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521
#520.
수련하다 (5)
이명환은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저 얼굴은 보고 있을 수가 없다. 저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날의 기억이 자꾸만 떠오른다. 강진호의 검 아래에 무수한 이들이 핏덩어리가 되어 쓰러지던 그날이 말이다.
이 평범해 보이는 인상 뒤에는 잔혹한 악마가 숨어 있다.
‘마공 때문인지, 그게 아니면 본성이 그런 건지 모르겠군.’
이명환은 고개를 젓고 말았다.
그때쯤 하나둘 눈을 뜨는 자들이 나타났다.
“아, 빌어먹을. 또 실패야!”
“나, 나는 된 것 같은데! 됐다고!”
“되긴 뭐가 돼! 사기 치는 거 아니야, 새꺄?”
“진짜라니까!”
강진호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
“조용.”
강진호의 말이 떨어지자 강당 안이 다시 고요로 물들었다.
“다른 이들이 운공을 하고 있는데 소란을 부리는 건 어디서 배워 먹은 짓거리지?”
“……죄송합니다.”
“감정을 드러내는 건 좋지만, 적어도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아야지.”
무척이나 상식적인 말이지만, 그 말이 이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강진호와 상식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으니까.
“성공했다고 좋아할 것도 없고, 실패했다고 아쉬워할 것도 없다. 무공을 처음 익히기 시작했을 때 가장 빠르던 자가 지금 가장 강한 게 아니라는 건 너희도 알고 있을 테니까.”
눈을 뜬 이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무학은 끝이 없는, 지독한 마라톤과 같았다. 출발이 조금 빠르고 늦고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국 마지막 결승선을 누가 통과하는가로 승부가 결정 나는 문제였다.
“꾸준하게 계속 익혀. 그럼 결과가 있을 거다.”
그 말을 남기고 강진호가 느긋하게 강당을 나섰다.
그의 등을 지켜보는 이들의 눈에 굳은 결심이 어렸다.
강진호는 밖으로 나와 차에 올랐다. 이미 강당에 들르기 전에 가보겠다는 인사는 했으니 딱히 인사를 새로 할 필요는 없었다. 차 문 앞에 선 강진호가 가만히 총회를 돌아보았다.
‘조금 이상한 느낌이군.’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총회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외부자와 내부자의 경계에 서서 한 발을 옆으로 빼고 있는 게 강진호의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이곳에서는 미묘한 소속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마교에 투신해서 수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결국에는 교주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강진호는 단 한 번도 마교에 소속감을 가져 보지 못했다.
두 번째 삶이 마치 꿈을 꾸듯 현실감이 없었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겠지만, 마교에는 그가 애정을 쏟아부을 만한 아무런 거리가 없었다. 시작부터 그와 마교는 서로 적대적이었고, 마지막에는 그 적대적인 이들을 모두 굴복시키고 무너뜨렸다. 교주의 자리도 힘으로 차지한 것이니까.
총회와 그의 관계도 시작은 비슷했다. 그리고 힘으로 총회를 굴복시킨 것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요소가 있어서 이리 느낌이 다른 것일까?
‘알 수 없군.’
결국 느낌이나 기분이라는 것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누구도 그 이유를 정확하게 분석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강진호는 가만히 총회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총회가 무너지는 일이 벌어진다면 마교가 무너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담담할 수는 없을 거란 사실이었다. 대체 이곳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그도 정확히 측량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니 도려내야지.’
그와 관계가 있는 곳이 썩어가는 것은 지켜볼 수 없으니까. 차에 오르는 그의 등으로 여러 개의 시선이 꽂히는 것을 느끼며 강진호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자, 드러내라.
그 모습을 드러내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이곳은 곧 그의 색으로 완전하게 물들어 버릴 테니까. 그전에 나를 막으려면 움직여야지.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강진호가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았다. 그의 차가 과격하게 움직여 총회를 빠져나갔다.
국도를 타고 달리며 강진호는 이마에 손을 댔다.
‘바쁘군.’
정확하게 말하자면, 바쁘다기보다는 정신이 없었다. 최근 그가 맡고 있는 일이 그의 한계를 조금 넘어섰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대한 적을 맞아 싸우는 것이라면 아무래도 좋겠지만, 이건 그런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강진호는 평생에 걸쳐서 이렇게 여러 곳을 동시에 신경 써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사실이 강진호를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변해야지.’
이 세상은 강호처럼 그저 강한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세상이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그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 싶다면 더 알아야 하고, 더 격하게 부딪쳐야 한다.
가만히 앉아서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지만, 때로는 그 사실이 강진호를 부담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총회의 문제.
재단의 문제.
거기에 외국의 문제까지.
그 모든 일들이 동시에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바쁜 게 아니야.’
강진호가 시트에 몸을 묻었다.
‘피곤한 거구나.’
몸은 여전히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정신적인 피로가 심한 느낌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간만에 아무 생각 없이 조금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강진호의 기분을 알아챘는지 갑자기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네. 강진호입니다.”
[뭐해요?]“보통 전화하고 나서 다짜고짜 뭐하냐고 물어봅니까?”
[어? 이 양반, 까칠하네?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요? 아니면 피곤한가?]“…….”
귀신이다.
지금 그는 귀신과 통화를 하고 있다.
딱 한 문장을 말했을 뿐인데 대체 어떻게 저런 반응이 나온단 말인가.
[왜 말이 없어요?]“아뇨, 아닙니다. 아무것도.”
이 여자 앞에서는 말도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강진호였다.
[흐응, 좀 이상한데? 여자 만나나?]“아니…….”
[아닌 거 아니까 흥분하지 말아요.]지금까지의 심각함이 일순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뭔가 느슨하게 풀리던 몸이 살짝 활력을 얻는 느낌이 났다.
돌이켜 보면 최연하는 항상 그런 사람이었다.
황당한 일을 저지르기는 하지만, 같이 있다 보면 이상하게 힘이 나는, 그런 사람. 어쩌면 강진호는 그래서 최연하를 만나는 걸…….
[그냥 그렇게 멍하게 있지 말고 뭘 좀 물어보든가, 안부라도 묻든가! 전화 받는 사람 어디 갔어요? 이러니 내가 속이 타 죽는 거 아니에요! 진짜!]……싫어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싫어했다. 맞다.
뭔가 살짝 미화되었던 추억이 뺨을 후려치며 정신 차리라고 외치는 기분이었다.
“……요즘 괜찮아요?”
[최악이에요.]“…….”
왜 물어보라고 한 거야?
이 여자, 대체 뭐하는 여자야?
잊고 있던 최연하의 습성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만날 때마다 이 여자에게 휘둘려 다녔다.
“촬영이 힘들어서 그래요?”
[촬영은 촬영인데, 뭐라고 해야 할까…… 신경 쓸 게 너무 많아서 짜증난다고 해야 하나?]“네?”
뭔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그런 거예요. 한국에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됐던 걸 여기서는 신경 써야 하거든요.]“예를 들면?”
[물도 안 맞고, 음식도 안 맞잖아요. 그런데 체중 관리를 해야 하니까 무작정 안 먹을 수는 없고, 억지로 과자라도 먹어서 체중 유지하려고 하는데, 엄청 습해서 짜증은 두 배로 나고.]“…….”
그건 그냥 성격이 나빠서 벌어지는 문제 같은데…….
[이런 건 그나마 참을 수 있어요. 제일 짜증 나는 건 촬영도 몇 배로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거예요. 일단 대사를 중국어로 쳐야 하니까 감정 몰입하는 와중에 내 발음이 지금 제대로 나오고 있는 건지 걱정되고, 그러는 와중에 그런 거 있잖아요. 의상이라고 해야 하나?]“의상이요?”
의상이 어쨌단 말인가.
[이게 현대극이거나 한국 사극이면 적절한 의상을 내가 아니까 조정할 수 있는데, 이건 중극 사극이잖아요. 그러니 지금 복장이 맞는 건지, 내가 분장이 제대로 된 건지, 그리고 내가 맡고 있는 배역이 중국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를 가지는 건지 감이 안 잡히니 억양 잡기도 힘들고……. 에이 씨! 말하다 보니까 더 짜증나네! 아! 성질나! 아악!]강진호는 가만히 전화기를 귀에서 멀리 떼어놓았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괴성을 질러 대는 최연하를 상대하고 있으려니, 한숨이 푹푹 나왔다.
“정 힘들면 그만두는 게 낫지 않아요?”
[와, 이 사람 말하는 거 봐.]“네?”
[강진호 씨, 내가 정말 강진호 씨에게 안심하는 것 하나가 뭔지 알아요?]“……모르겠습니다만.”
[당신 얼굴 보고 다가온 여자도 당신이랑 10분만 말해보면 치를 떨고 도망갈 거라는 점이에요. 얼마나 안전한 남자인지.]“…….”
이거…… 욕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욕 같은데?
[어떻게 여자가 싫어할 말만 골라서 하냐. 그냥 같이 맞장구 쳐주고 박수나 쳐달라는 거예요. 해결책을 제시해 달라는 게 아니라.]“……왜 그렇게 해야 하는 겁니까?”
[아뇨. 강진호 씨는 안 그래도 돼요. 절대 그러지 말고, 지금 상태를 유지해요. 적어도 내가 돌아가기 전까지는.]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강진호가 혼란에 빠진 사이, 건너편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경 쓸 게 너무 많고 힘들지만, 그래서 더 보람찬 것도 있어요. 열심히 해야죠. 적당히 손을 빼고 대충 찍었다가 찍혀 나온 영상이 이상하면 정말 미칠 것 같거든요.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신경 썼으면 훨씬 나은 결과물이 나왔을 텐데. 그 조금 피곤한 게 뭐라고 내가 이리 대충 살았나’ 그런 생각이 들면 그날 잠도 못 자요.]“…….”
강진호는 뜨끔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남 잘되라고 하는 일이 아니고, 나 좋자고 하는 일인데, 내가 징징대면 안 되는 거죠.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요. 다 노력한 만큼 받는 거지.]“그렇죠.”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러네요.”
이 사람은 참 이상하다.
이렇게 한 번씩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에게 도움을 준다. 마치 그를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최연하 씨.”
[네.]“고맙습니다.
[뭐, 뭐래?]수화기 건너편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찢어질 듯 높아졌다.
강진호는 가볍게 웃었다.
“지금 운전 중이라 오래 통화 못할 것 같네요. 나중에 전화드릴게요.”
[운전하고 있었으면 전화를 받질 말았어야지, 이 인간아! 당장 끊어요!]“넵.”
전화를 끊은 강진호가 웃으면서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이상한 방식으로 사람에게 힘을 주는 사람이었다.
‘한 번 들러볼까?’
시간을 내서 중국에 한 번 들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 강진호가 조금은 편안해진 얼굴로 차를 몰았다.
차고에 차를 대고 내린 강진호가 대문으로 향했다.
일단 오늘은 조금 쉬어야…….
그때였다.
“강진호 씨?”
강진호의 등 뒤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강진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몸을 뒤로 돌렸다. 그곳에는 정장을 말쑥하게 빼입은 남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진호는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장다징이라고 합니다.”
“중국인?”
“예. 강진호 씨, 당신께 제 주인의 말을 전해 드리러 왔습니다.”
장다징과 강진호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주인?”
“예.”
장다징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요란한 당신의 삶에 종지부를 찍어주실 분이지요.”
강진호의 입가에 미소가 맺히기 시작했다.
복잡하고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맑게 깨이는 느낌이었다.
강진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 말은 전해야겠군.”
장다징의 눈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굳이 찾아와서 죽어주겠다고 하니 고맙다고 말이야.”
달빛 아래서 강진호가 이를 드러내고 웃기 시작했다.
소름 끼치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