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522
#521.
자각하다 (1)
깨닫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의 피로가 어디에서 왔는지 말이다.
어쩌면 자신에 대해서 가장 모르는 사람은 강진호일지도 모른다.
복잡한 상황에서 벗어나 누군가와 치고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자 머리가 맑게 개고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강진호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실망과 정말이 아니라 숨길 수 없는 환희를 담고서 말이다.
― 언제까지 자신을 속일 생각이지?
들려온다.
언제나처럼, 그의 목소리가 말이다.
자신임에도 자신이 아닌 목소리.
그 목소리는 이럴 때마다 슬며시 나타나 그에게 말을 건네왔다.
이제는 의식적으로 분화시키려 하지 않고 있지만, 한 번 나뉜 의식은 쉽사리 하나로 합쳐지지 않았다. 그가 의식을 하나로 통합하려 할 때마다 슬며시 그의 내면으로 숨어든 놈이 이럴 때만 재미있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 너는 마귀다. 잊은 것은 아니겠지?
‘잊었지.’
아니, 잊으려 했지.
하지만 이럴 때면 항상 자각하게 된다.
드러난 삶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고 말은 하지만, 그는 언제나 피를 갈구했다.
그의 육체가 마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인지, 그게 아니면 그의 본성이 원래 그런 식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언제나 피를 갈구하고 있었다.
우습게도 말이다.
아이들을 위해서 재단을 만들고, 총회를 위해서 무학을 전수하는 강진호와 피에 굶주려 몸을 떨고 있는 강진호, 그 모두가 강진호였다.
“저는 그분의 말을…… 똑똑히 전했습니다.”
장다징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의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여기서 빠져나가고 싶다.
지금이라도 몸을 돌려서 전력으로 달려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지 않는 이유는 스스로가 하는 일에 대한 의무감 때문이 아니었다. 맹수를 상대할 때는 절대 등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등을 돌리면 저 짐승이 당장에라도 그를 덮쳐 뒷덜미에 송곳니를 박아 넣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사람의 기질이 이렇게 순간적으로 달라질 수 있나?’
그는 강진호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한국에 머무르는 이유의 태반은 강진호를 감시하는 것이었고, 지금까지 강진호가 얼마나 많은 짓을 저질렀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그만큼이나 강진호를 고평가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직접 본 것이 있고, 느낀 것이 있다. 그런데 어찌 강진호를 경시하겠는가.
하지만 지금 그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 착각이었어.’
그는 강진호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옆에서 지켜보는 것과 이 사람의 앞에 서는 것에는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이 끔찍한 느낌에 노출되어 보지 못한다면 죽어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제야 장다징은 몇 가지 의문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강진호의 지배는 느슨하다.
과연 그가 총회를 지배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는 총회 내에서 어떠한 직책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총회를 물리적으로 억압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방진훈 등이 세력을 규합하여 강진호를 몰아내려 한다면 얼마든지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강진호가 강하다고 한들 총회 전체와 싸울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답답했다.
자신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강진호가 말이다. 만약 그가 강진호의 입장이었다면, 확실한 세력과 지위를 구축하여 총회를 발아래 묶어두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럴 필요가 없던 거야.’
총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대부분 한 번이라도 강진호와 적대해 본 적이 있던 이들이다. 그들은 아마 이런 강진호의 본성을 그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감히 반기를 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겠지.
강진호가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왔다. 장다징은 대체 무슨 말을 해야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강진호가 가만히 손을 뻗어 장다징의 목을 움켜잡았다. 마치 금방이라도 그의 목을 부러뜨려 버리겠다는 듯 잔뜩 힘이 들어간 근육의 약동이 느껴졌다.
“전언은 잘 들었다. 그런데…….”
강진호가 가만히 웃었다.
“한 가지 이해 안 가는 게 있는데 말이야.”
장다징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몸은 마치 사형장에 끌려가는 사형수처럼 굳어버렸다.
강진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그는 조금도 예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든 간에 그에게 그리 이롭지 않은 말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어차피 들을 말은 다 들었고, 너는 내 적이겠지. 그럼…….”
강진호가 낮게, 아주 낮게 으르렁댔다.
“너를 왜 살려 보내야 하지?”
“…….”
장다징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이런 식의 반응은 한 번도 예상해 본 적이 없었다. 강진호에게 칼끝을 들이민 건 그가 아니라 바토르니까. 강진호도 당연히 바토르를 적으로 인식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강진호는 그가 생각하는 무인이 아니었다.
무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야수에 가깝다. 일반적으로 경지에 오른 무인들은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 이들을 하찮게 여긴다. 굳이 그들을 죽여야 할 이유조차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강진호는 그런 무인들과는 달랐다.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눈앞의 상대를 찢어발길 수만 있다면.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광포한 야성에 노출된 장다징의 머리가 백짓장처럼 새하얘졌다.
‘죽는다.’
가만히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고 있는 강진호를 보고 있자니, 죽음이라는 말이 덜컥 실감이 났다.
왜냐면 역력했으니까.
강진호는 지금 그를 죽일 구실을 찾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를 죽이지 않을 구실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당장에라도 그를 죽이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실감하자 전신이 떨려왔다.
‘생각해야 해.’
뭔가 찾아내야 한다.
강진호가 그를 죽이지 않아도 되는 구실을 말이다. 하지만 이미 하얗게 질려 버린 그의 머리는 평소처럼 부드럽게 움직이지 못했다. 녹이 잔뜩 쓴 태엽 장치가 삐걱대며 돌아가듯 버벅이고 있었다.
“사, 살려…….”
“재미있지 않아?”
강진호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네 목적은 나를 죽이는 거잖아. 그렇지? 어떻게든 나를 끌어내 죽이는 게 네 목적이겠지. 그러면서 너는 온전히 살아 돌아가기를 기대하고 있지. 우습게도 말이야.”
강진호가 장다징을 바짝 끌어당겼다.
“한 발 물러서서 구경이라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나? 너는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어? 그럼 알아야겠지. 그게 틀린 생각이었다는 걸 말이야.”
강진호의 눈이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장다징은 자신의 목을 움켜잡은 강진호의 팔을 마구 긁었다. 하지만 강진호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뇌에 산소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다. 더더욱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가 없었다.
필사적인 발악 끝에 나온 말은 허무하리만큼 빤한 말이었다.
“자…… 장소. 자, 장소.”
하지만 그 말이 강진호의 흥미를 끌었다.
“흠?”
강진호가 장다징의 목을 움켜쥔 손을 놓았다.
털썩.
바닥으로 쓰러진 장다징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한동안 쉬지 못한 숨을 단번에 몰아쉬겠다는 듯이 마치 커다란 유압식 펌프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그의 목에서 터져 나왔다.
“커허억! 커억!”
강진호는 숨을 몰아쉬는 장다징을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장소! 그리고 시간입니다!”
장다징은 자신이 어떤 처지에 처해 있는지를 잊지 않았다는 듯, 정신이 들자마자 소리쳤다.
“장소?”
“바토르 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최적의 장소를 수배하겠다고 말입니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서로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장소를!”
장다징의 말은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그와 동시에 한편으로는 호소라 할 만했다. 이 말에 그의 운명이 걸려 있으니까.
강진호는 아무 말 없이 장다징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의 무거움이 장다징을 짓눌렀다.
“재미있군.”
강진호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 세계로 넘어온 이후로 이런 일은 처음이니까. 그동안 그를 노리고 온 이들도 있고, 이상하게 휘말려서 그와 대적하게 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정면으로 그에게 도전해 오는 이는 처음이었다.
과거에는 꽤나 흔한 일이건만, 오랜만에 이런 일을 다시 겪으니 기이한 감흥이 일었다.
결과가 아니라 전투,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느낌.
그 느낌이 강진호를 자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토르라는 자.
“야구장에서 봤던 그자겠지?”
“그렇습니다.”
장다징 역시 강진호가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강자는 강자를 알아보는 법.
바토르가 강진호에게서 강렬한 존재감을 느꼈듯이, 강진호 역시 바토르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당시 강진호의 반응이 그걸 증명해 주고 있었다.
“장소와 시간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살려 달라?”
“예.”
장다징은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팽개쳤다. 지금은 살아 돌아가는 게 우선이다.
“거래라도 하자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장다징이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자비를.”
“…….”
강진호가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박은 장다징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보는 네 목숨 값을 상회하는군. 놓고 꺼져라.”
“감사합니다.”
고개를 든 장다징의 이마가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하지만 장다징은 조금도 굴욕적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나고 자란 곳은 이곳과는 다르다.
강자가 심심풀이로 약자를 죽인다고 해서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 곳이 지금의 중국이고, 지금의 중원이었다.
강자의 변덕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데 있어서 자존심 따위는 거추장스럽기만 한 것이다.
장다징이 작게 강진호에게 속삭였다.
장소와 시간을 알린 장다징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강진호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장다징이 부리나케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조금만 시간을 더 끌면 강진호가 또 마음이 바뀔지 모른다는 듯이 말이다.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지는 장다징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강진호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나와.”
대답은 없었다.
잠시 기다리던 강진호가 으르렁대듯 말했다.
“목을 뜯어내 버리기 전에 나오는 게 좋을 거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쪽 골목의 공간이 통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
하지만 강진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곳을 노려보았다. 일그러진 공간이 쭉 펴진다 싶더니, 그 안에서 노신사와 익숙한 얼굴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속이려는 것은 아니었어요. 그저…….”
엘레나.
그녀가 더듬더듬 변명을 했지만, 강진호의 시선은 그녀에게로 향해 있지 않았다. 그 둘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강진호의 시선은 노신사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손을 들어 엘레나의 발언을 막은 노신사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처음 보는군. 나는 위긴스라고 하네.”
나이트 위긴스가 결국은 강진호의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