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496
#495.
고민하다 (5)
채동혁은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그가 다니는 회사는 매우 평범한 무역 회사였다. 문제가 있다면 그가 상대해야 하는 나라가 중국이라는 것이고, 중국은 세상 모든 문제를 모아놓은 기이함의 집합체 같은 나라라는 점이다.
중국에서는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온갖 일이 다 벌어진다. 평범한 한국인으로 살아온 채동혁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온갖 일이 말이다.
무역 회사 직원의 사명은 뭘까?
다니는 회사에 따라서 다른 대답이 나오겠지만, 채동혁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였다. 매뉴얼에 정해져 있는 과정을 벗어나는 모든 오류와 의외성을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서 메인스트림에 합류시키는 것이다.
‘말이야 쉽지만…….’
이것은 매우 가혹하고 끔찍한 일이었다. 한국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장 큰 착각은 세상 모든 사람들은 적당한 상식에 따라 살아가고 말을 하면 통한다고 믿는 것이다.
한국을 벗어나게 되면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은 상식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특히나 최근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영향력을 뻗어 나가고 있는 중국에서는 더더욱 그런 경향이 심했다.
중국 기업은 당의 비호를 받고, 때로는 계약서마저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세상에 수많은 극한 직업이 있지만, 이 일도 결코 그 극한 직업에 뒤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채동혁이었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이 일을 시작한 이후로 한국에서 잠드는 날보다 중국에서 잠드는 날이 더 많다. 나름 중국 지사에 부임했다면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나 뭐 그리 큰 차이가 있는가 하는 마인드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맡은 일은 하필이면 중국 지사와 한국 본사를 연결하는 역할이고, 덕분에 침대에서 잠드는 날보다 비행기에서 잠드는 날이 더 많을 지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거기까진 괜찮다.
그래, 그럴 수 있다.
막말로 월급 타먹는 월급쟁이치고 이런 고충 없이 사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면 한 시간이라도 더 일해야 하는 게 월급쟁이의 인생인데.
‘그래도 이런 건 좀 그렇잖아!’
일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참을 수 있다. 진짜 그를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일이 아니라 일 외적으로 들어오는 태클들이었다.
예약한 호텔에 에어컨이 나오지 않는다든가, 정찰제로 들어간 호텔에서 가외비를 요구한다든가 하는 것 말이다.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영역이 침범당하는 스트레스는 어마어마했다.
지금도 그렇다.
“일인분 더 가능한가?”
그의 옆에 앉은 사람이 아까부터 그를 질리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일등석이다. 이번에 진상 중의 진상을 어떻게 잘 꼬셔서 커다란 계약 건을 따냈다는 이유로 사장이 통 크게 퍼스트 클래스를 예약해 준 것이다.
‘차라리 그걸 돈으로 주지.’
그 돈을 보너스로 준다면야 이코노미가 아니라 짐칸에 실려서 한국으로 돌아오라 한들 불만이 있겠는가. 그런데 이 사장 놈은 복지라는 개념은 알아도 보너스라는 개념은 머릿속에 없는 사람이다 보니 이런 식으로 돈 낭비를 하곤 한다.
그래도 아주 못 얻어먹는 것보다는 이런 식으로라도 얻어먹는 게 나으니 딱히 불만을 표할 생각은 없다만…….
채동혁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원래 퍼스트 클래스라는 곳은 돈 있는 사람들이 타는 곳이 아닌가. 물론 돈이 있다고 해서 다들 교양이 있고 품위가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대한민국만 해도 갑질 논란으로 홍역을 몇 번이나 치렀는데, 아직 그런 환상에 사로잡혀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건 정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채동혁이 슬그머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의 눈에 말 그대로 거대한 육체가 들어왔다. 쩍 벌어진 어깨와 약동하는 근육은 커다란 퍼스트클래스 의자를 마치 이코노미석처럼 좁아 보이게 만들었다.
본인도 자리가 좁아 불편한지 자꾸만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저건 좌석이 좁은 것이 아니라 저 몸이 너무 거대한 것이었다.
물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몸이 큰 것이 불만은 아니었다. 그는 상대성이라는 것을 존중하는 사람이었다. 몸이라는 것은 자기가 키우고 싶다고 키워지는 것도 아니잖은가. 그러니 옆사람의 몸이 비상식적으로 큰 것 정도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왜 웃통을 벗고 있냐고, 이 미친놈아!’
대체 왜 비행기 안에서 웃통을 벗고 있는 것인가. 얇은 옷을 입고 있으면 비행기 좌석에 좀 더 끼어 불편하기라도 하단 말인가.
덕분에 채동혁은 눈만 뜨면 옆에서 꿈틀거리는 근육을 꼼짝없이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걸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물론 그렇다.
의복이라는 것은 육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입는 것이고, 스스로의 개성을 나타내기 위한 패션의 일종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저 육체는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넘실대는 근육을 보호하기에 섬유로 만들어진 의복은 너무도 나약해 보일 테니까.
그리고 패션?
‘저 몸에는 패션이 필요 없어.’
저 근육 이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낼 수 있는 의복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 사내에게 의복이 무슨 의미인가 싶기는 하지만, 애초에 의복이라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를 위해서라도 입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항공사의 승무원들이 정신이 나간 것인지, 아니면 그가 정신이 나간 것인지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그냥 제지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혹시라도 저 남자의 심기를 거슬릴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해는 간다.’
그 자신만 해도 아까부터 옆의 남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애쓰고 있으니까.
저 몸을 봐라. 저건 사람의 몸이 아니다. 야성적인 격투가들에게 가끔씩 몸이 흉기라는 말을 쓰곤 하는데, 그 말을 하는 이들이 이자를 본다면 다시는 그 말을 쓰지 못하게 될 것이다.
저 몸보다야 차라리 AK―47이 덜 위험해 보인다.
“1인분 더.”
채동혁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흉기 같은 몸을 가진 자는 이 비행기가 이륙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기내식을 10인분 이상 먹어 치우고 있었다.
원래 기내식이라는 게 저렇게 무한 제공이 되는 거였는지도 의문이고, 사람의 배에 10인분이라는 음식이 저리 쉽게 들어가는 것도 의문이었다.
‘아무리 중국이라지만…….’
땅도 넓고 사람도 많아서 기인이라는 기인은 다 살고 있다는 중국이지만, 저만한 기인은 흔치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런 기인이 일등석에 탈 만한 경제력까지 갖춘 경우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채동혁은 이 상황을 방송국에 제보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다시없을 기인이 한국 땅을 밟기 위해서 한국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흐으음.”
순식간에 새로 제공된 기내식을 해치운 사내가 만족했다는 듯이 식판을 밀어냈다.
“더 준비해 드릴까요?”
쩔쩔매는 얼굴로 승무원이 묻자, 사내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간식은 이 정도로 됐다.”
간식?
저 사람, 지금 간식이라고 한 건가?
“식사는 도착해서 하면 되니까. 그런데 여기는 양고기 쪽은 준비된 게 없나?”
“죄송합니다. 메뉴에 양고기가 포함된 음식이 없어서…….”
“아쉽군. 돌아가는 길에는 양고기를 먹었으면 하는데.”
“미리 예약을 해주시면 가능합니다.”
양 한 마리를 통째로 실어야 하는 건가?
채동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신경 끄자.’
중국에서 그가 얻은 한 가지 교훈이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휩쓸리기 시작하면 결국은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똘레랑스의 본고장은 프랑스가 아니라 중국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채동혁이 안대를 찼다.
“……정말 나는 관여 안 하고 싶다고.”
다른 사람의 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그것을 할 수 있다면 세상은 성자로 넘쳐 나지, 이런 아비규환은 아닐 것이다.
겨우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심사대에 도착한 채동혁은 뜻밖의, 아니, 어쩌면 이미 예상한 광경을 목격할 수밖에 없었다.
입국 심사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그 사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미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심사장 안으로 들어갔건만, 사내는 조금도 이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이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그리고 심사장 주변을 지키던 공항 보안대 역시 긴장한 얼굴로 그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어서 심사장으로 들어가라 말하고 싶은 것 같은데, 저 몸을 보고 있으면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가 보안대라고 하더라도 저 사람에게 다가가서 어서 들어가라고 말을 건넬 용기는 나지 않을 것이다. 저 거대한 육체를 상대하기에 그들이 들고 있는 가스총은 너무도 미약했다.
“그…….”
하지만 계속된 침묵에 지쳤는지, 아니면 자꾸만 눈치를 주는 상관에게 떠밀려서인지 결국 한 사람이 주춤주춤 걸어와 사내에게 말을 건넸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지금 저 모습을 촬영해서 인터넷에 올리면 아마도 인천공항은 세계에서 가장 친절한 공항이라는 명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돌아가신 3대조 할아버지가 살아 돌아와도 저런 예의 바른 모습은 나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아니. 나는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사내는 그런 예의는 자신과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이쪽에서 보니 손을 내저은 것이지, 저 손이 자신의 얼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본 보안대원은 아마 살짝 죽음을 경험했을 것이다. 얼굴 바로 옆으로 총탄이 스치고 지나가도 저런 기분은 아니겠지.
“하, 하지만 손님.”
막 보안대원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찰나, 저쪽에서 여러 명이 이쪽으로 뛰어왔다.
검은 슈트에 검은 선글라스를 착용한 남자들이 땀을 줄줄 흘리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고는 사내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정렬하더니, 허리를 구십 도로 꺾으며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도착시간을 잘못 알았습니다.”
“음.”
“이쪽이 아닙니다. 저쪽에 차를 마련해 뒀습니다. 저쪽으로 가시지요, 바토르 님.”
“음.”
사내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고개를 돌려 채동혁을 바라보았다.
채동혁은 순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바토르라 불린 사내의 눈이 정확하게 그를 쫓고 있었다.
“혹시라도 내가 곤란을 겪을까 봐 자신의 시간을 빼앗기면서도 내 옆을 서성이던 이다.”
사내들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그가 곤란을 겪지 않게 하는 것은 그들의 몫이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그들의 귀에는 이 말이 ‘너희가 오지 않아서 엄한 이가 괜히 시간을 빼앗기면서까지 나를 도우려 했다’라는 말로 들렸다.
“보상하도록.”
“예!”
바토르가 앞선 이를 따라서 온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슈트 차림의 남자 하나가 채동혁에게 다가와서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한국말?’
지금까지 당연하다는 듯이 중국어로 대화하던 이들인데, 채동혁에게는 유창한 한국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약소하지만 이걸 받아주십시오.”
사내가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사내가 내민 것을 확인한 채동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