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491
#490.
교육하다 (5)
“스케일이 해도해도 너무하잖아.”
한진성은 학교 앞에 대어져 있는 버스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처리가 빠르다는 것은 세상 어디에서도 칭찬을 받을 일이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일처리가 빠르고 정확하다면 모두가 환영할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자신만 빼놓고는 말이다.
“사람이 따라갈 만한 속도로 뭔가 진행을 해야 마음의 준비라도 할 거 아냐.”
이 이야기가 나온 게 언젠데 벌써 버스까지 준비해서 하교하는 애들을 실어 나른다는 말인가.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이 하교하자마자 학원 버스를 타고 학원으로 가는 케이스야 자주 봤지만, 그건 학원이고.
학원을 차린 것도 아닌데 이게 무슨…….
“아, 형! 빨리 타!”
창문으로 머리를 내민 아이들이 한진성을 재촉했다. 이미 다른 학교에서 픽업할 애들은 데려온 모양이었다.
“……썩을.”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느낌이었다.
‘안녕, 피시방. 안녕, 내 사랑하는 게임들아.’
이제 정말로 모든 것을 접고 공부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그는 사나이 한진성이 아니던가. 본인이 선택한 길이다. 한 점 후회는…….
“없기는 개뿔.”
짜증을 있는 대로 부리며 한진성이 버스에 올랐다.
“왜 이거밖에 없어?”
“형이 마지막이야.”
“응?”
“다른 애들은 다른 버스가 태우러 갔어. 버스 하나로 돌면 시간 걸린다고 버스 세 대 돌린대.”
“미쳤네, 진짜.”
그럴 거면 버스 크기라도 줄이든가. 겨우 여섯을 태우려고 리무진 버스를 돌린다니…… 스케일이 커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뭔가 우리 돈 많은 집 아들내미 같지 않아?”
“뭐래? 거지가.”
“기분이라도 좀 내자, 기분이라도!”
한진성이 피식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생각해 보면 돈 많은 집 애들도 이런 일은 못 겪어볼 것이다.
“돈 많은 아빠는 없는데, 돈 많은 형은 있네.”
솔직히 그 형이 아버지보다 믿음직스럽다.
“……건물 빌렸다고?”
“그런가 봐.”
“아니, 뭐, 진짜…….”
한진성은 이제 더 이상 말도 하기 싫다는 얼굴이었다.
이 상황을 뭐라고 비유해야 할까.
강아지를 산 김에 아는 형더러 개집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더니, 아파트를 사 온 격이었다.
그냥 몇 안 되는 애들 옹기종기 공부할 수 있게 만들면 되지, 그거 공부 좀 시키겠다고 버스 대절해서 애들 실어 나르고, 공부방 만들겠답시고 건물을 빌리질 않나…….
“나, 가끔 생각하는 건데…….”
“응.”
“진호 형 머릿속은 우리랑 조금 다르지 않을까?”
“무슨 당연한 걸 이야기해? 진호 형에 비교하면 우리 뇌는 우동사리지.”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한진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장가를 보내야 돼.’
자식이 없고, 돌봐야 할 가족이랄 게 없으니까 사람이 돈 아까운줄 모르고 이런 ‘무식한’ 짓을 해 대는 것이다. 통장에서 돈 빠져나가는 게 무서운 줄 알아야 하는 건데.
그에 대해서 언젠가 한 번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결심하는 한진성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순간, 윗층 창문에서 조미혜가 고개를 빼쪽 내밀더니, 소리를 질렀다.
“오빠, 빨리 안 올라와!”
“…….”
“다 기다리잖아!”
“……그래, 모든 게 나의 죄다.”
한진성이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 안쪽은 아직 리모델링이 덜 끝났는지 여기저기 비닐이 붙어 있었다.
‘아니, 리모델링은 왜 하냐고!’
공부하는 데가 좀 칙칙하면 공부가 안 되나? 그런 썩어 빠진 정신으로 공부를 할 수 있겠냐, 이 말이다.
정 공간이 필요하면 적당한 사무실 하나 빌려서 하면 그만이지, 이게 뭔 돈지랄이란 말인가.
하지만 곧 이게 단순한 돈지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한진성이었다.
“……이게 뭐예요?”
“시간표.”
한진성은 자신의 앞에 놓인 시간표를 보고는 몸을 떨었다.
‘시간표?’
그러니까 이게 이동 수업이라는 건가? 그, 시간에 맞춰서 교실을 이동하고 수업을 받는…….
“좋은 방법이로군.”
아주 선진적인 방법이다. 특히나 보육원은 아이들의 수준과 나이대가 다르기 때문…….
“……은 개뿔! 무슨 짓거리야, 이게!”
한진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기 있는 애들이라 봐야 겨우 20명인데, 이걸 또 찢으면 대체 몇 명이 한 수업을 받는다는 건가.
“진성이, 시끄러워.”
박유민의 주의에 한진성이 털썩 자리에 앉았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이쯤 되면 그가 정상이 아닌 것인지, 그의 주변이 정상이 아닌 것인지가 헷갈릴 지경이다.
“자자, 빨리 이동하자.”
“네.”
한진성이 시간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A―4가 어디야?”
“오빠, A―4야?”
“응.”
“이상하네.”
“왜?”
조미혜가 아리송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A―4인데.”
“응?”
한진성의 얼굴에 불신감이 어렸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이고, 조미혜는 고등학교 1학년인데…… 같은 수업에 들어갈 리가 없지 않은가.
“형! 유민이 형!”
“응?”
“이거, 시간표 잘못 됐어요. 저랑 미혜가 같은 반인데? 제 거 잘못 주신 거 아니에요?”
“어, 그게…….”
박유민이 곤란하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상황을 지켜보던 조규민이 환하게 웃으며 박유민을 도와주었다.
“아니다. 제대로 된 거야.”
“네? 아니…… 얘는 1학년이고, 저는 2학년인데…… 반이 같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학년은 중요하지 않다. 수준이 중요한 거지.”
“네?”
조규민이 웃으면서…… 그러니까 무척이나 재수 없게 환하게 웃으면서 설명을 했다.
“아무래도 최선의 결과를 보려면 수준별 학습이 중요하거든. 그래서 일정한 기준으로 수준을 나누고 반 배치를 했어. 여기서 계속 평가를 해서 또 반을 바꿀 거야. 그러니까 열심히 해라.”
“그럼 지금 저하고 얘하고 수준이 비슷하다는 거예요?”
“그렇지.”
한진성은 도저히 이 상황을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 저는 그래도 1년 더 배웠는데, 어떻게 얘하고 수준이 같을 수가 있어요? 대체 그 근거가 뭔데요?”
“잠시만.”
조규민이 뒤쪽 책상 위에 놓아둔 서류철을 꺼냈다.
“여기 너희가 그동안 받아온 성적표가 모두 있는데, 원한다면 공개할까?”
“잘못했습니다.”
빠른 GG를 친 한진성이 허탈하게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앉을 게 아니라 이동해야지.”
“……네.”
터덜터덜 걸어서 교실 밖으로 나가는 한진성에게 조규민이 어깨동무를 했다.
“진성아.”
“예?”
“원래는 더 내려가야 되는데, 내가 그래도 네 체면이 있어서 저쯤으로 맞춘 거야. 열심히 해서 형이 반 잘못 나눴다 소리 안 나오게 해줘. 알았지?”
“…….”
지옥이다. 여기가 지옥이었다.
한진성의 지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같은 교실로 걸어가는 내내 조미혜가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를 한 번 볼 때마다 복부에 대미지가 쌓이는 기분이었다.
“같은 수준이라고 하니까 내가 기분이 좀 나쁘네.”
“죽인다.”
“뭐, 1년 더 배웠으니 그 정도는 인정해 줘야지.”
“진짜 죽일 거다.”
교실로 들어가자 책상 위에 교재가 놓여 있었다.
“어?”
교재를 본 조미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거, 민홍기 강사님 교잰데.”
“그게 뭔데?”
“내가 이 쌤 인강 들었거든. 국어로는 엄청 알아주는 분이셔.”
“교재 좋은가 보다. 여기서도 쓰는 거 보니.”
“네. 교재 만드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민홍기를 보고 조미혜가 비명을 질렀다.
“지, 진짜 선생님이야!”
“세상에는 사람이 많지만, 저를 따라올 수 있는 가짜는 별로 없겠죠.”
“와! 저 재수 없음까지! 진짜야! 진짜!”
민홍기는 오늘 자신이 그토록이나 찾아 헤매던 특이성이 이미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 나…… 재수 없구나.’
영혼이 맑은 건지, 뇌가 맑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 녀석 덕분에 좋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대가는 공부로 지불을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으득 갈아붙인 민홍기가 바로 교재를 펴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일단 실력부터 알아보고 하죠. 거기 학생 이름이 한진성이라고 했나?”
“……예.”
“지금부터 내 질문에 대답을 해주면 좋겠는데. 자, 시작하자.”
“……네.”
영혼이 날아가는 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 것 같았다.
첫날은 수업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자신이 맡아야 할 학생들의 수준과 성향을 간단하게 탐색하는 수준에서 대부분의 수업이 끝났다. 그렇게 늦은 밤까지 몇 개의 수업을 들은 애들은 한 버스에 올라서 보육원으로 돌아갔다.
“……죽자.”
“우리는 함부로 죽는 것도 안 돼. 재활용도 안 되는 폐기물들이라 쓰레기 봉투 값 들어.”
주르륵.
학원가에서도 유명한 강사들이 직접 와서 그들을 가르친다는 기쁨은 얼마 가지 못했다.
이내 강사들은 짠 듯이 그들의 실력을 낱낱이 파헤치기 시작했고,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정확한 수준을 직면한 이들은 절망에 빠졌다.
가야 할 길이 구만 리였다.
“그래도 진짜 대단하지 않아?”
“뭐가?”
“어떻게 저런 분들을 모아 왔을까? 공부에 관심 없던 나도 이름은 들어본 사람들이잖아.”
“……미친 거지.”
저 사람은 스케일병에 걸려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말조심해.”
조미혜가 눈을 부라렸다.
“진호 오빠가 우리 생각해서 일부러 돈 써서 해주는 건데, 말을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되지.”
“……안다, 알아.”
한진성 역시 그걸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다만, 그가 껄끄러운 것은 투자에 비해 나올 것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얼마나 성공해서 얼마나 강진호를 도와야 이만큼의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사람한테 부담을 너무 준다니까, 저 형.’
한진성이 슬그머니 가방 안으로 손을 넣었다. 가방 안에서 잡히는 묵직한 교재를 끄집어낸 한진성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해봐야지.’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건 아니다. 다만, 그도 사람이고, 염치가 있으니, 이만큼 해주는데 노력하지 않을 수는 없잖은가.
나이가 적당히 찬 그는 지금 강진호가 해주는 것이 결코 돈이 있다고 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용돈이 삼십만 원 들어와도 그중 천 원도 남 주기 아까운 게 사람이다. 이만한 돈이 아깝지 않을 리가 없었다. 설사 강진호가 이 돈을 아까워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게 고마움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갚을 수 없는 마음의 빚.
그게 자꾸만 쌓여 나가는 것 같아서 가슴이 답답해지는 한진성이었다.
‘적어도 노력이라도 하는 게 보답하는 길이겠지.’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노력하는 것이었다. 한진성은 조용히 투지를 불태웠다.
그리고 그 투지를 불태우는 모습을 본 조미혜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교재 가지고 왔네? 숙제도 없는데.”
“응?”
“남들은 사물함에 다 넣고 왔는데. 그거 공부하려고 가지고 온 거지? 우리 오빠, 철들었네.”
“사, 사물함이 있었어?”
“…….”
“…….”
조미혜의 얼굴이 급냉랭해졌다.
“오빠.”
“으응?”
“오빠는 정말 답이 없는 거 같아.”
“…….”
한숨을 쉬며 조미혜까 고개를 돌리자, 한진성은 처연한 얼굴로 창에 머리를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