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511
#510.
마주하다 (5)
“……불합리하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세상은 불합리로 가득 차 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것을 깨닫게 된다.
지금도 이런데, 나중에는 얼마나 많은 불합리를 경험하게 되겠는가.
세상에 가득 차 있는 독선과 오만, 그리고 지독한 불합리에 한진성은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불합리하다고!”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이다.
물론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인생이란 언제나 고독한 것. 그 책임은 홀로 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책임에 따른 자유 역시 주어져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세상에는 수많은 자유가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우월하고 고귀한 자유는 휴일을 어떻게 보내는가 하는 것이었다.
겨우 찾아온 주말.
지독한 월요일과 무미건조한 화요일, 수요일, 지옥 같은 목요일을 지나서 희망찬 금요일이 다가와야 하는데…….
“그건 이해한다, 이 말이야.”
공부를 위해서 토요일을 반납한 것 때문에 금요일도 지옥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토요일도 온종일 학원에서 공부를 하며 보내야 했다.
이해한다. 그래, 이해한다고.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왜냐면 그 황금 같은 토요일을 공부로 보내겠다고 결정한 것은 다름 아닌 한진성 자신이기 때문이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는 것이고, 한진성은 그 책임을 질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왜 일요일도 내 마음대로 못 쉬냐고! 왜!”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일에 대한 책임까지 져야 한다는 것은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한진성은 피눈물이라도 쏟고 싶은 심정이었다.
토요일까지 날려 먹은 이상, 유일하게 쉬는 날인 일요일은 몇 십 배쯤 더 소중해졌다. 황금 같은 주말이 아니라 다이아몬드 같은 일요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일요일을 전투적으로, 정말 격렬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겠다고 다짐한 한진성이건만…… 그 격렬한 다짐은 태연하게 집에 돌아온 박유민의 한마디로 박살이 나버렸다.
“야구장 가자.”
야구는 얼어 죽을.
이 황금 같은 주말을…… 아니, 불꽃같은 일요일을 야구 따위로 보낼 멍청한 놈이 누가 있단 말인가. 박유민이 생각이 있다면 저런 제안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이 없는 건 그였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콜! 갈게! 갈게!”
“야구장! 야구장!”
아무래도 이 보육원에 있는 놈들은 하나같이 야구에 미친 건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면 밖에 나갈 수만 있다면 뭐든 좋든가.
‘뭔 죄수 새끼들도 아니고.’
누가 밖에 못 나가게 막기라도 했단 말인가.
나가고 싶으면 지들끼리 나가면 될 일이지, 왜 단체로 움직이냐고!
한진성은 일제강점을 막으려는 대한제국 최후의 충신이 된 심정으로 격렬히 저항했다. 목숨도 내놓을 수 있다는 각오로 격렬하게! 그리고 단호히 저항했다. 하지만!
“썩을 놈들, 진짜.”
한진성을 제외한 보육원의 모든 아이들이 야구장 가는 것에 찬성하면서 그의 입지는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눈빛 때문에 말도 제대로 못 꺼낼 상황이 되자 최후의 수단으로 나 홀로 남아 이 삭막한 보육원을 지키겠다는 수를 꺼내들었지만…….
“니가 왜 남아? 보육 교사님들이 계시는데.”
눈치가 없는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어떻게든 한진성을 엿 먹이겠다는 일념으로 붙타는 건지 모를 박유민의 한마디로 모든 것은 분쇄되었다.
그래서 결국은 이 꼴이다.
“불합리하다고!”
“아! 오빠, 시끄러워!”
쏟아지는 비난에 한진성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빌어먹을, 나는 가도 원정석에 가고 싶었단 말이다!’
단체 생활이라는 것은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가.
모두가 한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이유로 원정팀의 팬마저 홈팀의 응원석에 앉혀 버리는 이 무시무시한 짓거리를 어디까지 용납해야 하는가.
개인의 개성과 선택권이 사라지는 이 무자비한 탄압 앞에 한진성은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닭다리 줄까?”
“어. 나 줘.”
이건 굴복한 게 아니다.
치킨은 언제나 옳으니까. 언제나.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이 많은 애들이 있는 데서 살다 보면 닭다리 먹는 게 엄청 힘들단 말이다.
“아니, 왜 그런 눈으로…….”
“응?”
“아, 아니, 형 말고. 응? 그런데 왜 형은 날 그렇게 보고 있어?”
그제야 박유민이 미묘한 시선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한진성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박유민이 피식 웃었다.
“네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을 했는지 모르지?”
“……내가 또 무슨 사고 쳤어?”
“아니다.”
“아, 왜 말을 하다 말아? 사람 궁금해 미치게! 마저 이야기해 줘! 해줘어!”
박유민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진호도 참 성격 특이하지.’
쟤를 보고 그런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것도 정말 특이한 일이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절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보통 사람이 한진성을 본다면 살짝 까칠한 고등학생 정도로밖에 느끼지 못할 텐데 말이다.
“진성아.”
“응?”
“까칠하게 자라줘서 고맙다.”
“이거 멕이는 거지?”
“아냐. 칭찬이야.”
“……고통스럽다, 고통스러워.”
의자에 너부러지는 한진성을 보며 박유민이 미소를 지었다. 이내 그의 시선은 저 옆에서 꼬맹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강진호에게로 향했다.
‘진짜 안 어울리기는 하지만.’
아직도 이해가 잘 안 가는 한 가지가 있다. 그건 강진호가 아이들을 엄청 잘 돌본다는 것이다.
자기 집이라고 해도 초등학생 저학년 세 명에게 둘러싸이는 순간 혼백이 날아가기 마련인데, 강진호는 이 낯선 야구장에서 초딩 십여 명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냥 침착을 유지하는 수준이 아니다.
‘디테일이 달라.’
박유민은 아이 돌보기의 프로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삶은 언제나 아이들과 함께했고, 그동안 먹은 끼니의 수보다 갈아 제낀 기저귀가 더 많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남자였다.
그런 박유민조차 감탄할 정도로 강진호는 섬세했다.
지금도 보라.
아이들의 말을 일일이 받아주면서, 한 손으로는 물티슈를 꺼내 아이가 흘린 침을 닦고, 다른 손으로는 떨어질 뻔한 아이스크림을 받아내고, 다리를 쭉 뻗어서 무리에서 이탈하려고 하는 아이를 걸어 당기는 것을 동시에 하고 있지 않은가.
‘쟤는 유치원을 차렸어도 잘했을 거야.’
그럼 전설의 보육 교사가 탄생했을 것이다.
아이들도 그 점을 아는지, 박유민보다 강진호를 더 따랐다. 그래도 예전에는 함께 자란 아이들이라 박유민을 미묘하게 더 따르는 측면이 있었는데, 요즘은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지금 아이들은 걸어다니는 것과 동시에 강진호와 박유민을 동시에 본 아이들이다. 그전까지 그가 가지고 있던 메리트가 사라지자 차이가 확 벌어졌다.
강진호와 놀고 있는 아이를 맡아주러 갔는데 그 아이가 고개를 돌려 ‘뭐야, 이 아저씨는? 짜증나게?’ 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일이 잦아지고 있었다.
박유민에게는 가슴이 찢어지게 슬픈 일이었다.
하지만 뭐랄까…….
“형! 형! 나 저기 가면 안 돼?”
“안 돼.”
“나 아이스크림 먹고 싶은데. 다 먹었어.”
“두 개 먹으면 배탈 나. 안 돼.”
“형!”
“안 돼.”
단호하다.
저리 단호한데 아이들이 따른다는 것도 참 신기한 일이었다. 강진호가 일당백으로 아이들을 통제하고 이끌고 있으니 한시도 긴장을 풀지 못하는 보육 교사님들도 간만에 쉬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애를 저리 잘 볼까?”
“좋은 아빠 되겠네. 얼굴도 너무 잘생겼고.”
“어머어머! 사진 찍어야지, 사진. 그림 봐!”
……조금 다른 의미로 쉬는 것 같기는 하지만, 뭐 어떤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형, 근데 갑자기 왜 야구장은 오자고 한 거야?”
한진성의 물음에 박유민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냥 왁자지껄한 데서 다 같이 놀고 싶어서.”
“……그게 이유야?”
“왜? 안 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한진성이 작은 목소리로 ‘그게 왜 다 같이여야 하냐고! 나 가서 게임도 한 판 돌리고 해야 하는데!’ 하고 중얼거렸지만, 박유민은 한진성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아마 앞으로는 바빠질 테니까.’
옆에서 지켜보는 것과 직접 뛰어드는 것은 다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강진호와 아이들 사이에 벽이 생겨날 수도 있다. 입장의 변화라는 것은 그런 거니까.
그래서 조금 더 같이 보내는 시간을 만들어두고 싶었다.
이 시간을 통해 혹시라도 생겨날 벽이 사라졌으면 하는 기대와, 벽이 생겨 데면데면해지더라도 좋은 추억만큼은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다.
‘괜한 걱정이기는 하지만.’
그의 친구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그저 모두와 함께 놀고 싶은 박유민의 욕심인지도 몰랐다. 덕분에 뭐랄까…….
궁시렁궁시렁.
“아, 그만 좀 쫑알거려! 풀스윙으로 처 날려 버리기 전에!”
조미혜가 으르렁거리자 한진성이 쫄아들어 의자에 박혔다.
‘진성이가 고생하기는 하지만 뭐.’
이런 날도 있어야 하는 법이지.
“어머, 진호 학생. 고생했어. 이제 애들 우리가 볼게.”
“괜찮습니다.”
“아냐, 아냐. 진호 학생도 놀러 왔으면 좀 놀아야지. 이제 우리가 볼 테니까, 가서 야구도 좀 보고 쉬어.”
“진짜 괜찮습니다.”
“어여 가, 어여!”
박유민은 경이로운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강진호가 강한 거부를 표하고 있지만, 보육 교사님들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얼굴로 강진호를 밀어내고 등짝을 퍽퍽, 쳐 댔다.
천하의 강진호조차 주춤주춤 밀려나더니, 결국은 아이들의 사이에서 멀어져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못 이겨.’
세상에는 강진호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이, 이리 와 앉아.”
강진호가 살짝 혼이 나간 얼굴로 박유민의 옆에 앉았다.
“제대로 야구도 못 봤겠네.”
“아니, 뭐, 야구 보러 온 건 아니니까.”
강진호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눈앞에서 치열한 승부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흥을 띄우려는 듯이 치어리더들이 흥겹게 몸을 흔들어 댔다.
“와, 저 누나 각선미 죽인다!”
“아, 제발 좀 닥쳐, 이 변태야! 이거 누가 데려왔어!”
뒤쪽에서 등 터지는 소리와 비명이 믹스되어 들려왔다.
‘한진성은 괜히 데려왔네.’
박유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 재밌어 보이니 그걸로 됐나?
“다들 재밌게 보는 거 같은데?”
“음.”
강진호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유난히 울상을 짓고 있는 하나를 빼면 다들 즐거워 보인다. 진짜 꼬맹이들이야 어딜 가든 산만하기 마련이니 어쩔 수 없지만, 그놈들도 즐거워하고 있었다.
‘가끔씩 이런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겠지.’
오랜만에 평화로운 느낌이었다.
이런 시끄러운 곳은 딱 질색인 강진호이지만, 이들과 함께라면 괜찮았다. 조금 즐겁기까지 하니까.
‘다음에도 또…….’
그 순간, 강진호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박유민은 강진호에게 왜 그러느냐 물으려고 했다. 하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강진호의 얼굴이 이상하다.
지금까지 그가 알던 강진호의 얼굴이 아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철갑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강진호가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박유민도 자연히 강진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무슨 문제라도?’
박유민은 볼 수 있었다.
건너편.
야구장 건너편에 이상한 것이 눈에 띈다.
‘사람?’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거대한 덩치의 사람이 그의 눈에 띄었다. 얼굴은 전혀 식별이 되지 않는 거리이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사람, 이쪽을 보고 있다.
이 먼 거리를 격해 강진호와 저 거대한 덩치의 남자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것이다.
마치 이곳에 둘만 존재한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