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490
#489.
교육하다 (4)
드높은 제단.
붉은색의 융단이 깔려 있는 계단 위의 옥좌에 한 남자가 앉아 있다. 다른 이들보다 두 배는 될 것 같은 거대한 육체는 사내의 위엄을 더없이 빛나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거대한 육체마저도 지금 제단의 아래에 서 있는 남자에 비한다면 연약하다고 해야 할 수준이었다.
비정상적으로 넓은 어깨와 이상하리만큼 두꺼운 육체. 길게 자라난 턱수염을 보자면 역사 속의 장비가 현신하면 이런 모습이겠거니 생각하게 된다.
기형적일 정도로 발달한 상체는 남성미를 넘여 야수미를 뿜어내고 있었다.
제단 위의 사내와 제단 아래의 사내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두 사내의 대치를 보며 차이커창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두 사람이 만나는 광경은 사실 그가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그 압박감을 떠나서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카드 하나가 소모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바토르.”
홍왕이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말을 시작했다.
“좋아 보이는군.”
“잘도 지껄이는군.”
바토르가 홍왕을 보며 이죽거렸다. 중국의 삼왕. 무인들의 우상이자 이 시대의 무인계를 지배하는 지고한 이를 보고도 바토르라 불린 사내는 조금의 존경심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나를 불렀다고 했나, 홍왕?”
“그랬지.”
“그 말은 우리의 계약이 끝난다는 것을 의미하겠지?”
“물론이다.”
“좋군, 좋아. 너무 긴 기다림이었지.”
바토르가 홍왕을 노려보았다.
홍왕은 그 광경이 기껍다는 듯 웃었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 너는 내게 적의를 드러내서는 안 돼.”
“하지만 곧 그리될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니, 그리 속단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차이커창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과거, 바토르는 홍왕에게 도전을 했다. 홍왕은 그의 도전을 받아주는 대가로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패배한 자가 승리한 자의 한 가지 명령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
그 승부에서 바토르는 패했고, 지금까지 홍왕이 명령을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홍왕의 명을 완벽히 이행하는 순간, 바토르는 다시 자유의 몸이 될 것이고, 홍왕에게 다시 도전할 수 있을 테니까.
‘빌어먹을, 이 좋은 카드를 이렇게 써야 하다니.’
바토르는 무자비한 전사였다.
애초에 홍왕에게 도전할 마음을 품는다는 것부터가 그가 얼마나 저돌적이고 강한 전사인가를 증명한다. 그리고 홍왕이 그를 그냥 죽여 버리지 않고 자신의 명을 듣게 만들었다는 사실도.
이만한 전사는 중국 본토를 모두 뒤진다고 해도 쉽게 만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를 고작 이런 일에 소모해야 하다니.
“명령은?”
“네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그전에…….”
바토르가 홍왕의 말을 끊었다. 차이커창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 가지 확인부터 하지. 이 일이 끝나는 순간, 나는 네게 다시 도전하겠다. 내게 그럴 자격은 있겠지?”
“물론이다. 바토르, 초원의 전사여. 그대에게는 언제나 그럴 자격이 있다.”
“좋아. 말하라.”
“그대가 할 일은 아주 간단하다. 한국으로 가라. 그리고 한 사내를 죽여라.”
“…….”
바토르의 얼굴에 의혹이 차올랐다.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그렇다.”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창왕이 한국으로 갔는가?”
“그럴 리가.”
“……그럼 그게 무슨 뜻인지 설명을 요구하고 싶은데.”
“차이커창.”
차이커창이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저분은 가끔 너무 심한 요구를 하신다니까.’
그에게 있어서 바토르야 지나가던 무인 중 하나에 불과하겠지만, 차이커창의 입장에서는 정말 상대하고 싶지 않은 존재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차이커창이 바토르에게 강진호에 대해서 설명했다.
모든 설명을 들은 바토르가 고개를 돌려 홍왕을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내게 그 애송이를 죽이고 오라는 건가?”
“그렇다.”
바토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홍와아아아아앙!”
폭탄이 터지는 듯한 거대한 음성이 대전을 쩌렁쩌렁 울렸다. 차이커창이 귀를 틀어막고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뇌 속이 곤죽이 되는 느낌이었다.
듣는 이의 고막을 터뜨릴 듯한 거대한 사자후가 터졌지만, 홍왕은 꿈쩍도 하지 않고 턱을 괸 채 바토르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초원의 전사를 무엇이라 생각하는 것인가! 겨우 이따위 일을 맡기기 위해서 나를 그 오랜 시간 동안 잡아두었다는 것인가!”
“이따위 일?”
홍왕이 살짝 비웃는 듯한 얼굴로 바토르를 바라보았다.
“바토르, 내 오랜 친우여.”
홍왕의 목소리가 낮아지자 바토르도 입을 다물고 홍왕을 노려보았다.
“충고 하나 하지. 그런 마음으로 한국으로 간다면, 너는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내가 죽는다는 건가?”
“높은 확률로.”
“물론 나는 네게 패했다.”
바토르의 목에서 거대한 투기가 뿜어져 나왔다. 옆에 서 있는 차이커창이 식은땀을 줄줄 흘릴 만큼 거대한 투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무시할 수는 없다. 나는 바토르! 초원의 전사다!”
“나는 너를 무시한 적이 없다.”
“…….”
겉으로는 투박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바토르는 결코 멍청한 이는 아니었다.
“강진호라는 놈이 그리 강하다는 건가?”
“네 예상보다 몇 배는.”
“내가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라는 건가?”
“지금 같은 마음가짐이라면 나는 굳이 너의 도전을 기다릴 필요가 없겠지.”
바토르가 이를 갈았다.
워낙 골격이 크다 보니 이를 가는 소리도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과연 그놈이 네가 인정할 만큼 대단한 놈인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그놈의 목을 들고 오겠다. 그때가 네 목이 떨어지는 순간이다. 기다려라, 홍왕.”
바토르가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 나갔다. 홍왕은 그 광경을 보며 나직하게 웃었다.
“정말 곰 같은 놈이군.”
“그렇습니다.”
“보이는 모습에 비해서 나름 똑똑한 것조차 곰을 닮았어.”
차이커창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부심과 자신감이 가득한 이들은 타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바토르는 홍왕의 말을 듣자마자 자부심을 버렸다.
오만함을 버린 바토르가 진심으로 달려든다면 아무리 강진호라고 하더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바토르는 그런 평가를 들을 자격이 있는 전사였다.
“바토르가 갔으니, 강진호도 여기까지입니다.”
“그래야겠지.”
홍왕은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그리된다면 다행이겠지, 그리된다면.”
“예?”
“바토르는 강하다. 아무리 마인이라 할지라도 그를 감당할 수는 없다.”
“예.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감당해 낸다면?”
“…….”
홍왕이 낮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 강진호라는 놈은 몇 번이나 보정을 가한 나의 평가마저도 뛰어넘는 존재라는 거겠지. 내 예상보다 몇 배는 더 빠른 속도로 강해진다는 뜻이다. 그 말은…….”
홍왕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차이커창 앞에서 할 말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결할 것인가는 그의 계산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저 작은 반도의 땅에서 새로운 왕이 태어나는 꼴이 될 것이다.
아직은 어리고 작은 왕이지만 말이다.
“바토르에게 전해라.”
“예.”
“무뎌진 도끼의 날을 날카롭게 갈지 않으면, 두 번 다시는 도끼를 사용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예, 홍왕이시여.”
고개를 숙이면서 차이커창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홍왕답지 않으시다.’
이미 홍왕은 비슷한 말을 바토르에게 전했다. 그럼에도 이 말을 다시 전하라는 것은…… 홍왕이 바토르가 강진호를 상대한다는 사실에 일말의 불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강진호가 정말 그 정도의 존재인가.’
홍왕의 눈을 의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차이커창은 의혹을 버릴 수 없었다. 바토르는 모두가 인정하는 강자다. 차이커창의 상식으로는 강진호를 얼마나 빨리 처참하게 죽이는가의 문제일 뿐, 바토르가 강진호에게 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홍왕이 과연 강진호를 과평가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강진호가 그렇게나 두려운 존재인지는 바토르가 증명해 줄 것이다. 차이커창은 살아생전 처음으로 바토르를 응원하는 심정이 되었다.
* * *
“강사진을 꾸린다구요?”
“네.”
조규민의 말에 강진호가 조금은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아뇨. 생각과는 달라서요. 저는 조 실장님이 직접 가르치든가, 그런 방식인 줄 알았는데.”
“아마추어적이죠.”
조규민이 여유롭게 담배를 물었다.
“뭐라고 할까, 그런 건 있습니다. 제가 지금 아이들을 직접 가르친다고 해도 특급 강사에 비해 그렇게 뒤떨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라고 할까요?”
박유민은 마음속에 추가해 놓은 ‘재수 없음’ 항목에 강조하듯 빨간 줄을 쳤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가.’
“공부로 남에게 뒤져 본 적은 없으니까요. 나름 노하우도 있고 해서 가르치지 못할 것도 없지만. 일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하는 법이죠. 더구나 과목이 워낙 많지 않습니까. 그걸 제가 일일이 다 가르치다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음…….”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조규민이 그렇다니까 그런 거겠지.
“그럼 강사진은 얼마나?”
“대부분은 완성했습니다. 핵심 과목 위주로요.”
“벌써요?”
“말씀드렸잖습니까. 돈으로 안 되는 건 없습니다. 그리고 이쪽에서 던져 줄 좋은 먹잇감도 있습니다.”
조규민의 설명을 들은 강진호와 박유민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조금 이견이 있는데요.”
“예?”
“아이들이 그 사람들에게 배웠다는 것을 홍보하는 건 안 할 수 없을까요? 아무래도 아이들의 자존감 문제도 있고, 홍보하는 과정에서 보육원 이름도 나가고 할 텐데……. 그게 꼭 좋은 일은 아니라서요.”
“음…….”
조규민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는 그거 홍보한다고 말씀을 드린 적이 없는데요?”
“네? 조금 전에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고…….”
“그건 그냥 그쪽에다 그리 말을 한다는 거죠. 제가 뭐 그 부분을 계약에 넣은 것도 아닌데, 굳이 지켜야 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
“원래 계약이라는 건 다 그런 겁니다. 그중에서 확실한 것만을 파악해서 문서화하기 전에는 의미가 없는 것이죠. 여러분도 나중에 이런 부분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후후후후후.”
강진호와 박유민이 아연한 얼굴로 조규민을 바라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아, 아니요.”
기분 좋다는 듯이 웃는 조규민을 보며 박유민은 자신의 평가 항목에 ‘사기꾼’이라는 항목을 추가했다.
날이 갈수록 능력적 평가는 올라가고 인간적 평가는 낮아지는 조규민이었다.
“그런데 돈이 많이 들지 않나요?”
“많이 들었습니다. 잘나가는 강사진을 섭외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엄청 많은 돈이 듭니다.”
“그 돈은 어떻게?”
“뭘 걱정하십니까?”
조규민이 웃으며 강진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여기 평생 써도 못 쓸 돈이 통장에서 썩어나는 분이 계신데. 좋은 일에 써야죠.”
어쩌면 빈대 항목도 추가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