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517
#516.
수련하다 (1)
‘무미건조하군.’
사무실에 대한 뱅상의 첫 번째 인상은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 뱅상과 같은 경우라면 어떤 광경을 보더라도 꽤나 상쾌해야 한다. 그게 정상이었다. 왜냐하면 뱅상은 조금 전, 이곳으로 끌려온 이후 처음으로 샤워를 할 수 있었으니까.
아무리 나름 인도적으로 그들을 대해줬다지만, 창살 안에 가둬놓은 무인들에게 샤워 서비스까지 제공한다는 것은 무리였는지 그들은 지금까지 씻지도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다.
물론 거기까진 바라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극적으로, 아니, 허망하게 협상이 타결된 이후, 강진호는 별말 없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가 자리를 뜨기 무섭게 일전에 강진호와 함께 왔던 사내가 사람들을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자신을 이현수라 소개한 그는 그들을 풀어주고 샤워장으로 안내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자 마치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는 듯, 깔끔한 새 옷도 준비되어 있었다. 때에 찌든 속옷과 옷을 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후, 간단한 식사까지 마치고 나서야 뱅상은 회의실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부하들을 식당에 남겨두고 이동한다는 것이 조금 껄끄럽기는 했지만 말이다. 홀로 가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의견을 피력하여 마티외를 대동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여하튼 정말 오랜만에 상쾌함을 느낀 뱅상의 눈에도 무미건조해 보인다면, 이 건물은 정말 특색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오래되고, 낡고, 무미건조하다. 미적인 감각이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실용적인 것도 아닌 것이…….
“감각이 최악이로군.”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시면 안 됩니다.”
마티외의 질책에 뱅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아직 외지다.’
과도한 압박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결론을 내렸다는 해방감이 그를 느슨하게 풀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협상이라는 것은 언제 어떻게 틀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당사자끼리의 합의가 끝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결정 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지금 그와 마티외가 이곳에 와 있는 게 아닌가.
뱅상은 이미 협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그들만 이렇게 회의실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것도 저들의 심리전 중 하나일 것이다.
‘얄팍한 수를 쓰는군.’
아마도 이대로 회의실에 조금 방치시켜 놔서 사람을 초조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이겠지만, 그런 것이 당할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그는 자랑스러운 슈발리에의 단장이다. 이런 하찮은 심리전 따위에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대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벌컥!
그 순간, 문이 다급하게 열리더니, 강진호와 이현수, 그리고 일전에 보았던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 죄송. 죄송합니다. 담배 한 대 피운다는 게 그만.”
“전화를 왜 안 받으십니까!”
“아니, 그 잠깐 담배 피우고 오는 건데 별일 있겠나 싶어서 사무실에 두고 갔지.”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거, 미안하다니까.”
……심리전이 아니었나?
뱅상은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뱅상보다 저쪽이 더 당황한 것 같았다. 통역을 대동하지 않아서 정확히 무슨 말이 오가는지는 파악하기가 어려웠지만, 분위기로 봤을 때는 그냥 상황이 조금 꼬인 모양인데…… 그게 뭐라고 할까, 기분이 좀…….
‘어설픈 수를 쓰지 않은 것을 좋게 봐줘야 하는 것인가, 협상을 하러 나오면서 연락이 꼬여서 늦은 것을 한심하게 봐야 하는 것인가.’
거참, 미묘한 상황이었다.
“다시 한 번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이현수라고 합니다. 총회 내에서 영남부 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쪽은 저희 회주님이십니다.”
‘유창한 프랑스어로군.’
아마 이 사람이 인텔리이자 두뇌인 모양이었다. 사내가 손짓을 하자 덩치 큰 사내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방진훈이라고 합니다.”
굳이 해석이 필요한 말은 아니었다. 뱅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진훈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고 해도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무도 총회의 회주라면 그보다 높은 지위라고 봐야 한다.
“뱅상입니다.”
방진훈이 악수를 하고는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쪽은 따로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되겠죠.”
물론이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강진호에 대한 설명은 듣고 싶지 않았다. 들어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현수도 자리에 앉았다. 뱅상은 이 회의를 주도하는 사람이 이현수라는 것을 파악했다. 가운데 앉은 이현수를 중심으로 방진훈과 강진호는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듯이 허리를 살짝 뒤로 빼고 있었다.
‘그럼 이 사내와 머리싸움을 해야 한다는 거로군.’
선택이 끝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 협조를 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줘야 풀려날 수 있는지가 아직 결정 나지 않았다. 지금부터 그 부분을 조율해야 한다.
“우선 좋은 선택을 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목이 달아났겠지.
형식적인 감사의 인사이지만, 그 말이 결코 곱게 들리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불편한 기색이 드러났는지, 마티외가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뱅상은 헛기침을 하고는 이현수의 말을 받았다.
“크흠, 아닙니다. 저희도 얻을 것이 있어서 내린 선택이니까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선택이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현수가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뱅상은 그 사람 좋은 미소 속에 감춰진 날카로운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협상이 어떻게 끝나더라도 보장해 드릴 것은 최대한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다만, 외부와 연락을 취할 수 있는 휴대폰의 경우는 모든 협상이 끝난 뒤에만 돌려 드릴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입니다.”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일단 제가 생각하는 협상의 부분은 두 가지입니다. 항목과 기간.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마티외가 대신 대답을 하며 치고 나왔다.
그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총회의 회주와 강진호를 상대하는 것이라고는 하나, 급이 안 되는 자가 자신의 단장과 말을 섞는다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매우 기특하다고 생각한 뱅상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낮은 귓속말이 들려왔다.
“무슨 실수를 할지 모르니까 일단은 입을 다물고 계십시오.”
……충성심이 아니었어?
사고 칠까 봐 닥치라고 한 건가?
뭔가 조금 서글퍼진 뱅상이 몸을 움츠렸다.
“항목은 협의가 더 필요합니다. 저희가 얻어갈 수 있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정보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걸 저희 입으로 말씀드려야 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 역시 그쪽의 능력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렇지만요.”
마티외와 이현수의 눈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항목에 대한 부분은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군요. 그렇다면 기간은 어찌하시겠습니까?”
“그쪽에서 생각하는 바는요?”
“저는 2년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2년이라……. 길군요.”
“역사가 깊은 슈발리에의 무학을 전수하는 데 2년이라는 시간은 짧다고 생각합니다만?”
“배우는 자의 능력 문제겠죠. 배우는 자가 우수하다면 1년으로도 충분합니다. 설마 어중이떠중이들에게 저희의 스킬들을 전수하라는 것은 아니겠죠?”
이현수가 살짝 인상을 썼다.
뱅상을 상대로 했다면 술술 풀렸을 문제건만, 저 마티외라는 자가 붙어서 일이 조금 복잡해지고 있었다. 뱅상만을 불러서 협의를 했을 경우, 남은 이들이 뱅상에 불만을 가지게 될까 봐 배려한 것인데…….
‘뱅상이 지배력을 잃게 된다면 우리에게도 좋을 것이 없지. 하지만 저런 변수가 있을 줄이야.’
손해에 무척이나 민감한 자였다.
그리고 이런 압박이 강한 자리에서 자신의 의견을 낼 줄도 알았다.
“네. 그럼 기간은 1년으로 하고, 그동안 저희가 알아서 그쪽의 스킬을 알아내 전수해 달라 요청하라는 게 그쪽의 입장이십니까?”
“말하자면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렇군요.”
이현수는 웃고 말았다. 시작부터 강경하게 나와서 최대한 이득을 취하겠다는 전략 같은데…….
‘이쪽은 그런 전략 같은 것에 관심 없거든?’
치트키가 있단 말이다, 치트키가.
이현수가 빙그레 웃고는 고개를 돌려 강진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모든 설명을 들은 강진호가 가만히 마티외와 뱅상을 바라보았다.
마티외와 뱅상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딱히 압박을 넣지도 않았음에도 저들끼리 질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게 주제 파악을 해야지.’
이현수는 웃어버리고 싶었다.
강진호와 같은 쪽 테이블에 앉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편안한 일인가.
저들은 기본적인 준비도 되지 않았다.
이현수는 강진호의 앞에 서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놓고 스스로의 목까지 내놨다. 그 정도의 각오도 없이 강진호와 협상을 하러 나오다니, 그 무모함에 박수를 쳐주고 싶을 정도다.
“착각하는 모양인데…….”
이현수는 바로 강진호의 말을 통역하기 시작했다. 이 말이 그들의 귀에 들어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자기들의 처지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겠군.”
강진호가 이현수의 가슴에 사이다를 리터 단위로 뿌려 대기 시작했다.
“협상의 결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우리가 그쪽을 설득해야 하는가? 설득은 그쪽이 하는 거지.”
그 말을 끝으로 강진호는 입을 닫았다. 살짝 더 몰아쳐 줬으면 싶은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원래 모든 것은 과유불급인 법. 살짝 모자라다 싶을 때가 가장 좋을 때였다. 구구절절이 늘어놓는 태도가 되레 이쪽이 아쉬워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마티외와 뱅상이 자기들끼리 뭔가를 쑥덕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유지하던 살짝 고압적이던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다급하기 짝이 없는 얼굴들이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말들이 쏟아졌다.
이현수조차 알아먹을 수 없는 대화가 순식간에 오간 뒤, 이윽고 결정이 났는지 뱅상이 굳은 얼굴로 강진호와 이현수를 돌아보았다.
‘자, 무슨 말이 나올까?’
당첨이 결정되어 있는 복권을 긁는 심정이었다. 꽝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이리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뱅상이 살짝 머뭇대는 듯하다가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저희가 뭘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빙고.
이현수는 씰룩이는 입술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그가 예상하던 말 중에 최상의 대답이 나왔다. 입 아프게 이리저리 말할 것도 없이 아주 간단하게 말이다.
살면서 이리 편한 협상을 해본 적이 있던가?
평생 강진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이현수가 빙그레 웃었다.
“그리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간단한 문제부터 해결해 나가면 서로 괜찮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 겁니다.”
너희한테도 괜찮은지는 너희가 판단할 문제이겠지만 말이야.
이현수가 테이블에 놓인 생수의 뚜껑을 따서 벌컥벌컥 마셨다. 생수를 탁, 테이블에 내려놓은 이현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일단 프랑스 무학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부터 들어볼까요? 시간은 걱정하지 말고 말을 해주시면 됩니다. 꽤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저녁까지 준비 중이거든요. 근사한 프랑스식 디너를 함께하시며 말씀 나눌 수 있을 겁니다.”
가지고 있는 것은 모조리, 팬티 속까지 살펴보겠다는 이현수의 말에 뱅상에 영혼에서부터 우러 나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