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482
#481.
잡아놓다 (1)
분노.
분노라는 것은 꽤나 독특한 감정이다. 품는 것만으로 다른 이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감정은 오직 분노밖에 없을 것이다.
누군가 슬퍼한다고 해서, 누군가 기뻐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이에게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옆의 누군가가 극도의 분노를 느끼고 있다면, 사람은 누구나 그를 경계하기 마련이다.
분노는 이성을 앗아가고 사람을 침착하지 못하게 만드니까. 그리고 그 분노조차 누구의 분노냐에 따라 경중이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이마에서 송골송골 배어 나온 땀이 코를 타고 흘러 아래로 떨어졌다. 뒷덜미에서 배어 나온 땀은 턱을 타고 아래로 흐른다.
차이커창은 자신의 발아래에 깔린 카펫이 그가 흘린 땀으로 축축이 젖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 이 정도의 식은땀을 흘린다면 병원을 찾아가야 한다. 무인인 그라면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지금 홍왕의 분노를 정면으로 받고 있었으니까.
웬만한 이였다면 홍왕의 분노가 쏟아지는 순간, 심장이 멎어버렸을 것이다. 무학을 익힌 무인이라고 할지라도 정신을 잃을 정도의 강렬한 감정이 그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차이커창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입술이 찢겨 나가며 입안으로 쇠 맛이 감돌았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의식이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차이커창.”
우렁우렁 울리는 목소리.
영혼을 짓누르는 것 같은 그 목소리가 들려오자 차이커창은 생각할 것도 없이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말씀하십시오, 홍왕이시여.”
“나는 이미 네게 충분한 기회를 주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너는 항상 나를 실망시키는구나.”
차이커창은 더더욱 머리를 바닥으로 박았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빌어먹을, 상황이 왜 여기까지 흘러 버린 거지?’
경계가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홍왕을 모시는 자. 모든 일에 완벽을 기할 수밖에 없다. 사소한 방심이나 실수로 대사를 그르치는 것이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모든 일에 만전을 기했다.
돌다리가 나오면 두드려 보고 건너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새로 다리를 놓고 건널 정도의 조심성으로 모든 일을 진행했다.
‘그게 틀린 거였어.’
아니, 틀리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차이커창의 방식은 나쁘지 않았다. 기묘한 역학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중국의 정세를 뒤흔들지 않고 서서히 주도권을 찾아오는 데 이만한 방법은 없었다.
그의 방법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고, 덕분에 열세에 몰려 있던 홍왕계가 나름 주도권을 잡는 데도 성공했다.
그놈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강진호!’
그가 나타나면서 차이커창의 모든 계획이 뒤틀렸다.
‘빌어먹을.’
그에게 실수가 있었다면 강진호라는 자를 상식의 영역에서 판단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그는 그만큼 강할 수 없고, 그만큼 파격적일 수 없었다.
하지만 강진호는 그가 무인들에게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상식을 모두 선입견으로 바꾸어 버렸다. 강진호는 그의 상상을 뛰어넘는 자였던 것이다.
진득한 패배감.
무학이 아닌 계책으로 강진호를 통제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홍왕은 말없이 차이커창을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차이커창을 더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차라리 홍왕이 그를 비난하고 벌을 주었다면 이렇게나 괴롭지는 않을 것이다. 때로는 침묵이, 무언이 가시 돋친 말보다 더욱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들 때도 있는 법이다.
“내가 너를 과대평가한 것이냐?”
“…….”
“아니겠지.”
홍왕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어려 있었다.
“너와 내가 강진호를 과소평가한 것이겠지. 덕분에 강진호는 한국을 일통했고, 일본의 견제를 이겨냈다.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축했다. 게다가 이제는 저 머저리 같은 서양 놈들과 연줄을 만들고 있다.”
“죽여주시옵소서.”
“이제 강진호는 적당히 암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저렇게 크기 전에 미리 싹을 잘라야 했어. 하지만 이제 싹을 자르기에는 늦었다.”
차이커창 역시 공감하는 바였다.
강진호는 이미 한국의 무인계를 완벽하게 장악했다. 그런 이를 상대한다는 것은 과거 야인이던 강진호를 상대하는 것과는 그 무게가 달랐다.
아무리 한국의 무인계가 약하다고는 하나…….
‘그 수는 무시할 수 없지.’
인의 장벽에 틀어박혀 있는 이를 처리하는 방법은 인의 장벽을 걷어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건 전쟁을 의미한다.
강진호를 죽이기 위해서 그 많은 이들을 죽여야 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부담일 수밖에 없다. 전력으로는 압도적이지만, 그만한 이들과 전쟁을 하는데 문제가 생기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새삼스레 전력의 공백을 각오하고서라도 강진호를 죽여야 한다 말한 홍왕의 선견지명이 느껴졌다.
‘대체 저분은 강진호에게서 무엇을 보신 것일까?’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 차이커창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강진호가 아무리 위협적이라고는 하나 다른 왕들에게 빈틈을 보이면서까지 제거해야 할 존재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강진호 정도는 한국의 무인들이 충분히 제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때 홍왕이 드러내 보인 우려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그랬다면 이런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마인들이 준동하고 있다고 했지.”
“예.”
“그 마인의 준동과 강진호가 연관이 되어 있을 확률은?”
“그렇게까지는…….”
홍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리석은 놈.”
“미욱한 저를 일깨워 주소서.”
“강진호는 마인이다. 그것도 이제껏 나타난 적 없는, 강력한 마인이다. 어쩌면 그는 실전되었던 마교의 비전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이가 등장한 것과 마인들이 준동하는 것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데, 그 연관성에 대한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는 말이더냐!”
차이커창이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죄송합니다.”
“후우…….”
홍왕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 그를 지배하는 감정은 분노보다는 답답함이었다.
세상을 뒤엎는 무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움직일 수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지금 당장이라도 한국으로 날아가 그 강진호를 죽여 버리고 싶지만, 그가 자리를 비우는 순간 다른 두 왕이 날뛰기 시작할 것이다.
게다가 답답함과 충동을 참지 못해 결단을 내리려고 할 때마다 창왕이 교묘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그가 강진호에게 가는 것을 막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지나친 생각이겠지만…….’
창왕이 날뛰는 것이야 비단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 당연히 우연이 겹친 수준일 것이다.
문제는 그 겹치고 겹친 우연이 상황을 이상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강진호는 중국과 일본이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확고한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그 와중에 유럽마저 동아시아에 뛰어들고 있으니, 홍왕의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도 당연했다.
“시간을 더 끌 수는 없다.”
“예.”
“다소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반드시 강진호를 제거한다.”
“하, 하나 홍왕이시여.”
차이커창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강진호를 제거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강진호를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가 치러야 할 희생이 너무 큽니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희생이 있다 해도 감수해야겠지.”
“차라리…….”
차이커창이 뒷말을 흐렸다.
그 말이 홍왕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것이 빤하기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간언하는 자. 분노를 사고 욕을 먹더라도 말을 해야 하는 자였다.
“차라리 그와 화친을 시도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화친이라고 했는가?”
“예.”
즉각적인 홍왕의 분노가 떨어지지 않자 차이커창이 입술을 핥았다.
“강진호라는 자의 능력은 인정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짧은 시간 내에 한국의 무인계를 일통했고, 완벽히 자신의 지배하에 뒀습니다. 이전 한국 무인계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던 이들의 그림자를 완전히 걷어내고 자신의 이름만을 유일하게 남겼습니다.”
“……나쁜 소식이군.”
“덕분에 지금 한국의 무인계는 그 어떤 시절보다 융성합니다. 그들과 적대하는 것은 수많은 문제를 만들어낼 뿐입니다. 당장 전력의 공백을 걱정해야 하고, 일본의 개입을 우려해야 합니다. 게다가 마인들의 준동마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벌레도 무리를 이루면 사람을 죽이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화친을 맺겠다?”
“가능하다면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문제를 억누르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미 한국의 무인계는 하나의 전력이 되었습니다. 그들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차이커창.”
홍왕이 옥좌에 턱을 괴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잊었느냐? 그는 마인이다.”
“…….”
“그래,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접어두자. 그가 마인이라도 상관없다. 그가 마인이라 할지라도 필요하다면 손을 잡아야겠지. 내가 아무리 정문(正門)의 후예라고는 하나 이런 시대에 마인을 생사대적으로 여기고 이를 갈아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실리가 모든 것인 세상이지.”
차이커창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점이 바로 그가 홍왕에게 충성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홍왕의 무력은 하늘에 닿았다. 그러므로 홍왕은 충분히 오만할 자격이 있다.
하지만 홍왕은 결코 쉽게 오만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변하는 시대에서 뒤떨어지지 않으려 애썼고, 자신에 비하면 하찮기 짝이 없는 존재인 차이커창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 드높은 곳에서 차이커창의 말 따위는 개미의 더듬이질로 보일 만도 한데, 그 작은 움직임에도 항상 관심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문제는 그가 마인이라는 것이다. 경지에 오른 마인은 극도로 오만하다. 경지에 오르지 못하더라도 다른 이들과 손을 잡는다는 협조심이 있을 리가 없지.”
“……아!”
“지금 당장이야 미끼로 유혹할 수 있겠지만, 결국에는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놈을 등 뒤에 세워둘 수는 없지.”
차이커창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와는 생각이 조금 다르지만, 결국 선택은 홍왕이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저 의견을 말하고 간언을 하는 것이 전부. 홍왕이 선택했다면 그때부터는 토를 달지 않는 게 좋았다.
“그럼 다른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렇겠지.”
홍왕이 씁쓸하게 말했다.
“바토르를 불러라.”
“바, 바토르…….”
차이커창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바토르 말씀이십니까?”
“지금 뺄 수 있는 전력이라고는 그놈밖에는 없지 않느냐.”
“하, 하나 바토르는…….”
“나 역시 아쉽다. 하지만 시간이 더 흐르면 바토르로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전에 해결을 해야겠지. 머뭇거리다 시기를 놓친다면, 우리는 강진호 때문에 파멸할 수도 있다.”
차이커창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 과감한 결단력이 그와 홍왕의 차이일 것이다.
“말씀대로 시행하겠습니다, 홍왕이시여.”
홍왕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옥좌에 등을 기댄 그의 얼굴에 나른한 피로가 내려앉았다.
‘슬슬 버겁군.’
세상을 이끌어 나가는 거인마저도 서서히 시대의 흐름에 삼켜져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