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483
#482.
잡아놓다 (2)
방진훈이 데려온 무인들은 섬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시체를 처리하고, 흔적을 지웠다. 모든 과정이 완벽하게 끝나고 나서야 뒤이어 도착한 배들에 슈발리에들을 태워 육지로 끌고 왔다.
“이놈들을 다 데려갑니까?”
“그래야죠.”
뱅상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도주각은 나오지 않았다. 겨우 육지에 도착한 그들이 본 것은 해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무인들이었다. 애초에 강진호가 있는 이상 도주는 불가능하겠지만, 마지막 희망마저도 깔끔하게 사라졌다.
“너무 많이 데려오셨네요.”
“원래 이 정도는 있어야 문제가 생겨도 해결할 수 있는 겁니다. 이현수 그놈은 너무 소수로 움직이려는 경향이 있어요. 예전에 김석일, 그 썩을 놈이 인원을 동원해서 뭔가를 하는 걸 극도로 경계했거든요. 거의 뭐, 쿠데타 날까 봐 벌벌 떠는 독재자 수준이라서요.”
“강박이 있어 보이긴 했죠.”
“여하튼 그러다 보니 이현수 이놈도 소수로 움직이는 일에 길들여져서 다수로 할 수 있는 일도 머리 써서 소수로 하려고 들죠.”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수가 할 일을 소수가 한다면 효율은 극도로 상승하겠지만,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 대처할 수 있는 힘이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전력이 남는다면 굳이 사용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그런데 이놈들 이렇게 다 풀어놓고 데려가도 됩니까? 순순히 갈까요?”
“그럴 겁니다.”
강진호가 그의 앞에 쭉 도열해 있는 슈발리에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아니면…… 도망친다고 해도 재밌겠죠.”
강진호의 눈빛을 본 슈발리에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푹 숙였다.
‘도망은, 빌어먹을.’
도망치는 그 순간 눈에 핏발이 선 강진호와 대면해야 할 텐데, 누가 그 짓을 하겠는가.
“그럼 저는 일단 이놈들 데리고 가서 총회에다 가둬두겠습니다.”
“예.”
방진훈이 손짓을 하자 슈발리에를 감시하던 이들이 그들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강진호와 방진훈은 그 광경을 보다가 담배를 한 대씩 물었다.
“저놈들은 어쩌시려구요?”
“글쎄요.”
강진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일단 잡아두기는 했는데,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고민 중입니다.”
“대책 없네요.”
“죽일까요?”
방진훈은 태연하게 묻는 강진호를 보며 입술을 살짝 떨었다.
‘다른 놈이 하면 농담인데…….’
이 인간은 진심으로 묻고 있었다.
가끔은 강진호의 인간에 대한 인식이 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아뇨. 살려두죠.”
여기서 방진훈이 ‘그래요, 죽입시다!’를 외치는 순간, 강진호는 주저하지 않고 저들의 목을 다 따버릴 것이다. 당연하게도 방진훈에게 그럴 만한 담량은 없었다.
‘이래서 독재자라는 놈들이 말년에는 다 미치는 거군.’
말 한마디로 수십이나 되는 사람의 목을 날려 버릴 수 있다는 것은 생각 이상의 부담이었다. 그 사실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혀가 잘 돌지 않고,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써먹을 데가 있을 겁니다. 신기한 기술들을 알고 있더군요. 더 자세한 부분은 이현수가 알아서 하겠죠.”
그때였다.
“놔요! 나는 아니라구요!”
등 뒤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엘레나가 자신을 끌고 가려는 무인들에게 저항하고 있었다.
“아니! 나는 아니라니까! 쟤들이랑 나는 다르다구요! 강진호 씨!”
자신을 부르는 엘레나를 보며 강진호가 한숨을 쉬었다.
‘다르기야 하지.’
저들은 강진호를 죽이러 온 것이지만, 엘레나는 저들이 강진호의 손에 죽는 것을 막으러 온 것이다.
그냥 비슷한 것들이니 대충 같이 취급해 주고 싶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같이 취급할 수도 없었다.
“놔줘요.”
강진호의 말에 엘레나를 구속하려던 이들이 손을 풀고 물러났다.
그러자 엘레나가 강진호에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감사해요.”
“별말씀을.”
그게 끝이었다.
말을 더 이어가지 않는 강진호를 보며 엘레나는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눈꼽만큼이라도 친분이 있던 슈발리에들은 모조리 끌려갔고, 이제 그녀의 주변에는 살기등등한 한국의 무인들만 남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뭘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언급이 없으니, 날선 무기를 든 적군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기분이었다.
평소에는 재수 없다고 생각하던 슈발리에들이라도 주변에 있어줬으면 좋겠다 싶으니, 말 다 한 것 아니겠는가.
‘배려 진짜.’
쌓이는 불만이야 말로 다 할 수 있겠냐마는, 강진호에게 불만을 늘어놓을 수는 없었다.
우선 무서우니까.
“전 이제 뭘 해야 하죠?”
엘레나가 선택한 것은 정면 돌파였다.
모르면 물어본다.
이걸 못해서 일을 망치는 이들이 무척이나 많지 않은가. 조금의 뻔뻔함을 얼굴에 한 겹 두르고 당당하게 물었다.
“글쎄요. 뭘 해야 할까요?”
하지만 강진호는 그녀의 거취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 쓸모없는 여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라는 기색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 나보였다.
“일단 가서 말하세요.”
“네?”
“여기서 벌어진 일을 전해야 그쪽에서도 대처를 하겠죠.”
“……말하라구요?”
“네.”
태연한 강진호의 대답에 엘레나는 순간 멍한 얼굴이 되었다.
‘뭐라는 거야, 이 사람?’
보통은 자신의 정보를 숨기기 위해서 안달이어야 정상이다. 정보가 곧 힘인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그런데 지금 강진호는 엘레나에게 그녀가 본 모든 것과 이곳의 상황을 원탁에 전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저리 태연하게.
“그러니까…… 지금 슈발리에들이 강진호 씨를 치려다가 되레 모두 생포당해서 총회에 구속되어 있다고 원탁에 전하고 반응을 받아오라는 건가요?”
“네.”
“…….”
어…… 그러니까…….
엘레나가 편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하지 말자.’
머리를 굴려봐야 소용이 없다. 최근에 확실히 인정하게 된 것이지만, 이 사람은 그녀보다 똑똑했다. 그것도 꽤 많이.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르는 것 같은 일에 숨은 뜻이 하나씩 박혀 있었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다. 강진호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하게 움직여서 나나호시 구미와 슈발리에를 모두 무인도로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이들을 처리하는 건 강진호로서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전적으로 강진호가 만든 일인지, 아니면 강진호의 머리 역할을 맡는 이가 따로 있는 건지는 아직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했지만, 그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었다.
강진호에게 조언하는 자가 똑똑해서 벌어진 일이라 하더라도 강진호가 그의 말을 듣고, 그 둘의 관계를 끊어놓지 못하는 이상 강진호가 똑똑한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그저 강진호가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면 된다. 지금은 그녀에게도 그게 최선이었다.
“연락을 하려면 제 숙소로 가야 하는데…… 잠시 들를 수 있을까요?”
“네.”
“감시하는 분들은 소수로 해주실 수 있어요? 너무 많이 끌고 다니면 다른 정보원들이 먼저 연락할 수 있고, 그럼 문제가 꼬일 수 있어서요.”
“감시요?”
강진호가 무슨 말이냐는 듯이 되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엘레나는 강진호의 말뜻을 이해했다.
“호, 혼자 가는 건가요?”
“네. 누굴 데려가야 됩니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풀어주는 거냐? 그냥? 아무 조건도 없이?
물론, 강진호가 엘레나를 끌고 간다고 해서 딱히 이득 보는 부분은 없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원탁과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고, 지금까지 강진호를 뒤에서 감시해 온 감시자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그냥 풀어준다니.
그녀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엘레나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생각하지 말자니까.’
상식이니 어쩌니 하는 말로 자꾸 강진호를 재단하려 들면 안 된다. 그건 파멸을 부르는 일이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이 사람을 재단하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일이었다.
“따로 원탁에 전해야 할 말이 있나요?”
엘레나의 말에 강진호가 가볍게 웃었다.
“기대하고 있다고 전해주시면 됩니다.”
“기대요?”
“네.”
강진호가 담배 연기를 천천히 뿜어내고는 말을 마저 완성했다.
“이들의 몸값으로 얼마나 재미있는 조건을 들고 올지 기대하고 있다고요.”
빙그레 웃는 강진호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만 엘레나였다.
“저렇게 보내줘도 되는 겁니까?”
선착장에 대놓은 자신의 바이크를 타고 출발하는 엘레나를 보며 방진훈이 눈을 찌푸렸다.
저 여자가 딱히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건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곳의 상황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을 저리 쉽게 풀어준다는 것은 영 찝찝한 일이었다.
“딱히 써먹을 데도 없으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여전히 불안하다는 얼굴 표정을 짓는 방진훈을 보며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생각 없이 풀어준 것은 아니다. 그녀를 풀어준 이유는 그녀는 한계가 극명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그녀에게는 이 상황을 해결할 만한 힘이 없다. 이 상황에 대한 대처는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상부에서 나올 터. 그렇다면 그냥 풀어주고 상부와 접촉하게 두는 쪽이 더 나았다. 그러면 대응이 조금이라도 빨리 올 테니까.
게다가 저 여자의 성향으로 보면 풀어놓는 쪽이 강진호에게도 이득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게 뭐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뜬금없이 프랑스 놈들이라니. 이 새끼들이 왜 강진호 씨를 치려고 한 걸까요?”
“거슬렸겠죠.”
“그런 이유로 이만한 놈들을 보내서 사람을 죽이려 든단 말입니까?”
“가끔은 정말 방진훈 회주가 무인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네?”
강진호가 태연하게 말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데는 이유가 없어요.”
“…….”
방진훈은 순간 오싹함을 느껴야 했다.
다른 이가 이런 말을 했다면 그냥 무시할 수 있는 말이었겠지만, 강진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 그 무게감이 남달랐다.
“다만, 책임이 따르는 거죠.”
“책임요?”
“네.”
강진호가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빙그레 웃었다.
‘나를 노린 책임을 져야겠지.’
명백한 사실은 딱히 적대적인 감정이 없던 강진호를 저들이 먼저 노렸다는 것이다. 강진호는 결코 그 사실을 잊지 않았다.
세상은 복잡하기 짝이 없지만, 때로는 아주 간단한 이치로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리고 저들은 이제 강진호의 목숨을 노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엘레나가 강진호의 생각을 이해했다면 자신들의 목숨을 대체할 수 있는 대가를 가져올 것이고, 그렇지 못한다면?
‘딱히 생각할 것도 없지.’
그럼 원래 치러야 할 대가를 치르게 하면 그만이었다.
강진호는 자신이 꽤나 물러졌다고 생각했다. 예전이었다면 목숨으로 치러야 할 대가를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이런저런 이점을 고려한 결정이라고는 하지만, 이 시대로 돌아온 직후의 강진호라면 과연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현명해진 건지, 아니면 물러진 건지…….’
그 어느 쪽이든 확실한 것은 강진호가 변화했다는 사실이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일단 총회로 갈까요?”
방진훈의 물음에 강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먼저 빠질게요. 일단 감시 잘해주시고, 이현수에게 상황 설명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방진훈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강진호는 자신의 차로 향했다.
스스로가 변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가고 싶은 곳이 생겼다.
강진호는 차에 올라 천천히 액셀을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