가 퉁명스레 나간다.
혹시라도 이 목소리에 강진호가 당황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그럼에도 부드러운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짜증이 동시에 치밀어 오른다.
“가신다고 해서요.”
하지만 강진호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가볍게 웃었다.
그 미소가 눈에 박힌다.
“그래도 얼굴은 보고 나서 보내야 할 것 같아서요. 중국이면 그래도 멀리 가시는 거고, 육 개월이나 있다가 오시는 거면 꽤나 오래 못 볼 것 같으니까.”
“……우리가 딱히 자주 봐야 하는 관계는 아니잖아요.”
“음, 그것도 그러네요.”
최연하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것도 병이다.
기껏 시간 내서 찾아와 준 사람인데, 속으로는 와줘서 너무 고맙다고 생각하면서도 왜 이렇게밖에 말하지 못하는 걸까?
최연하의 자존심을 걸고 반드시 꼬시겠다고 그만큼이나 다짐을 했는데 말이다.
‘뭘 좋다고 웃어? 바보같이.’
이게 더 문제다.
굳이 시간을 내서 찾아와 무안을 당한 상황이라면, 최연하는 화를 내고 돌아가 버렸을 것이다. 그 사람이 누구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강진호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왜 자꾸 웃어요?”
“그냥 웃음이 나서요.”
“진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최연하를 보며 한은솔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천적은 천적이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강진호에게는 최연하의 강짜가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덕분에 화를 내고 짜증을 부려도 최연하만 말려 들어간다.
그와는 다르게 말이다.
‘좋아하는 티라도 적당히 내지.’
시간이 늦어져서 스탭들을 먼저 보낸 게 다행이었다. 물론 최연하의 저기압 상태를 파악한 스탭들이 먼저 최연하와 떨어지고 싶어 한 결과이지만 말이다.
“안 바빠요?”
“요즘은 바쁠 게 없어요.”
“남자가 좀 바쁜 맛도 있어야지.”
“그러게요. 그래서 뭘 좀 해보려고 하는데, 아직은 시작 단계라…….”
“……그럼 이제 바빠지겠네요?”
“아마도요.”
최연하가 안심했다는 듯이 살짝 웃었다.
“그럼 한눈팔 일은 없겠네.”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은솔아, 준비해. 이제 들어가야지.”
“예, 누나.”
후련해진 듯한 최연하의 모습을 보며 한은솔이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한은솔이 캐리어를 정리하는 모습을 확인한 최연하가 다시 강진호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막상 강진호를 보니 머리가 하얗게 탈색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뭔가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할 말을 찾아낼 수 없었다. 애써 할 말을 만들어내도 그 말이 또 가시 돋쳐 나갈까 봐 겁도 났다.
그녀는 애가 아니다.
투정을 부리고 짜증을 부려도 이해받을 수 있는 것은 아이들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계속 이런 식으로 틱틱대다 보면 강진호도 언젠가는 그녀에게 짜증이 날 것이다.
아니, 이미 짜증이 나 있고, 참아주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 호의를 권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최연하가 심호흡을 하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강진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최연하를 바라보았다.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네?”
“와줄 줄은 몰랐어요. 일부러 시간 내서 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강진호는 이 사람이 뭘 잘못 먹었나 싶은 표정으로 최연하를 쳐다보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카메라가 찍고 있어요?”
“야, 이! 썅!”
“…….”
순간, 빡이 돌아 소리를 질러 버린 최연하가 당황하여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그녀가 누군지 알아챈 사람은 없는 듯했다.
‘큰일 날 뻔했네.’
당혹이 가라앉자 열불이 치솟아 올랐다.
“사람이 간만에 정상적으로 좀 해보려고 하는데!”
“어색하고 이상해서…….”
“내가 정상적인 게 어색하고 이상하다는 거예요?”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만.”
안 돼.
이 인간과 남들처럼 부드럽고 무난하게 대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열불 긁으려고 왔네, 열불 긁으려고! 굳이 이렇게 안 해도 가서 열심히 할 거니까, 일부러 사람 열 받게 할 필요 없거든요?”
“딱히 그럴 의도는 없었습니다.”
“아아…….”
최연하가 얼굴을 감쌌다.
‘내 주제에 무슨.’
나름 영화에서처럼 공항에서 헤어지는 로맨틱한 장면을 생각했건만, 그녀의 인생에 그런 아름다운 순간이 올 리가 없었다.
최연하는 되레 홀가분한 기분이 됐다.
‘오히려 이게 나아.’
마음에 짐이 덜어지자 개운한 얼굴이 될 수 있었다. 그녀와 강진호는 아직 뭔가 이뤄진 사이가 아니다. 그런데 벌써 공항에서 비련의 여주인공인 듯 이별 장면을 찍기에는 이르다.
‘오그라드니까.’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나니까 개운해졌다.
“강진호 씨.”
“네?”
“나 보고 싶어서 왔어요?”
“…….”
당황하는 강진호를 보며 최연하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래, 지금은 이게 맞다. 지금은.
“그렇게 당황할 것 없어요. 농담이니까.”
“네.”
그녀가 중국으로 가는 이유는 조금 더 당당해지고 싶어서다. 그러면 지금은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해도 되레 그녀가 밀어내야 한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그녀 스스로가 이 남자 앞에 당당해질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럼 다녀올게요.”
“네. 고생하세요.”
“이거저거 하는 건 좋은데, 어디 다른 년들한테 눈길 주지 말아요. 괜히 눈만 마주쳐도 난리 칠 것들 많으니까.”
“…….”
이 정도면 됐다.
상큼한 미소를 짓고 몸을 돌리려는 최연하를 강진호가 만류했다.
“네?”
“중국 처음 가보죠?”
“그, 그렇죠?”
“음식이 입에 잘 안 맞을 수 있으니 조심해요.”
“…….”
“물도 다르고, 환경이 완전히 바뀌면 몸이 허약해질 수 있으니 약 챙겨 먹구요.”
최연하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뭐야, 이 남자? 안 어울리게…….
“그럼 나중에 뵙죠.”
“그럼.”
최연하가 몸을 돌리려다가 멈칫했다.
“잠깐.”
“네?”
“내가 지금 이상한 걸 느꼈는데, 그 ‘중국 처음 가보죠?’에서 미묘한 감정을 느낀 것 같은데……. 강진호 씨, 중국 간 적 있어요?”
많지.
중국에서 살았는데.
하지만 지금 최연하가 묻는 것은 그게 아니니까.
“전에 한 번 다녀온 적 있습니다. 보름 정도였죠.”
“뭐야, 그럼? 비자랑 다 있겠네?”
“아마도?”
“놀러 와요.”
“……네?”
“어차피 여행 왔었다면서? 한 번 여행 온 데면 두 번 못 올 것도 없잖아요. 나 중국 가면 말도 안 통하고 놀 사람도 없어서 심심하니까, 날 잡아서 한 번 오라구요.”
“…….”
“싫어요?”
“아, 아뇨. 싫다는 건 아니고…….”
“그럼 오는 거예요. 알았죠?”
강진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여기서 싫다고 하면 죽빵이 날아올 기세였다.
“후…….”
심호흡을 한 최연하가 고개를 번쩍 들고는 강진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왜, 왜 그러시…….”
“조용히 해요.”
“네.”
포스에 눌린 강진호가 입을 다물었다. 웬만해서는 다른 사람의 기세에 눌리지 않는 강진호이지만, 지금 최연하는 너무 진지했다.
“이건 큰 결심을 하고 중국까지 가는 나한테 주는 상이고, 또 각오예요.”
“네?”
그 순간, 최연하가 강진호에게 달려들어 와락 껴안았다. 거의 매달리듯이 말이다. 피할 수는 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이해한 강진호도 손을 들어 떨어지지 않게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말없이 강진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최연하가 두어 번 숨을 내쉬더니, 강진호의 가슴을 쭉 밀어냈다.
“갈게요.”
“……잘 다녀오세요.”
“그럼.”
해맑게 웃으며 최연하가 보안 검색대를 향해 당당히 걸어가자, 한은솔이 다급하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강진호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낮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미쳤나 봐.”
“…….”
“진짜 미쳤나 봐. 나 미쳤나 봐. 진짜.”
“……진정해요, 누나.”
“아오오.”
잘 삶아낸 문어처럼 얼굴이 새빨개진 최연하가 그 자리에서 흐물흐물 무너지며 주저앉았다.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지만, 그런 사실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최연하가 얼굴을 감쌌다.
“미친년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럼 왜 그랬어요.”
“야! 그게 생각하고 하는 거냐? 정신 들어보니 이미 안겨 있는데, 나보고 뭘 어쩌라고?”
“진짜 벨도 없다, 진짜.”
“뭐, 인마? 죽을래?”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최연하를 보며 한은솔이 고개를 내저었다.
‘앞과 뒤에서 좀 비슷하게 행동해 주면 맞추기도 편할 텐데.’
하기야 그게 되면 최연하가 아니지. 이게 최연하의 매력 아니겠는가.
“가요, 누나. 너무 늦었어요.”
“나 다리에 힘이 풀려서 못 일어나겠어.”
“업어줄까요?”
“꺼져 줄래? 어디 외간 남자가 손을 대려고 해? 고소할 거야.”
한은솔이 피식 웃고는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누나의 동생이자, 최고의 매니저로서 손 정도는 잡을 수 있겠죠.”
“흥.”
최연하가 한은솔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휴, 정신 하나도 없네. 비행기 타면 다시 생각이 나겠지. 몇 시간은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하는데……. 은솔아, 미리 이야기해서 이불 한 채 챙겨라. 가는 내내 차고 가야겠다.”
“예이, 여부가 있겠습니까.”
캐리어를 밀어 검색대로 향하는 최연하를 보며 한은솔이 살짝 생각에 잠겨 들었다.
‘손이라…….’
안을 수 있는 강진호와 자신의 몸에 손을 대서는 안 되는 외간 남자. 그 둘 사이의 미묘한 경계선이 바로 한은솔이 서 있는 곳이었다.
얼굴이 빨개지긴 했지만 결코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아니, 기분이 엄청 좋아진 최연하다. 누구도 풀지 못한 그녀의 기분을 강진호는 그 짧은 시간 만에 풀어버린 것이다.
‘그걸로 된 거지.’
고개를 돌려 강진호가 있을 만한 곳을 바라본 한은솔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걸로 말이야.”
“너 빨리 안 와, 인마?”
“지, 지금 갑니다!”
짐을 꾸역꾸역 짊어진 한은솔이 안쪽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수화물로 붙이라니까 뭘 이리 들고 다녀요?”
“그게 얼마짜리인지나 알아? 수화물로 넣었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너는 서해 바다에 다이빙하는 거야.”
“에이, 진짜 성격 더럽네.”
“뭐, 인마?”
티격태격하면서 검색대로 들어서는 두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