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485
#484.
잡아놓다 (4)
“슈발리에들을 포기한다?”
“예.”
“……슈발리에는 그대의 기사단이 아니오? 그런 슈발리에를 포기한단 말이오?”
마스터의 반문에 나이트 르보가 이를 꽉 깨물었다.
“물론 결코 하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망설일 이유도 없습니다.”
“미친!”
나이트 위긴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대의 명을 따라 머나먼 타국까지 간 이들이오. 그런 이들을 헌신짝 버리듯이 내친다는 말이오!”
“흥분할 일이 아닙니다.”
나이트 위긴스는 차가운 분노를 뿜어내는 나이트 르보를 벌레 보듯 바라보았다.
“앉으시오, 나이트 위긴스.”
“하지만 마스터!”
“앉으라 하지 않소.”
나이트 위긴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자리에 앉았다.
“계속하시오.”
마스터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이트 르보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물론 그들의 처지는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제가 그들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프랑스 제국의 자랑스러운 기사들입니다. 그런 이들을 잃는다는 것은 더없는 손실입니다. 하나!”
나이트 르보의 목소리가 악에 받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존재가 원탁에 피해를 끼친다면, 그들 역시 명예로운 죽음을 원할 것입니다. 임무에 실패해 적에게 막대한 보상을 해주고 구출받는다면 그들의 명예는 땅에 떨어질 것이고, 그들의 남은 삶 역시 명예롭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은 원탁을 위해! 원탁에 가장 이득이 되는 결단을!”
나이트 위긴스는 경멸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저 개자식의 귀에다 대고 이 감정을 토해내지 못한다는 것이 한이었다.
‘네 명예를 위한 것이겠지, 이 개자식아.’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저따위 개소리를 늘어놓는단 말인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들을 구해야 하는 게 정상적인 사고방식 아닌가.
그러나 나이트 위긴스의 속을 더 뒤집어놓고 있는 것은 다른 나이트들의 반응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점이었다. 개중에는 대놓고 나이트 르보의 의견에 동조하는 이들마저 있었다. 딱히 동조를 하지 않는 이들도 나이트 르보를 경멸하지는 않는 듯했다.
“숭고한 희생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숭고한 희생은 무슨, 빌어먹을!”
마침내 나이트 위긴스가 폭발하고 말았다.
“인질로 잡혀 있는 게 당신이라 해도 숭고한 희생 운운할 것인가! 사로잡혀 있는 이들에 대한 예의는 눈꼽만큼도 없소?”
“그들에 대한 예의를 알기 때문에 이런 의견을 내는 것이오, 나이트 위긴스! 당신의 나라에도 기사도라는 것이 있을 텐데?”
“기사도에 그딴 병신 같은 방식은 없소!”
“그건 참 안타까운 일이군.”
나이트 위긴스가 막 발작하려는 찰나, 마스터가 입을 열었다.
“그만.”
그 순간,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만 있는 곳이라면 몰라도 마스터의 앞에서 설전을 벌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양측의 의견이 모두 일리가 있소.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하게 해결할 일이 아니오. 우선은…… 어떤 조건을 제시해야 그 강진호라는 자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부터 고민해 보는 것이 맞을 것이오. 우리의 예상보다 적은 것을 요구한다면 들어주는 것도 방법이겠지.”
“하나 마스터!”
“그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소. 다들 머리를 식히고 오시오. 폐정하겠소.”
마스터의 목소리가 조금의 짜증을 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이들은 아무 말 없이 화면에서 빠져나갔다. 모두가 빠져나간 뒤에 남은 것은 나이트 위긴스와 마스터, 둘이었다.
“나이트 위긴스.”
“예, 마스터.”
“만약 엘레나를 통해 강진호라는 자와 접촉할 수 있다면…… 시도해 주시오. 뜬구름을 잡을 수는 없소.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손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을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나이트 위긴스가 조금의 의혹을 가지고 물었다.
“마스터, 다만…… 조금 전의 나이트 르보의 발언에 관해서는…….”
“원탁보다 중요한 것은 없소.”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나이트 위긴스는 더 캐묻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질문이 마스터를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사과해야겠소, 나이트 위긴스. 그대의 경고를 깊이 생각하지 않아 상황을 여기까지 몰고 온 나의 무능을 용서하시오.”
“아닙니다, 마스터. 저 역시 정보원의 의견이라 보고했을 뿐, 그것이 사실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라도 마찬가지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 말해주니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군.”
마스터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손을 들어 얼굴을 문질렀다. 깊은 주름이 배어 있는 손이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세상을 위해 고통받아 왔는지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폰 엘레나의 의견대로라면 강진호는 더없는 위험인물이오. 그에 대한 전면 재조사가 필요할 것이오.”
“완벽히 해내겠습니다.”
“그럼.”
이윽고 마스터마저 화면에서 사라지자, 나이트 위긴스가 의자 깊이 몸을 기댔다.
“밖에 누구 있나?”
“예, 나이트.”
“맥주! 시원한 맥주를 가져와. 당장!”
“예.”
나이트 위긴스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미지의 존재 같군.’
강진호는 지금까지 그들이 상대해 온 이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리고 행동 방식조차 예측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엘레나의 보고와도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만약 그가 엘레나가 보고한 것처럼 협상 자체가 불가능한 괴물이라면 슈발리에들은 모두 죽었어야 한다. 하지만 그 비상식의 괴물은 지금 슈발리에들을 인질로 잡고 그들에게 엿을 먹이고 있었다.
우주에서 에일리언을 조우하면 이런 기분일까?
지금까지 알고 있던 상식이 모두 틀어지는 위화감에 위긴스는 몸을 떨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강진호와의 유일한 접점이 엘레나라는 거지.’
그녀의 능력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가 만약 자신의 딸이 아니었다면, 그는 서슴없이 그녀를 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부녀 관계이기에 더 믿지 못하는 일도 세상에는 종종 벌어진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신경도 쓰지 않을 작은 단점이 자꾸 눈에 거슬리는 것이다.
‘점잔 떨고 있을 때가 아니야.’
강진호가 어떤 인물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더없이 중요한 일이다. 그 어떤 요원을 보내 일처리를 맡긴다 해도 보고를 100% 신뢰할 수 없을 만큼 말이다.
그렇다면 그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한국으로 가야겠어.”
지금 맡고 있는 일들을 최대한 빨리 끝내야겠다고 생각하는 나이트 위긴스였다.
“얼마나 대단한 괴물인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주지.”
머릿속에서 피와 살육에 굶주린 강진호의 이미지를 디테일하게 만들어내며 위긴스가 숨을 들이켰다.
* * *
“왜 왔어?”
“……난 오면 안 되냐?”
“그런 건 아닌데, 뜬금없으니까.”
한진성은 보육원 안으로 들어오는 강진호를 보며 혀를 찼다.
“또 갈 데 없어서 시간 때우러 왔지?”
“…….”
“참 형도 병이다, 병. 그 얼굴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보육원에는 별일 없지?”
“별일 있을 게 뭐 있어. 다 그런 거지.”
태연한 한진성의 대답에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을 봐도 편안해 보이는 게, 보육원은 다시 안정을 찾은 모양이었다.
“누나 중국 갔다며?”
“음…….”
“그냥 보내줬어?”
“응?”
“……아니다.”
한진성은 뚱한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진짜 병이야, 이 인간.’
예전 그가 어릴 때에는 강진호가 슈퍼맨으로 보였다. 그가 아는 한 강진호는 못하는 것이 없고, 박유민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남자였다.
그런데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다 보니 강진호는 사회 부적응자에 가까웠고, 박유민은 착하기만 한 호구 게임 폐인이었다.
‘어디 가서 사기라도 안 당하면 다행이지.’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러고 산단 말인가.
남들은 능력이 조금만 있어도 인생을 즐기고 사느라 바쁜데, 한창때의 남자가 해만 지면 보육원으로 슬금슬금 들어와 거실에서 뒹굴대고 있으니 속이 뒤집어질 지경이었다.
“오빠!”
하지만 여자애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강진호를 발견한 여자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리고 어린 남자아이들도 어버어버 하며 강진호에게 다가왔다.
강진호는 그 아이들을 일일이 다독이고 안아주었다.
머리가 굵은 남자아이들도 슬금슬금 다가와 인사를 했다. 강진호가 기특하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은근 기분 좋은 티를 냈다.
“연예인 납셨네, 연예인.”
“저거, 또 왜 입 툭 튀어나와서 저러냐?”
“냅 둬. 사춘기야.”
“저 나이에?”
“정신연령이 어리잖아. 남들 중학생 때 겪는 거 이제 와 치른다고 저러고 있다.”
묵묵히 주변 설명을 들은 강진호가 안쓰럽다는 얼굴로 한진성을 바라보았다.
“아니라고!”
한진성은 필사적으로 항변했지만, 강진호는 혀를 찰 뿐이었다.
“밥은?”
“먹었지. 요즘 밥 안 먹는다고 하면 반항한다고 뭐라고 하셔.”
“밥을 왜 안 먹어?”
“……사람이면 안 먹고 싶을 때도 있지.”
“진짜 사춘기냐?”
“아니라고!”
한진성이 가슴을 팡팡, 쳤다.
강진호는 그 광경을 보며 웃었다.
돌이켜 보면 그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한진성은 초등학생이었다. 숙제도 제대로 못해서 징징대던 녀석이 저만큼 커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가슴이 따뜻해져 왔다.
‘나는 이곳에서 어떤 존재일까?’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 녀석들이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까?
원장 선생님만큼은 아니더라도, 박유민만큼은 아니더라도 이 아이들에게 좋은 의지처가 되어준 걸까?
답은 알 수 없었다.
그건 강진호가 정하는 게 아니니까. 강진호는 그저 그럴 거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묻는다 해도 진심은 나오지 않을 테니까.
“별문제가 없다니 다행이다.”
강진호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 있는데.”
하지만 한진성의 말과는 다르게 조미혜가 조용히 속삭였다.
“응?”
“진성이 오빠 성적 떨어져서 난리 났어. 저러다가 대학도 못 가겠어.”
강진호가 굳은 얼굴로 한진성을 바라보았다.
“……아니. 형, 그게 아니고…….”
한진성이 떠듬떠듬 변명을 했다.
사실 성적이 떨어지기는 했다. 학교에서 괴롭히는 놈들을 피해 책상에 붙어 공부나 하던 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친구들이 많이 생기다 보니 자연히 공부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말았다. 성적이란 건 정직한 것이라 공부하는 시간이 줄어들자 성적도 자연히 떨어졌다.
강진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
“그, 그렇지? 역시 형은 뭘 좀 안다니까.”
“다만, 학생의 전부이긴 하지.”
“…….”
한진성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강진호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뭐라고 할 생각 없으니까 인상 펴. 공부 좀 못할 수도 있지.”
“그렇지. 역시 형은…….”
그때, 조미혜가 바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오빠.”
“응?”
“다른 애들은 학원도 다니고 해서 나름 성적 잘 나오는데, 우리는 혼자 공부하니까 아무리 해도 성적이 잘 안 올라. 속상해.”
“…….”
“좋은 대학 가서 좋은 곳에 취직하고 싶은데, 이러다가 대학도 제대로 못 가면 어쩌나 싶어서…….”
강진호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비상 대책 회의를 소집한다.”
긁어 부스럼을 만든 조미혜를 향해 원망의 시선들이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