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510
#509.
마주하다 (4)
강진호는 간만에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는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니다. 무인인 그가 다른 사람의 기색을 읽지 못할 리가 없었다. 재단이라는 말을 꺼낼 때마다 은근히 드러나는 불편함을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그를 전적으로 이해하고 믿어주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러니 어찌 마음이 기껍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의 마음을 이해해 준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박유민이라는 것도 그를 한결 더 편히 만들어주고 있었다.
적어도 박유민이 반대하지 않는 일이라면 틀린 것은 아닐 테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걱정을 하고 있던 거야?”
“걱정?”
“너는 보통 그런 걸 물어보는 사람이 아니잖아. 돈이 많이 들 것 같아서 조심스러운 거야?”
강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있어서 돈이란 삶을 조금 편하게 만들어주는 도구일 뿐이지, 집착의 대상이 아니었다.
“내가 뭔가를 한다고 했을 때, 호의적인 반응을 받은 적이 잘 없긴 하지만…….”
“너는 그럴 만하지.”
박유민이 가볍게 웃었다.
강진호 스스로는 모르는 모양이지만, 그가 저지르는 일들은 파격적이기 그지없을 때가 많았다. 뜬금없이 갑자기 피자집을 하겠다고 했을 때 박유민도 얼마나 놀랐던가.
‘왜 본인만 모를까?’
박유민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강진호가 엉뚱한 면이 있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인데, 본인만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너무 우스웠다.
“이번에는 특히나 다들 영 탐탁찮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조금 움츠러 들었나 봐.”
“원래 그런 일이거든.”
“응?”
박유민이 볼을 긁었다.
“세상엔 좋은 사람이 참 많아. 사람들은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쳐주지. 그런데 막상 자기 주변에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이상하게도 조금 좋지 않은 눈으로 바라본단 말이지.”
“그래?”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런데 보육원에 봉사하러 오시는 분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 보육원에 일하러 간다고 하면 고생한다는 말보다 ‘먹고살 만한가 보다’라는 비꼼이 먼저 돌아온다고. 그게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주변 사람들에게는 보육원에 간다는 사실을 말하기 어려워졌다고.”
강진호는 도무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을 그런 시선으로 본단 말인가.
“그런데 가만히 보다 보면 흔한 일이기도 해. 해외 봉사를 나가는 사람은 그럴 시간 있으면 국내의 가난한 사람부터 도와라라는 말을 들어야 하고, 국내에서 봉사하는 사람은 제 살길부터 찾으라는 말을 듣지.”
강진호가 얼굴을 긁적였다.
그러고 보면 해외 봉사가 어쩌고 하는 기사에서 비슷한 댓글을 몇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나눠야 한다’, ‘같이 살아야 한다’라는 인식이 많이 퍼졌다고는 하지만…… 결국엔 그런 거야. 인식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지.”
“음…….”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박유민이 손을 내저었다.
“아, 오해는 하지 마. 그렇다고 무슨 불만이 있다는 것은 아니니까. 그 사람이 번 돈을 본인을 위해 온전히 소비하는 건 잘못된 게 아니야.”
“그렇지.”
“다만…… 그게 자유라면, 자신이 가진 걸 나누겠다는 것 역시 자유라는 걸 이해해 줬으면 한다는 거지. 음, 말이 길어지네. 미안하다. 내가 아무래도 이쪽으로는 맺힌 게 좀 많아서.”
“아무 말 안 했어. 쓸데없이 사과하지 마.”
“응. 미안.”
“또 그런다.”
“그러네.”
박유민이 머리를 긁었다.
그런 박유민을 보며 강진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대책 없이 착한 것도 문제다.
“사과를 해야 할 쪽은 오히려 내 쪽이야.”
“응? 네가 왜?”
“네가 바쁘고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건 아는데, 아무래도 이런 쪽으로는 나보다 네게 아는 게 많으니까 어쩔 수 없이 시간을 좀 뺐을 수밖에 없어.”
“진호야, 그건 내가 좀 기분 나쁜 이야기다. 내가 나 혼자 잘살자고 이 일에 빠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이야기야. 그럼 나야말로 은혜도 모르는 파렴치한이 되는 것 아냐.”
“그건 이거하고 달라.”
“다르긴 뭐가 달라?”
박유민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내가 너를 도우려고 그러는 게 아니잖아. 이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니까. 그런데 지금까지는 내 능력이 안 돼서 못하고 있던 거야.”
“음…….”
“그런 와중에 친구가 한다니 거기 꼽사리 껴서라도 한 번 해봐야지. 그리고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사실 내가 재단을 경영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냐. 그냥 내 경험이나 이야기해 주는 거지.”
“그 경험이 제일 필요해.”
“그럼 다행인 거지.”
박유민이 씨익 웃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거야? 너는 워낙에 뜬금없이 일을 잘 저지르니까 이해 못할 건 아닌데…… 그래도 뭔가 계기가 있었을 거 아냐?”
“계기라…….”
강진호가 머리를 긁었다.
“계기라고 말할 건 하나고, 이유는 또 다른 거라…….”
“응?”
강진호가 고민을 했다.
이걸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계기라고 말하면 조 실장님이 되겠지. 갑자기 나한테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으시더라고.”
“하고 싶은 일이라……. 어쩌면 너하고는 가장 동떨어진 말 같은데…….”
“……그렇지.”
태연하게 찔러 들어오는 것도 박유민다웠다.
이 녀석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는 느낌이 든다. 숨길 생각도 없지만.
“그 말이 화두가 되었지. 그런데 막상 결심하게 된 계기는 그게 아닌 것 같아.”
“그럼?”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한진성.”
“……응?”
박유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서 왜 그 이름이 나온단 말인가.
“진성이? 보육원 진성이?”
“응.”
“왜? 진성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했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생각 안 나? 내가 처음 보육원에 들렀을 때는 진성이가 아직 초등학생이었고, 엄청 작았잖아.”
“그래, 그랬지. 몸도 엄청 약했지.”
박유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오만한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육원에 출입하고 나서부터 진성이가 밝아지고 몸도 건강해져서, 지금은, 음…….”
“양아치가 되었지.”
“아니, 양아치는 좀 심하고. 시니컬한 아이가 되었다고 하자.”
“그래. 뭐, 그 정도로 타협하지.”
둘은 서로 마주 보며 피식 웃었다.
“여하튼 건강해져서 투덜거리는 모습을 보니, 뭐라고 할까……. 어쩌면, 음…….”
박유민이 강진호가 차마 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 해주었다.
“네 덕분에 걔 인생이 바뀌었을 수도 있겠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야, 강진호.”
“음?”
박유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겸손도 그 정도면 병이야. 네가 애들 인생을 크게 바꿔놓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그만큼 해놓고도 나는 그저 조금 도왔을 뿐이라고 하면 애들한테도 실례야.”
“…….”
“설사 그게 작은 도움이었다고 하더라도 받는 사람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거야. 그리고 네가 정말 애들에게 준 건 고작 그런 게 아냐.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게 있어.”
“응?”
박유민이 웃으며 말했다.
“같이 있어준 것.”
강진호가 박유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진짜니까. 그런데 정말 그게 가장 큰 거야. 전에 말한 적이 있던 것 같은데? 애들이 가장 충격받는 순간이 언제인 줄 알아?”
“기억날 것도 같고…….”
“찾아오던 사람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을 때.”
“음…….”
“기본적으로 사람에게 버려졌다는 트라우마가 있는 애들이야. 그런 애들은 사람을 쉽게 믿지 않아. 그런데 겨우겨우 마음을 열은 사람이 어느 순간 더 이상 찾아오지 않을 때, 아이들은 정말 크게 절망하지. 또다시 버려졌다고 생각하거든.”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너는 계속 같이 있어줬잖아. 외부 사람이 보육원에 자연스럽게 들어와서 계속 같이 있어줬다는 게 애들한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너는 모를 거야. 더구나 너야 뭐 어디 빠지는 게 있는 사람도 아니고, 어딜 가도 사람들이 우러러보는데 그런 사람이 보육원에서 형처럼 오빠처럼 같이 뒹굴어준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데.”
“금칠하지 마.”
“사실이야. 그러니까 넌 좀 더 어깨에 힘 넣어도 돼.”
“부러져, 인마.”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그래. 여하튼 그런 진성이를 보고 있으려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 어쩌면 내가 이 녀석을 조금 밝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그리고…….”
“그리고?”
“더 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박유민이 아무 말 없이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네가 말한 대로 그저 같이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을 안정시켜 줄 수 있는데, 그 작은 것만으로도 아이들의 인생이 바뀔 수 있는데, 이런 사실을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알고, 조금만 더 신경 썼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넌 할 만큼 했어, 인마. 욕심 그만 부려.”
“알지만 말이야.”
강진호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그런 거야. 그래서 조금 더 나중을 볼 수 없는 거야. 내가 조금 더 준비를 하겠다고 시간을 끄는 사이에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애들이 불행해질까 봐. 그래서 조금 조급해.”
“네가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어.”
“그렇지.”
“하지만 열심히 할 수는 있겠지. 그래, 그거면 됐어.”
“음…….”
강진호가 머리를 긁었다.
“하나 듣고 싶은 게 있는데.”
“응?”
“너라면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런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내가 정말 잊지 말아야 할 건 없을까?”
박유민이 가만히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조금 가라앉았다.
“한 가지 착각만 하지 않으면 돼.”
“착각?”
“그래. 네가 이 일을 하는 이유 말이야.”
강진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박유민을 바라보았다. 이 일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지금까지 설명한 것 같은데, 뭘 착각하지 말라는 건가.
“아이들을 위해서, 더 나은 뭔가를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그런 헛소리로 포장하기 시작하면 일이 뒤틀어지기 마련이거든. 현실을 똑바로 봐야 해. 내가 대신 이야기해 줄게. 네가 이 일을 하려는 이유는 그냥 자기만족이야.”
“…….”
강진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그냥 그 일을 하고 싶으니까, 애들이 나아지는 걸 보는 게 즐거우니까. 네가 희생하는 게 아니라 그게 즐거워서 하는 거라고. 네가 이 일을 즐겁지 않지만 봉사 정신 때문에 한다고 생각해 버리는 순간, 모두가 힘들어질 거야. 그러니까 명심해. 네가 즐겁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 이 일을 끝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내가 남들을 돕는다는 것에서 비정상적으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밖에 없거든.”
“……너, 엄청 냉정하다.”
“겪어보면 그렇게 되더라고.”
“하지만 뭔가…… 그래, 뭔가 시원한 말이야.”
강진호가 미소를 지었다.
뭔가 가슴을 꽉 짓누르고 있던 것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이제 누군가 묻는다면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다시 묻겠는데…….”
박유민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이걸 왜 하고 싶다고?”
강진호도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재밌으니까.”
“그걸로 됐어.”
박유민이 시원하게 술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