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48
#47.
흘러가다 (4)
조규민은 문을 열고 들어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왔느냐?”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장님.”
“그래, 별일은 없었고?”
“예.”
“그럼 그동안 자네가 지켜봐 온 강진호라는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게.”
조규민은 침을 삼키며 보고서를 꺼내 들었다.
“또 서면인가?”
“회사에 제 자리가 없습니다.”
“커허허험! 험! 미안허이. 내가 말해두지.”
“괜찮습니다.”
조규민은 보고를 시작했다.
“최근 강진호는 공부에 전념하고 있는 상태고, 성적은 가파르게 오르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인가?”
“아주 뛰어난 정도는 아닙니다. 이제 겨우 우수한 학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
황정후는 조금 실망한 눈으로 조규민을 바라보았다.
“머리는 좋은 편이 아닌 모양이군.”
“그 반대입니다.”
“무슨 소린가?”
조규민은 보고서를 가리켰다.
“보고서 안에 작성해 두었지만, 강진호는 과거 교통사고 이후 지난 기억의 대부분을 잃었습니다.”
“흠?”
“그리고 그 안에는 지식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보통 기억이 손상되는 경우에도 상식과 지식에 대한 부분은 남아 있기 마련인데, 조금 특이한 경우 같습니다.”
“그래?”
황정후가 조금 놀란 얼굴로 말했다.
“잠깐. 교통사고가 있던 것은 불과 1년 전 아닌가?”
“그렇습니다. 지금 강진호는 1년 만에 초중고 12년 과정을 따라잡고 있습니다.”
“빠르군. 남들보다 열두 배가 빠르다고 봐야 하는가? 아니, 그 정도까진 아니겠고.”
“딱히 공부에 전념하는 것 같지도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적당히 공부를 하고 있음에도 가공할 속도로 따라잡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수능 당일 날 성적이 얼마나 나올지 궁금합니다.”
“목표는 어디라던가?”
“재경대학입니다.”
“그래?”
황정후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말은 안 해도 우리 그룹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군.”
“가까워서 좋답니다.”
“…….”
황정후는 시무룩한 얼굴로 조규민을 바라보았다.
“뭐, 그래, 성적은 그 정도로 됐어. 머리만 영특하다면 성적은 아무래도 좋아. 그 외에 다른 부분은 어떤가?”
“다른 부분이라 하시면?”
“자네가 지켜봐 온 강진호라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조규민은 고민했다.
이런 것은 단순한 느낌에 불과했다. 보고에 감정을 제거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는 조규민에게 감정만으로 보고를 하는 것은 껄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황정후가 원한다면 해야 했다.
“강진호는…….”
조규민은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
“알 수 없는 사람입니다.”
“알 수 없다고?”
황정후가 실망스런 기색으로 조규민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린가? 일 년을 넘게 지켜보았는데 알 수 없다니.”
“그래서 더욱 알 수 없었습니다.”
“음?”
“강진호는 처음 볼 때와 몇 번 보았을 때, 그리고 오랫동안 지켜보았을 때가 모두 다른 사람입니다.”
황정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처음 강진호를 보았을 때만 해도 회장님이 굳이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회장님의 숨겨진 혈육이 아닌가도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럴 힘이 어디 있나.”
“그야 뭐, 남자는 모르니까요.”
“뭐, 어쨌든.”
조규민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켜보다 보니 강진호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습니다. 그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입니다. 판단이 빠르고 정확하며 과감합니다. 마치…… 회장님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좋은 평가군.”
조규민의 얼굴이 굳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또 다릅니다.”
“어떤 부분이?”
“그는 자신 안에 뭔가를 숨기고 있습니다.”
황정후는 미소를 지었다. 조규민도 강진호의 본모습에 대한 낌새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때때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가 저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때 더더욱. 한 번씩 등골이 서늘해져 그를 돌아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 느낌만으로 단언할 수 있는가?”
“최명길을 기억하십니까?”
“최명길?”
“동명 재단의 이사장 말입니다.”
“아, 그 썩은 눈. 기억하지.”
“최명길이 최초에 강진호와 엮이게 된 이유가 뭔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손자와 싸웠다고 했지 않나. 내가 그 정도도 기억하지 못할 것 같은가?”
“그 손자 최영수는 지금 폐인이 되어 있습니다.”
“뭐?”
“처음에는 그저 약간의 착란 증세를 보인다고 되어 있기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근 제가 살펴본 최영수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젊고 건장한 청년이 못 볼 꼴이 되어 있더군요.”
“음…….”
“아마도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강진호 같습니다.”
황정후 역시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처음 강진호를 보았을 때, 황정후는 악마를 보았다고 생각했으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나?”
“들었습니다.”
“뭘?”
“강진호와 최영수의 대화를 말입니다.”
황정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자네가 최영수를 만났다는 말인가?”
조규민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게 아닙니다. 최영수를 찾아간 것은 강진호입니다. 저는 그저 안내했을 뿐이죠.”
“자세히 말해보게.”
“한 달 전쯤이었습니다.”
* * *
“찾아야 할 사람이 있어요.”
강진호의 말에 조규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람을 찾는다?
이산가족 찾기도 아니고,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란 말인가.
“누굴 말입니까?”
“최영수.”
“예?”
“동명 재단 이사장의 손자였던 최영수 말이에요. 이 학교를 다녔던.”
“아,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왜?”
“이유는 묻지 말고 소재 파악해 주세요.”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이리로 데려올까요?”
“아뇨, 제가 가죠.”
조규민은 강진호의 눈이 오늘따라 굉장히 무겁게 느껴졌다.
“찾았습니다.”
“어디 있나요?”
“멀지 않은 곳입니다. 그래도 평생 살아온 터전을 떠날 수는 없던 모양입니다.”
“데려다 줄 수 있나요?”
“제가 모시죠.”
조규민은 강진호를 차에 태우고 최영수에게로 향했다.
주소를 찾아 들어가자 차로는 더 올라갈 수 없을 만큼 가파른 달동네가 나왔다.
“이 위라는데, 여기부터는 걸어가셔야 할 듯합니다.”
“그럴게요.”
강진호는 차에서 내려 달동네를 바라보았다.
작고 초라한 집들이 가파른 산에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예전 성심 보육원이 이런 곳에 있었다.
“서울에 이런 달동네가 많나요?”
“그렇죠. 서울은 양면성이 있는 곳이니까요. 부자들은 더없이 호화롭지만, 힘든 사람도 많습니다. 서울뿐 아니라 대도시들은 대부분 다 그렇죠.”
“네.”
강진호는 조규민의 뒤를 따랐다.
한참을 올라간 끝에 조규민은 자신이 찾는 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긴 것 같습니다.”
“예.”
강진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끼이이익!
현관문이 마찰하며 날카로운 소음이 울려 퍼졌다.
“누, 누구요? 쿨럭!”
안에서 늙수그레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강진호는 말없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누구…….”
힘겹게 밖으로 걸어 나온 노인이 눈을 크게 뜨고 경악했다.
“너, 너, 너는!”
강진호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동명 재단의 이사장.
아니, 이제는 이사장의 자리에서 쫓겨난 노인, 최명길이었다.
“강진호!”
최명길이 놀란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조규민은 강진호의 앞을 막아서려 했다. 최명길이 강진호를 본다면 분명 달려들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명길의 반응은 조규민의 예상과는 무척 달랐다.
최명길은 두려운 눈으로 뒤로 물러났다.
“왜, 왜 왔어! 여긴 왜!”
목소리는 컸지만, 그건 결코 위협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차라리 위험을 주변에 알리는 간절한 호소처럼 들렸다.
“최영수를 찾으러 왔습니다.”
“영수는 왜! 제발 이제 우리 영수를 내버려 둬! 너 때문에 지금까지 제정신이 아닌 아이야! 이젠 용서해 줘도 되잖아!”
강진호는 고개를 돌렸다.
낮은 숨소리가 들려온다.
강진호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최명길을 잡아 떼어냈다.
두려운 눈으로 경계하던 최명길이 강진호가 최영수의 존재를 파악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든 것이다.
그가 강진호에게 무슨 짓을 했든 간에 그 애정만은 높이 평가할 만했다.
강진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퀴퀴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방구석에 긴 머리가 제멋대로 엉켜 있는 젊은 남자가 잠에 빠져 있었다.
“제발! 발작을 일으키다 수면제를 먹고 이제야 잠들었다. 내 잘못이다! 다 내 잘못이야! 제발 그 아이는 내버려 둬라!”
하지만 최명길의 발악은 되레 잠에 빠진 최영수를 깨워 버렸다.
최영수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강진호의 모습이 보였다.
“히이이이익!”
최영수는 범이라도 본 것처럼 기겁하여 강진호에게서 물러났다.
그 광경이 조규민의 눈에도 애처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강진호! 강진호! 으아아아아악!”
최영수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강진호는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과거로 다시 돌아왔을 때 처음 본 최영수는 잘생긴 청년이었다. 성격이 뒤틀린 점은 있지만, 누가 보아도 괜찮은 청년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최영수에게서 누가 과거의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수염은 덥수룩하게 자라 있고, 머리는 제멋대로 엉켜 노숙자가 따로 없었다.
반쯤 풀린 동공은 연신 주변을 살피며 불안에 떨었고, 더러운 옷가지 사이로 보이는 몸은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이 사람이 최영수입니까?”
강진호는 대답하지 않고 최영수에게로 다가갔다.
“오지 마! 으아아아! 오지 마!”
강진호는 성큼성큼 최영수에게로 다가가 머리를 붙잡았다.
“이놈아!”
조규민이 최명길을 붙잡았다.
그러면서도 강진호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혹시나 강진호가 최영수를 건드린다면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강진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나를 봐.”
“으아아아아악!”
강진호의 손이 최영수의 머리를 꽉 움켜잡았다.
“나를 봐, 최영수. 내가 누구지?”
“…….”
“말해. 내가 누구지?”
“강진……호…….”
강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다. 최영수, 내가 강진호다.”
“으…….”
강진호의 손에서 흘러나온 내공이 뒤틀린 최영수의 뇌혈을 바로잡았다.
이성을 어느 정도 되찾은 최영수가 질린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무얼 보고 있었지?”
“나는…….”
“넌 무얼 보았나?”
최영수는 손을 덜덜 떨며 대답했다.
“지옥…….”
강진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래. 내가 말했지, 살아서 지옥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이야.”
“가, 강진…….”
강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떨 것 없어. 난 널 찾아온 적 없으니까. 넌 그저 네가 만들어낸 나를 보고 있었을 뿐이야. 난 네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아.”
최영수의 몸이 천천히 진정되었다.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는 듯하지만, 조금 전처럼 소리를 지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보여?”
강진호가 최영수의 머리를 잡아 주위를 보여주었다.
“이게 네 현실이야.”
“…….”
“도피하지 마. 꿈이 아니야. 꿈은 네가 꾸고 있었어. 이게 네가 현실을 버린 동안 네게 벌어진 일이야.”
강진호의 목소리는 더없이 스산했다. 그 스산한 목소리가 최영수의 귓가로 똑똑히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