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464
#463.
배웅하다 (3)
“흐음흠~ 흠.”
기묘한 콧노래를 부르는 최연하를 보며 한은솔이 인상을 썼다.
“누나.”
“응?”
“기분이 좋은 건 아는데, 그 콧노래 좀 자제해 주면 안 돼요?”
“왜? 어차피 우리밖에 없잖아.”
텅텅 비어버린 퍼스트 클래스를 둘러보며 최연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승객이 하나라도 있다면 조심해야겠지만, 그들밖에 없는데 뭘 조심하라는 말인가.
“제가 듣기 싫거든요.”
“뭐, 인마?”
최연하가 눈을 부릅떴다.
“쯧.”
한은솔이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누나는 자각을 좀 할 필요가 있어요. 누나는 좋다고 콧노래 부르는 거지만, 듣는 사람은 고역이거든요. 어떻게 콧노래를 불러도 음정 박자가 하나도 안 맞아요?”
“남이사! 그리고 나, 가수 데뷔도 할 뻔했거든?”
“오죽하면 그 끔찍한 아이돌 애들도 천상의 목소리로 만들어주는 전문가가 누나는 안 되겠다고 포기를 했겠어요.”
“야, 너 내려.”
“비행긴데 어떻게 내려요.”
“알아서 내려, 인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한은솔이 격렬하게 저항하자 최연하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오늘 기분이 좋으니까 한 번 봐주는 거야. 적당히 까불어라.”
“네, 네. 알아 모십죠.”
한은솔은 슬쩍 최연하의 눈치를 보았다. 이렇게 찔러 들어갔음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의자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참을 수 없어서 슬쩍슬쩍 올라갔다 내려가는 입꼬리가 지금 그녀의 기분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진짜 기분 좋은가 보네.’
그거 잠깐 봤다고 사람의 기분이란 게 이리 휙휙 바뀌어도 되는 건가 싶은 회의가 들지만…… 뭐, 어쩌겠는가. 최연하는 원래 그런 사람인데.
“그런데 왜 너만 여기 타?”
“네?”
“다른 스탭들은 다 뒤에 탔는데, 왜 너 혼자만 퍼스트 클래스 타냐고? 저 사람들도 퍼스트로 옮기든가 해야지. 사람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사장님이 이러랬어?”
“……누나.”
“뭐.”
“스탭 비행기 표까지 전부 제작사에서 지원해 준 거예요.”
“제작사가?”
“네. 스케일이 남다르더라구요.”
“그럼 그쪽이 퍼스트를 달랑 두 장 보낸 거야? 그렇다고 해도 니가 타면 안 되지. 너보다 나이 많은 사람도 있잖아.”
“아뇨. 전 스탭 퍼스트 클래스였어요.”
“응? 그런데 왜 비즈니스 타셨대?”
“……누나랑 같이 앉는 퍼스트보다는 마음 편한 비즈니스가 낫다는 거죠.”
“…….”
최연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게 누나의 평가예요. 그러니까 평소에…….”
“야, 나 배고프니까 라면 달라고 해.”
“…….”
“땅콩 까 달라고 하고.”
“네.”
한은솔이 말없이 손을 들어 스튜어디스를 부르자 최연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정말 가는구나.’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무리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이라지만, 평생 살던 땅을 떠나서 해외로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 떠나기 전에는 예상도 하지 못한 온갖 일들이 그녀를 괴롭힐 것이다.
“뭐, 각오한 바니까.”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이 뭐가 있겠는가.
얻고 싶은 것이 있다면 감수해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그게 성공이든 남자든 말이다.
최연하는 상쾌한 마음으로 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보이는 것은 바다밖에 없다. 떠나온 땅에 남겨져 있을 사람을 생각하며 그녀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너, 딱 기다려.’
곧 지금보다 훨씬 더 성공해서 등 뒤에 형광등 백 개 켠 듯한 아우라를 뿜으며 돌아갈 테니까. 그때는…….
“한눈팔면 죽여 버릴 거야, 진짜.”
웅얼거린 최연하가 고개를 돌려 도끼눈을 떴다.
“라면 멀었대?”
* * *
부우우우우웅.
액셀을 밟던 강진호는 느닷없이 느껴지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갑자기 한기가…….’
몸이 안 좋은가?
아니, 강진호가 몸이 안 좋아서 한기를 느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북극곰이 아프리카에서 더위를 타는 격이 아닌가.
고개를 저어 잡념을 떨쳐 버린 강진호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외국인에게는 친절해야지.’
그게 비록 평범한 이들은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딱 봐도 수상하게 생긴 놈들이 그에게 길을 물어왔을 때의 황당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대체 뭘 어떻게 해줘야 하나를 고민했지만, 일단은 순순히 원하는 대로 따라주기로 했다. 한국에 무슨 목적으로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사고를 친 것은 아니니까.
‘엘레나라고 했나?’
강진호의 머릿속에 엘레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쪽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기질이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과거 중원에 있을 당시에 한 문파에서 같은 무학을 배운 이들은 모습과 복장이 달라도 알아볼 수 있었다. 기운의 기질이라고 설명하면 조금 난해하겠지만, 무인들만이 구분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으니까.
엘레나와 저들이 딱 그랬다.
문파가 같은 것인지, 그게 아니면 서양인의 무학이 대동소이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비슷한 기질이 느껴졌다.
“날 잡으러 온 건가?”
강진호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한국에 저만한 이들이 들어온다는 건 분명 무언가 노리는 게 있을 것이다. 저 많은 무인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한 번에 움직일 리는 없다. 관광 온 것도 아닐 테고…….
그럼 강진호와 연관이 있어야 하는데…….
“아니겠지.”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설마 자신을 노리고 온 이들이 저리 멍청하게 그를 그냥 보내주겠는가. 아무리 허술한 집단이라고 해도 그리 멍청하지는 않을 것이다.
‘방진훈 씨에게 언질을 해둬야겠네.’
훈련을 시작하기 전에 방진훈을 한 번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강진호가 액셀을 꾹 밟았다.
* * *
‘거의 뭐, 패잔병의 모임이군.’
이명환은 뚱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여기에 모인 이들은 그 끔찍한 강진호의 시험을 통과한 이들이다. 몸이 아작나고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강해질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는 각오를 다진 이들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가 뭐가 됐든 그런 상황에서 그 말을 꺼낼 수 있는 놈들이 보통 놈들일 리 없다. 나름 독하다고 모인 놈들 중에서 제대로 독한 놈들만 모은 독기의 엑기스 같은 놈들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참 대단한 놈들의 모임이어야 하는데, 지금 이명환에 눈에 보이는 광경은 전혀 그런 이들의 모임 같지는 않았다.
전쟁을 하다가 폭격을 처 맞아 장비고 뭐고 다 버린 채 도망치다가 겨우 본대에 구조된 패잔병의 몰골이 딱 이럴 것 같았다.
폭격의 트라우마가 남아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여기저기로 흔들리는 눈이라든가, 가지런히 모은 무릎 사이에서 덜덜 떨리는 손이라든가.
어찌 보면 마약중독자들을 모아놓은 것 같기도 했다.
‘충무로에서 보면 당장 스카웃하자고 하겠군.’
피폐함이라는 단어를 이리 잘 표현할 수 있는 광경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바로 옆으로 포탄이 날아와 동료가 피 곤죽이 되는 꼴을 지켜보는 것과 강진호에게 잡혀가는 것 중 뭐가 더 공포스러운 일이냐 물어본다면 대답이 궁해지니까.
상황과 상황을 정확하게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이명환은 전쟁터에는 나갈 자신이 있어도 두 번 다시 강진호와 둘만 남고 싶지는 않았다. 절대로.
아마 다른 사람이 보면 지금 이명환의 몰골도 저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 한 시간도 제대로 잠들지 못했으니까.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그날의 트라우마 따위가 아니었다. 의외로 그날 그가 겪은 일은 크게 생각이 나지도 않고, 그를 피폐하게 만들지도 못했다.
오는 길에 본 공영길(당연히 탈락한)의 모습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그는 멀쩡한 모습으로 말라 비틀어져 버린 이명환을 보고 깜짝 놀랐으니까.
그를 불면의 세계로 인도한 것은 강진호가 한 일이 아니라 이제부터 강진호와 겪어야 할 일들이었다.
“토할 것 같네, 진짜.”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속이 울렁거린다. 그 강진호를 다시 만나야 한다는 것이 사람을 이렇게나 궁지로 몰아갈 줄은 그도 미처 알지 못했다.
잠을 자려고 누워도 강진호의 얼굴이 떠올랐고, 밥을 먹어도 그 생각이 나서 숟가락이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진짜 정신병 걸리겠네.’
자신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다.
아마 지금 그가 가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라 정신과다. 가서 전문의의 상담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뭐 주워 먹을 것 있다고 여기 와서 어슬렁거리냐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빤히 알고, 그게 얼마나 지옥일지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데, 도망가기는커녕 좋다고 여기까지 제 발로 찾아온 꼴을 보니…… 차마 말로 못할 자괴감이 들었다.
문제는 그런 병신들이 여기에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강당을 반쯤 채우고 있는 병신 친구들을 보면서 이명환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바보들밖에 없다. 정말로.
끼이이이익!
그 순간, 이명환의 귀에 거친 브레이크 소음이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이명환의 전신에 소름이 돋아났다. 저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다른 이들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인간은 정말 고통을 즐기는 생물일지도 모르겠네.’
저리 벌벌 떨면서도 아무도 이곳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이명환이 긴장한 눈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가까운 곳에 차를 댔으니 이제 곧 저기로 강진호가 들어올 것이다. 이곳으로 들어올 그가 무슨 표정일지가 궁금했다.
평소와 같은 모습일까, 아니면…….
벌컥.
그때, 문이 열리고 강진호가 안으로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강당의 분위기가 얼음장이라도 된 것처럼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예전에도 강진호가 표정을 달리하면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저 강진호가 들어왔을 뿐인데 그 이상으로 공기가 차갑게 식고 있었다.
이미 겪어봤으니까.
태연히 걸어 들어오는 저 사람이 얼마나 잔인한지 말이다.
‘그래도 다행이네.’
강진호의 모습은 평소와 별 차이가 없었다. 그 사실이 이명환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다 왔나?”
“예!”
이명환이 자신도 모르게 대답을 하고 말았다.
사실이니까.
조금 전에 한 인원 체크대로라면 강진호가 합격을 준 이들 중 단 하나도 빠지지 않고 모두 여기에 집결했다.
‘제정신인 놈이 하나도 없는 거지.’
절망적인 사실이었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본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진훈 회주의 말대로라면 지하에 수련장이 있다고 하더군. 그쪽에서 훈련을 하라던데, 맞나?”
“예!”
“훈련장을 바꾸지.”
강진호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지하에서 훈련하다가 자칫 건물이라도 날아가면 돈이 꽤 들 테니까. 그런 걸로 잔소리 듣고 싶지는 않거든.”
“…….”
새삼 건물이 날아간다는 말에 딴지를 걸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런 건 사소한 문제니까.
참지 못한 이명환이 손을 들고 말았다.
“저…….”
“말해봐.”
“저희는 이제 뭘 배우게 되는 겁니까?”
“궁금할 것 없어.”
강진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이제 알게 될 테니까.”
이명환의 등골이 서늘해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