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471
#470.
부딪히다 (5)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당장 그만두는 게 좋을 거예요.”
뱅상은 아침부터 자신을 찾아온 이 당돌한 여자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폰 엘레나의 접견을 허락했던가?”
“저는 원탁에서 정식으로 파견된 한국의 정보원이에요. 당연히 접견권이 있죠.”
“그럼 내가 지금 원탁의 정당한 명령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텐데? 대체 언제부터 정보원이 원탁의 명령을 부정하고 방해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지? 그건 나이트 위긴스의 가르침인가?”
“아버지를 모독하지 말아요. 그 커다란 코를 물어뜯어 버리기 전에.”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한 부녀 사이에도 정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군. 영국인들의 발상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야.”
“국적 같은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원탁은 모두가 평등한 곳 아니었나요? 국적을 들먹이는 미개한 발상이 당신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네요.”
“지금 미개하다고 했나?”
“아니라고 할 셈인가요?”
뱅상이 가만히 엘레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엘레나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확실히 그건 내 실언이지. 인정한다.”
뱅상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이 어린 계집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지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얼버무리는 것은 더욱 큰 수치다.
“아니에요. 제가 말이 심했어요.”
뱅상의 깍듯한 사과에 엘레나도 당황했는지 살짝 물러섰다.
“하지만 이건 정말 제가 생떼를 부리는 게 아니에요. 강진호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위험해요. 절대 그를 자극해서는 안 돼요.”
“나이트 위긴스에게도 그렇게 보고했나?”
“예. 충분히요.”
“하지만 폰 엘레나.”
뱅상이 단호하게 말했다.
“위에서 내려온 지시는 강진호를 제거하라는 거다. 네가 무슨 말을 전했는지 알 도리는 없지만 아무래도 네 주장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군.”
“올라가지도 않았겠죠.”
엘레나가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그렇게나 강조했건만.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야.’
이건 무능이었다.
정보원으로서 그녀가 알아낸 것을 모두 보고했음에도 이런 결론이 나온다는 것은 나이트 위긴스의 무능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나이트 르보에게 전해주세요.”
“나이트 르보께?”
“네.”
엘레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이트 위긴스는 지금 사태 파악을 완전히 잘못하고 있어요. 강진호는 나이트 위긴스가 판단한 것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그는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람이에요.”
“어째서지?”
“그는 폭탄 같은 사람이니까요.”
“착각하는 모양인데.”
뱅상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그 폭탄을 제거하는 사람들이야. 네 주장이 무엇인지는 알겠지만, 네 주장은 그를 제거하라는 재촉과 마찬가지지.”
“그를 제거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에요.”
“슈발리에가 왔음에도?”
“…….”
엘레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슈발리에가 마흔이나 왔다. 그것도 정규 슈발리에가 말이야. 그런데도 그 하나를 제거하지 못한다는 건가?”
“그에게도 세력이 있어요.”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뱅상이 손에 들린 서류를 툭툭 쳤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강진호는 다른 이들을 대동하지 않고 혼자 이동하기를 즐긴다는군. 그렇다면 그 시기를 노릴 수 있겠지. 그럼 묻겠는데. 이 보고서를 작성한 이는 누구지?”
“……접니다.”
“그것 참 놀라운 일이로군.”
뱅상이 양팔을 과장되게 들어 올렸다.
“자네가 하는 말과 자네의 보고서 사이에 괴리가 있으니 어느 쪽을 신뢰해야 할지 모르겠군. 자 말해보게, 폰 엘레나. 내가 어느 쪽의 말을 들어야 하는 건가. 자네가 잘못된 건가? 아니면 자네의 보고서가?”
엘레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 보고서는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기사단이 직접 나선다면 강진호를 제거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뭐지 이 불안감은?’
막상 슈발리에들을 보자 불안감이 극심해졌다. 예전에 이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는 입만 살았다고 생각한 프랑스에 이렇게나 강력한 기사단이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었는데.
지금은 왜 이들이 이리 미덥지 못하게 보일까? 그녀가 이미 강진호를 보았기 때문에?
“무슈 뱅상.”
“말 하게.”
“제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요. 어쩌면 여러분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는 것 인정합니다.”
“흐음.”
“하지만 한번만 더 고려를 해주세요. 정말 강진호는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나이트 르보께 진언해 주세요. 나이트 위긴스는 실책을 저질렀습니다. 강진호는 강경책이 아니라 유화책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음.”
“그리고 하나 더.”
뱅상이 눈을 살짝 치켜떴다.
“또 있나?”
“강진호 주변에 그를 지켜보는 이가 저 말고도 있습니다.”
“……지금 뭐라고 했나?”
“제 판단으로는 이미 중국이나 일본, 둘 중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만약 이대로 강진호를 노리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그들과 충돌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뱅상이 미간을 꾹꾹 눌렀다. 하나같이 골치 아픈 이야기뿐이었다.
“확실하겠지?”
“네. 확실합니다.”
“일단 알겠네. 나가보게.”
“무슈 뱅상.”
“나가보라고 했네. 자네의 의견은 잘 알았어. 하지만 이 이상은 월권이야.”
엘레나가 나가지 않고 입술을 깨물고 있자 뱅상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걱정 말고 나가보게. 솔직히 나는 영국인을 존중하지 않지. 하지만 폰은 존중해. 자네의 의견은 정보원으로서의 의견이자 정보원으로서 확인해 온 정보라는 걸 인정하네. 그 사실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원칙에 어긋나지. 자네의 모든 발언과 의견은 즉시 나이트 르보께 보고될 것이네.”
엘레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나가 보게. 그리고…… 강진호에게서 눈을 떼지 말게. 그가 누구와 접촉하는지, 어디로 이동하는지 실시간으로 정보를 부탁하네.”
“네.”
엘레나가 깊이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가자 뱅상이 혀를 찼다.
“쯧.”
마티외가 홍차를 타 들고 들어왔다.
“마리아쥬 프레르입니다.”
“커피나 타 올 것이지.”
“조금 전에는 홍차를 원하셨잖습니까.”
“영국 녀석을 보고 났더니 홍차가 싫어지는군.”
뱅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국적이 영국이라는 게 이상할 정도야. 이탈리아 여자라고 해도 믿겠군.”
“그거 인종차별입니다.”
“우리끼리니 넘어가자고.”
뱅상이 손을 휘휘 젓자 마티외가 피식 웃고는 홍차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어쩌실 셈입니까?”
“보고해야지.”
“그녀의 의견을 믿으시는 겁니까?”
“아니.”
뱅상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한낱 폰. 그리고 무능력한 영국인의 말을 믿을 만큼 멍청하지는 않아. 하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있지. 폰 엘레나와 나이트 위긴스의 관계가 최악이라는 것 말이야. 적당히 나이트 르보께 보고해 놓으면 이득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옳으신 판단입니다. 그러면 강진호는?”
“제거해야지.”
뱅상의 단호한 목소리에 마티외가 살짝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 엘레나가 했던 말이 걸린다.
“정보에 대한 해석이야 그렇다 쳐도, 그녀가 물어오는 정보가 양질의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누군가가 강진호를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걸리는 군요.”
“흐음.”
뱅상 역시 그 부분은 생각해 봐야 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문제지. 하지만 별 상관은 없지 않나?”
“예?”
“원탁은 국가 간의 트러블을 너무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어. 사실 그의 주변을 감시하는 이들이 강진호의 팬이라서 파파라치 샷이라도 찍으려고 붙어 있지는 않겠지. 그렇잖은가?”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강진호를 노리고 있다는 말인데. 적의 적은 친구가 될 수 있는 법이지. 중간에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강진호를 제거한다는 목적이 합치된다면 딱히 트러블이 생길 건 없다는 말이야.”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닐 텐데요?”
“아니. 간단한 문제지.”
뱅상이 딱 잘라 말했다.
“다른 이들은 강진호를 죽임으로써 얻는 이득에 목적이 있겠지. 하지만 우리는 강진호를 제거하고 나면 철수한다. 그 사실만 확실히 주지시킨다면 그쪽도 우리를 제지할 이유가 없어.”
“……확실히.”
마티외는 뱅상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핵심을 찌르는 면이 있기에 뱅상이 슈발레에의 수장을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럼, 명령은?”
“달라질 것이 없다.”
뱅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확고하게 말했다.
“모을 정보는 모두 모았다. 이제는 행동만이 남았을 뿐이지. 빠른 시간 내에 강진호를 제거한다. 최대한 빠르게.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언제든 좋다. 폰 엘레나의 정보를 참고하고 독자적으로 뻗은 정보 라인을 모두 가동해. 강진호가 혼자 있을 때를 노린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이번 일을 성공할 수 있다면 나이트 르보의 입지가 확고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원탁은 우리 프랑스 제국이 지배하게 되겠지. 저 로스트비프들이 아니라 말이야.”
“예!”
경례를 하고 밖으로 나가는 마티외를 보며 뱅상이 중얼거렸다.
“한낱 동양인에게 겁을 먹고 떠는 꼴이라니.”
나이트 위긴스의 자식이라면서 스스로에 대한 자각도 없는가. 저런 이들이 원탁의 중심이네, 뭐네 하고 설치니 원탁이 이리 물렁해진 것이다.
원탁의 위명을 되찾는 방법은 나이트 르보가 원탁을 접수하는 수밖에 없다. 뱅상은 자신의 목적을 확고히 하며 장비를 점검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흐응.”
엘레나가 코웃음을 쳤다.
“내 그럴 줄 알았지.”
프랑스 놈들이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것이야 워낙에 유명한 일 아닌가. 그런 놈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믿을 엘레나가 아니었다.
신발 바닥에 붙이고 들어간 소형 도청기가 그들의 대화를 빠짐없이 엘레나에게 전해주었다.
“자, 어떻게 할까?”
그녀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저 멍청이들이 사고를 치기 전에 먼저 강진호 씨를 만나야겠지.”
실질적으로 이제 그녀가 원탁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녀가 접촉할 수 있는 모든 채널이 그녀의 의견을 거부했다. 그럼 이제 독자적인 노선 밖에는 남지 않았다.
“후.”
강진호의 모습을 떠올리자 몸이 살짝 살짝 떨려왔다. 그 사람과 독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세상을 구할 방법이 그것뿐인데.
“자, 그럼 어떻게 만나자고 해볼까?”
전화를 할까?
아니면 저번처럼 다짜고짜 쳐들어갈까?
그것도 아니면 우연처럼 다시 만나는 걸로? 커피라도 들고 있다가 쏟아야 하나?
전화를 꺼낸 엘레나가 번호를 눌렀다.
“저예요. 지금 강진호 씨가 있는 곳 좀 수배해 주세요.”
대답은 의외로 즉시 나왔다.
“네?”
엘레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해요? 강진호 씨가 서해로 향했다구요?”
서해라니. 갑작스럽게 서해는 왜?
“호, 혼자요?”
엘레나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지, 지금 이 정보, 본인만 알고계시는 거죠?”
대답을 들은 엘레나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모든 정보는 저에게 먼저 달라고 했잖아요! 그걸 슈발리에에게 주시면 어떻게 해요!”
어이없는 말을 들었지만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 당장 출발해! 당장!
도청기와 연결된 이어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슈발리에가 강진호의 움직임을 알아채고 그를 죽이러 출발하고 있었다.
‘망했다.’
엘레나가 절망스레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녀는 아무 것도 막지 못했다.
사태가 파탄으로 치닫기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