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487
#486.
교육하다 (1)
“……지옥 같다.”
수업이 끝났다.
보통은 하루 중 이 시간이 가장 즐거운 시간이겠지만, 오늘만큼은 이 시간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대충 오늘 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하고 있다 보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영 껄끄러웠던 것이다.
“또 무시무시한 짓을 시작하겠지.”
저 강진호의 가장 대단한 점과 가장 끔찍한 점은 기이하게도 동일했다. 바로 추진력이 무시무시하다는 것이다.
뭔가 하나 이야기가 나왔다 싶으면 뒤로 미루는 법이 없다. 부작용이 있든 말든 불도저처럼 밀어붙여서 결국에는 해결해 버린다.
“그런데 결과까지 좋으니 불만도 못 가지고.”
한진성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유능한 상사 밑에 있으면 사원들이 괴롭다고 하더니, 아직 취직도 안 한 한진성이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이건 불행이었다.
오늘 돌아가면 보나마나 강진호가 다채로운 해결책을 만들어놨을 것이다. 그것도 매우 합리적이고 완벽한 방식으로 말이다.
거기까지는 참 좋은 일이지만…….
“나는 공부하기 싫다고!”
한진성이 소리를 지르자 주변 아이들이 혀를 찼다.
“패기 보소.”
“여기서 이미 사회 낙오자가 하나 발생했구나. 좋은 일이지.”
“시끄러, 인마!”
“낄낄낄낄.”
친구들이 엿을 먹였지만, 한진성은 무시하고 밖으로 나왔다.
“어디가? 피시방이나 가자니까? 공부도 하기 싫다는 놈이 뭐 이리 집에 못 가서 안달이냐?”
“오늘은 가야 돼.”
“집에 뭐 숨겨놨냐?”
“……그럼 다행이게. 집에 지옥문이 열려 있다. 휴, 간다.”
손을 흔들며 밖으로 나온 한진성이 얼굴을 비볐다.
‘내가 이렇게 소리를 칠 수 있게 된 것도 다 형들 덕분이지.’
강진호가 전면에 나서자 변화는 드라마틱했다.
작은 계기만으로 한진성의 삶은 극적으로 변했다. 그를 괴롭히던 유다빈이 박살 나고, 주변 아이들도 한진성에게 접근하지 않게 되면서 미묘한 권력 변화를 감지한 아이들은 은근히 한진성과 친해지기를 원했다.
한동안은 그런 태도 변화에 역겨움이 밀려오기도 했지만, 그 아이들 역시 한진성처럼 유다빈에게 눌려 있던 이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조금 편해질 수 있었다.
강진호가 살짝 움직인 것만으로도 그의 편안한 학교생활이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능력치는 정말 쩔어주는 것이지만…….
‘방향성이 문제라고!’
이번에는 그 쩔어주는 능력치가 그를 괴롭히는 데 사용될 것이다. 웬만하면 공부와는 담을 쌓고 싶은 한진성이지만, 과연 강진호가 그것을 용납할 것인가.
한진성이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교문을 나섰다.
“……예상대로군.”
보육원으로 돌아오자마자 그가 본 것은 거실에 바글바글 모여 있는 아이들이었다. 중학생까지는 부르지 않았는지 고등학생들만 모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여러 문제로 인해 특수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다 제외되었고,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만 모여 있는데…….
‘뭐가 이리 많아?’
새삼 이 보육원의 아이들 수가 장난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도 많았지만, 보육원에 지원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여기저기 상황이 어려워진 다른 보육원 아이들을 하나둘 받다 보니 이제는 ‘영세’라는 말을 붙이기 어려운 수가 되었다.
마치 게임에서 인구수가 늘어난 마을이 도시로 승격하듯이 성심 보육원도 차근차근 인원과 영향력을 늘려 나가고 있는 것이다.
한진성의 눈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조미혜였다.
“야.”
“응?”
“너, 이 사태 어쩔 거야?”
“뭐가?”
“왜 괜히 긁어 부스럼이야? 네가 그 말 하는 순간에 저 양반들이 어떻게 나올지 빤히 알면서.”
“내가 뭐 못할 소리 했어?”
“아니!”
“됐고!”
조미혜가 단호하게 한진성의 말을 잘랐다.
“내가 틀린 말 한 거 아니잖아. 나도 공부 죽어라고 열심히 하는데, 과외 받고 학원 다니는 애들을 못 따라가는 걸 어쩌라고.”
“그럼 네 머리를 탓해야지.”
“웃겨. 내가 머리가 안 좋았으면 지금 성적까지 나오겠어? 교과서로 열심히 공부했다 소리가 신문에서도 사라진 지가 옛날인데, 언제까지 맨땅에 헤딩하라고.”
“…….”
“그리고 오빠들이 해결을 못해줄 것 같으면 말도 안 했지. 그런데 오빠들이면 무슨 방법이라도 만들어줄 거 아냐.”
“너 때문에 형들한테 부담 가는 건 생각 안 해?”
“야, 이 멍청아! 내가 공부를 잘해야 성공할 거고, 그래야 나중에 오빠들한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거 아냐! 오빠들은 장가 안 가고, 자기 가정 안 꾸려? 나중에 그렇게 됐을 때도 애들 일 처리하려고 쪼르르 달려와야 해?”
한진성이 움찔해서 뒤로 물러났다. 조미혜의 기세가 그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만큼 받아먹었으면 뭐라도 돼서 보답할 생각을 해야 할 거 아냐! 오빠들한테 우리가 할 수 있는 제일 큰 보답이 내가 성공해서 보육원에 도움이 되는 거라는 생각은 안 해?”
“……아니, 내 말은…….”
“오빠는 제발 철 좀 들어! 지금 공부하기 싫다고 징징대고 있을 때야? 평범한 집에서 사는 애들도 그 나이면 좋은 대학 가보겠다고 이 악물고 있을 땐데, 오빠는 대체 뭔 배짱으로 그렇게 놀기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대충 살다가 나중에 나이 먹고서도 오빠들한테 손 벌리고 있어봐. 내가 머리채 다 쥐어뜯어 버릴 테니까.”
완벽하게 격추된 한진성이 고개를 푹 숙이고 구석으로 갔다. 그러자 주변에서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그러게 왜 긁어 부스럼이야.”
“말로는 못 이겨.”
“솔직히 형이 좀 놀기는 했지.”
위로인지 막타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여러 말이 그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조미혜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너희도 똑바로 들어.”
“응?”
“사람은 염치가 있어야 하는 거야. 이만큼을 받아먹었으면 어떻게든 보답할 생각을 해야지. 솔직히 진호 오빠나 유민이 오빠가 우리한테 어떻게 해줬어? 웬만한 부모보다 잘해줬잖아.”
“그렇지.”
“그런데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야.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누군데?”
한진성은 머릿속에서 ‘부모’라는 두 글자를 떠올렸다. 부모에게서 버림받아 보육원으로 왔다는 트라우마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벗어날 수 없는 천형과도 같았다.
가장 보고 싶으면서도 가장 증오하는 이. 그게 그들에게 있어서의 부모였다.
하지만 조미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달랐다.
“졸업하고 한 번도 얼굴 안 들이미는 것들이야.”
“…….”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유민이 오빠나 진호 오빠가 자기들 돈 들여가며 얼마나 잘해줬어? 그런데 이 짐승 같은 것들이 졸업하더니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제 살길만 찾고 있잖아. 사람이라면 그래서는 안 되는 거야. 어떻게든 자기가 받은 걸 갚으려고 해야지. 어떻게든 성공해서 오빠들 부담을 덜어줘야지.”
한진성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 먹은 욕이 워낙에 많아서 동조해 주고 싶지는 않지만, 조미혜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그러려면 성공해야 돼. 지금 오빠 등골을 조금 더 빼먹더라도 나는 반드시 성공할 거야. 그래서 나중에는 오빠가 굳이 보육원에 일일이 찾아오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어줄 거야. 월급을 주든 봉사를 하든 어떻게든 말이야!”
살짝 낮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들 중에서 조미혜가 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이는 없었다.
그동안 그들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과 새로운 시각에 대한 고민이 거실을 흘렀다.
“그러니까 지금은 오빠들을 괴롭히더라도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해. 오빠들 좀 편히 만들어주자고 그럭저럭 살다 보면 나는 나중에 오빠들에게 도움되는 사람이 될 수 없단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왜 또 날 보고 그러냐?”
“오빠가 제일 문제니까 그렇잖아! 그래도 3학년 오빠들은 나름 공부라도 열심히 하려고 그러는데, 오빠는 왜 그래?”
“……나는 빨리 공장이라도 취직하려고 그랬지.”
“그건 해보고 안 될 때 하는 거지.”
“아니…….”
그때, 문이 열리고 조규민과 강진호, 박유민이 안에서 나왔다.
“앉아, 앉아.”
조규민이 말을 하자 아이들이 방에 빙 둘러앉았다.
“흐음, 어디부터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처음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 누구지? 요즘 공부하기가 힘들다고?”
조미혜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래. 먼저 이야기를 했다는 게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에 대해서 가장 깊이 생각을 해봤을 것 같구나. 그럼 뭐가 문제인지 들을 수 있을까?”
“다요.”
조미혜가 깔끔하게 말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문제예요.”
“그걸 다 말해줄 수 있어?”
“네.”
조미혜가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말했다.
“예를 들어 문제집 한 권을 사려고 해도 시간이 너무 걸려요. 제 용돈으로 사지 않는 이상 필요한 걸 이야기하고, 그걸 보육원 선생님들이 결제를 올리고, 결제가 떨어져서 누가 그 책을 구입해서 저희에게 주는 시스템인데, 이 과정에서 일주일은 쉽게 날아가요.”
“음…….”
조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점은 문제가 있었다.
“더구나 다른 애들은 혼자 문제집으로 자습만 하는 것도 아니고, 학원도 다니고 있는 집 애들은 나름 과외도 받고 하는데……. 선생님들도 그런 애들 위주로 진도를 잡고 공부를 시키다 보니 따라잡는 게 너무 버거워요.”
“그렇구나. 시간은 어때?”
“시간적인 문제는 괜찮은 것 같아요. 등하교 시간을 좀 줄일 수 있으면 공부를 더 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거야 다른 애들도 겪는 문제니까요.”
“알겠다.”
조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가 심각하다기보다는 조금 복잡하네. 간단히 해결할 방법은 너희를 학원에 보내고 원하는 책을 바로바로 사 줄 수 있게 만드는 거겠지만, 그건 상처를 아물게 하는 방법이지 흉터를 없애줄 수는 없겠지. 이미 벌어져 버린 차이를 어쩔 수 없을 테니까.”
“네.”
“그럼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건데…….”
조규민이 코 어림을 어루만졌다.
“문제는 이 중에서 그 특단의 대책이라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거지. 솔직히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잘 짜여진 시스템이나 너희를 상위권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수준 높은 교육이라는 것도 원하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겠지만,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고문이거든.”
“…….”
“사람의 적성은 다 다르잖아. 그런데 공부가 적성에 안 맞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은 다른 애들에게도 피해를 주고 너희를 가르치는 사람의 열정을 꺾는 짓이지. 그래서 대책을 세우기 전에 먼저 할 사람만 남았으면 좋겠다.”
조규민의 눈은 단호했다.
“어떻게든 성적을 올려보고 싶다는 사람만 거실에 남자. 우리가 다시 들어갔다 5분 뒤에 나오마. 5분 뒤에 여기 남은 사람들만으로 진행해 보는 걸로 할게. 5분이다.”
조규민은 길게 말을 하지 않았다. 설명을 더 한다는 건 남아달라는 요구와 다르지 않다. 강진호와 박유민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간 조규민이 문에 기대 한숨을 쉬었다.
“여러 가지를 해야 하네요.”
“많이 남을까요?”
“글쎄요.”
조규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애초에 공부라는 것은 억지로 시킨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이 없다면 다른 진로를 알아보는 것이 옳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
“많이 남는 걸 기대하지 마세요. 그건 남지 않는 애들이 잘못되었다는 뜻이니까요. 우리가 해야 하는 건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애들에게 공부를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거지, 공부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애들을 끌고 가는 게 아니니까요.”
“……역시 조 실장님.”
박유민의 존경 어린 시선을 받으며 조규민은 자신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었다.
저런 눈빛을 받아본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그러니 절대 표정 변하지 마세요. 실망했다는 기색도 내보이지 마시구요. 아셨죠?”
“예.”
“그럼 나갑시다.”
박유민에게 당부를 하고 문을 연 조규민이 입을 슬며시 벌렸다.
“뭐, 뭐야?”
문밖에 뜻밖의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