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509
#508.
마주하다 (3)
“집까지 안 모셔다 드려도 됩니까?”
“네. 여기서는 알아서 갈게요.”
“친구분들 만나시기로 한 모양이죠?”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 앞에 세우겠습니다.”
“네.”
조규민이 천천히 차를 몰아 길가에 댔다.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말씀하신 부분은 확실하게 조사해서 보고서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뭘요.”
조규민이 눈을 질끈 감았다.
뭔가 적성에도 안 맞는 일이고, 그가 바라지 않은 방향으로 흐른 일이기는 하지만, 일을 맡은 이상은 최선을 다한다. 그게 조규민의 스타일이었다.
“강진호 씨.”
“네?”
차에서 내리려는 강진호를 조규민이 잡았다.
무슨 일이냐는 듯이 돌아보는 강진호의 시선에도 조규민은 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잠깐 망설이는 듯 살짝 눈을 찌푸린 조규민을 강진호도 재촉하지 않았다.
“정말 하실 겁니까?”
강진호는 자세를 되돌렸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조규민에게 내밀었다. 조규민도 두말없이 강진호가 내민 담배를 받아 들어 물고는 불을 붙였다.
두 사람이 모두 담배를 물고 나서야 강진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이 일을 하는 게 탐탁지 않으십니까?”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뭐라고 해야 할까…….”
조규민이 생각을 정리했다.
“어쩌면 이 말이 매우 건방진 발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강진호 씨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강진호 씨가 하기에는 조금 작은 일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작은 일요?”
“네. 물론…… 이 일을 작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작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여러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르니까요. 다만, 제가 좀 꼰대 기질이 있어서 그런지……. 네, 인정합니다. 제가 꼰대여서 그렇겠죠. 그렇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강진호 씨가 좀 더 큰 것을 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면?”
“세계 정복?”
“…….”
“농담입니다. 아니, 농담 섞인 진담일지도 모르겠네요. 여하튼 조금 스케일이 더 클 거라 생각했습니다. 단순히 한국에서 머무르지 않는 글로벌적인 일이라든가, 그게 아니면 좀 더 뭐랄까…… 전문적인? 그런 강진호 씨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그런 일을 할 거라 생각했는데, 복지를 논하시니 좀……. 좀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의견도 틀린 게 아니다. 그와 생각하는 것이 다를 뿐.
그리고 이제 강진호는 다른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과거처럼 그저 내 말에 너희는 따르면 된다는 식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도 말이다.
“저는 이게 사소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뇨. 저도 사소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일이란 것도 압니다. 하지만…… 이건 강진호 씨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할 수 있는 일이잖습니까. 강진호 씨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텐데……. 그리고 일의 선후라는 것도 있죠.”
“선후요?”
“네. 지금 가진 자본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강진호 씨가 만족할 정도로 일을 벌이려면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합니다. 그럼 일단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자본을 확충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옳지 않을까요? 그럼 더 많은 이들이 도움받을 수 있을 텐데.”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장이 먼저냐, 분배가 먼저냐는 오랜 화두 중의 하나다. 그중 어느 것도 틀렸다고 할 수 없다. 가치관의 차이일 뿐.
“누군가 대신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그렇죠.”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죠.”
“…….”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힘겨운 사람들을 돕겠다고 나서는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여전히 부족합니다. 그래서 해보고 싶은 겁니다. 당장 내가 조금만 고생을 감수하면 달라질 게 눈에 보이는데, 더 큰 것을 위해서 지금은 잠시 참고 넘어가자는 말을 받아들이기에는…….”
강진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저는 너무 작은 사람이에요.”
“…….”
강진호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삶이 특별했던 것이지, 실상 그는 평범한 소시민에 가까웠다. 오히려 그는 평범한 사람보다 조금 더 소심한 면이 있고 사회성이 부족했다.
“다들 저를 좋게 봐주시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솔직히 지금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혼자서는 판단하지 못하는 멍청이에 가깝죠. 제가 그나마 사람 구실이라도 할 수 있는 건 다른 분들이 저를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조 실장님도 그렇고, 친구들도 그렇고 말이죠.”
조규민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 별것 아닌 말에 진정성이 묻어 있었다.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그리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이 조규민의 가슴을 살짝 먹먹하게 만들고 있었다.
“저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조 실장님이나 유민이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처럼 살 수 없었을 겁니다. 그걸 단순히 ‘운이 좋아서’로 끝내고 싶지 않아요. 다른 이들도, 저처럼 주변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다른 이들에게도 적어도 조 실장님이나 박유민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은 겁니다. 조금 이를지 모르고, 건방지게도 원대할지 모르겠지만요.”
조규민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진호 씨.”
“예.”
“저도 평범한 사람입니다.”
“예.”
“그래서 사실 뭔가 좀 울컥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본인의 돈과 시간과 재력을 낭비해서 다른 사람을 돕겠다는 강진호 씨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사회적인 성공을 충분히 이루고 명예와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소일거리라 생각했거든요. 어쩌면 천박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딱히 천박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조금 다르다는 생각뿐.
“다만, 불평은 여기까지입니다.”
조규민이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이미 강진호 씨를 따른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놀고먹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한 말은 아니죠. 제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고,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된다 해도 그게 강진호 씨가 원하는 것이라면 저는 전력으로 서포트하겠습니다.”
조규민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는…….”
하지만 강진호는 ‘앗, 뜨거라’ 하는 얼굴로 조금 물러섰다. 이게 뭐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나와야 할 일인가? 무슨 전쟁 치르는 것도 아닌데.
“그럼 일단 저는 계획하시는 일을 하기 위한 재정부터 계산해 보겠습니다.”
“아…….”
“그럼 조심히 가시기 바랍니다.”
강진호는 등 떠밀리듯 조규민의 차에서 내렸다. 뭔가 오해가 살짝 있는 것 같아서 정정해 주고 싶지만, 조규민이 얼굴로 ‘나는 지금 당장 일하러 가야 하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빨리 내려’를 표현하고 있기에 일단 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조규민이 창 안에서 손을 흔들더니, 과격하게 차를 몰아 멀어져 갔다.
강진호는 그 광경을 보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아직 정확하게 뭘 한다고 말씀 안 드렸거든요.”
그런데 뭔 계산부터 한다는 말인가.
이래서 사람의 의욕이 너무 넘쳐도 문제였다.
“왔어?”
“음.”
“가자.”
“그래.”
강진호는 손짓하는 박유민을 따랐다. 박유민은 강진호가 당연히 그리로 향할 것이라는 듯 길가에 있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점원의 안내를 받아 안쪽으로 들어간 강진호가 구석 테이블에서 박유민과 마주 앉았다.
“조용하네?”
“여기 방음이 잘되어 있더라고. 예전에 연습실에서 회식 같은 거 하면 자주 왔어. 아무래도 게이머들이 회식하면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게 되니까, 잘 안 보이고 잘 안 들리는 곳을 찾다 보니 여기까지 왔지.”
“음, 그러네.”
강진호가 마음에 든다는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딱히 술자리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강진호가 싫어하는 것은 술자리가 아니라 시끌벅적한 상황이었다. 요즘은 조용한 술집을 찾기가 힘들었는데, 이곳이라면 자주 올 마음이 있었다.
주문을 하고 나자 박유민이 입을 열었다.
“조규민 씨한테 전화를 받았는데…….”
“……그래?”
촉새 같으니.
믿을 수 있는 사람인데 은근 한 번씩 못 믿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니까. 자신이 직접 말해도 되는 것을 굳이 미리 연락해서 이야기를 하다니.
그나마 할 수 있는 이야기와 할 수 없는 이야기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니 다행이지…….
“복지 재단 하려고 한다면서?”
“음.”
강진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숨길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강진호는 조금 껄끄러운 눈으로 박유민을 바라보았다. 이 일을 하겠다는 말을 해서 지금까지 호의적인 반응을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다들 일단은 말리려 했고, 가장 우호적인 반응이라 봐야 ‘나는 그 일을 하려는 이유도 모르겠고 이해도 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네가 하는 일이니 도와는 주겠다’ 정도였다.
박유민마저 그를 만류하려 든다면 정말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 강진호는 조금 긴장한 눈으로 박유민을 바라보았다.
나나호시 구미와 슈발리에와 대치하는 상황에서조차 조금의 긴장도 보여주지 않던 강진호다. 그런 그도 친구의 말은 무서운 것이다.
“복지 재단이라…….”
박유민이 손을 뻗어 물 컵을 잡고는 냉수를 쭉 들이켰다.
탁, 소리가 나게 물 컵을 테이블에 다시 내려놓은 박유민이 태연하게 말했다.
“생각보다 늦게 시작하네.”
“응?”
“얼마 안 가 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으응?”
“빤한 거 아냐?”
“빤하다고?”
강진호가 얼떨떨한 눈으로 박유민을 바라보았다. 그도 최근에 결심한 일인데, 박유민이 어떻게 그걸 미리 안단 말인가.
독심술이라도 익혔나? 아니, 이건 독심이라기보다는 예언의 영역인데…….
“넌 뭘 해도 대충대충 하는 걸 못 참잖아.”
“…….”
“공부를 해도 최고로 해야 하고, 자전거를 타도 끝장나게 타야하고, 차를 타기 시작하더니 제일 빠릿하고 빠른 차를 고르지 않나…….”
강진호가 얼떨떨한 얼굴로 박유민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런 면이 있었나?’
스스로도 모르고 있던 사실이다. 강진호는 스스로가 꽤나 물에 물 탄 듯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건만, 박유민이 보기에는 전혀 다른 모양이다.
“그런 네가 보육원 돌아가는 모습을 계속 보고도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네가 보육원을 차리든, 아니면 비슷한 뭔가를 하려고 할 거라 생각했지. 스케일이 생각보다 커서 좀 놀랐지만, 되레 그게 너답기도 하고.”
강진호는 가만히 박유민을 보며 말했다.
“유민아.”
“응?”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나한테 묻는 거야, 지금?”
“……음.”
박유민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 친구는 항상 이렇다.
“잘 못하면 어때.”
“응?”
강진호가 멍한 얼굴로 박유민을 바라보았다.
“‘내가 아는 강진호는 반드시 잘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하는 건 너무 식상하고 부담스러운 이야기잖아. 잘 못해도 괜찮아. 완벽하게 성공하지 않아도 돼. 네가 실패한다고 해도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성공한 거야. 그러니까…….”
술이 날라져 오자 박유민이 뚜껑을 따 강진호의 잔에 따르고는 자신의 잔도 채웠다. 그러고는 잔을 들었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마음 편하게 해봐. 모두가 도와줄 테니까.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
강진호가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었다.
“그래, 그거면 됐어.”
둘의 잔이 허공에서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