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527
#526.
격렬하다 (1)
‘뭐지, 여긴?’
이현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위적인 자연이라고 해야 할까?
이현수가 받은 인상은 딱 그랬다.
사람의 손길을 전혀 타지 않은 듯한 우거진 수풀들 사이로 나 있는 길. 그리고 그 길의 끝에 드러난 공터.
분명 길이 있기는 하지만, 사람이 편히 다니라고 만들어놓은 길은 아니었다. 최대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만들어놓은 길이었다.
그런 길을 타고 들어온 공터에서 갑자기 눈부신 빛이라니.
자신의 눈을 찔러 들어오는 빛의 정체를 확인한 이현수가 살짝 놀란 기색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명?’
철골 구조물에 매달린 조명이었다. 마치 콘서트장을 보는 것 같은.
구조물 자체가 낡고 오래되어 있다는 느낌은 들지만, 저런 구조물이 이런 산 중간에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 조명이 비추는 곳에는 마치 육각의 링 같아 보이는 철장들이 있었다.
빨갛게 녹이 슬어 있는 철장과 그 철장을 비추는 조명을 보는 순간, 이현수는 이곳이 원래 뭘 하던 곳인지를 알 수 있었다.
“투견장?”
불법 투견장.
단속을 피해서 산속에 만들어진 투견장이었다. 지금은 버려졌는지 관리가 영 부실해 보였지만 말이다.
“적당한 곳 아닌가?”
이현수의 고개가 격하게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그의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조명 뒤쪽에서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바토르.’
소문으로 듣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일반인의 두 배가 넘는 어깨는 저 사내가 바토르라는 숨길 수 없는 증거였다.
“지금 우리의 처지와 말이야.”
바토르의 시선은 이현수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이현수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강진호에게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 않나?”
바토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저 걸어나오는 것뿐이다. 그런데도 이현수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두어 발짝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다르다.
지금까지 느낀 그 어떤 압박과도 다르다.
강진호가 으르렁거리는 야수처럼 느껴진다면, 바토르는 마치 거대한 석상이 걸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인간이 아닌 것 같은 거대한 육체가 적의를 가지고 다가오는 모습은 그 어디서도 느낄 수 없던 압박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저 석상 같은 것이 아니다.
바토르의 근육은 스스로 살아 있는 생물 같았다. 바토르가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꿈틀거리는 근육은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저 단련된 육체에서 대체 얼마나 거대한 파괴력이 나올 것인가.
내공을 바탕으로 무학을 익히는 자들에게 근육이라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하지만 바토르의 근육은 그런 생각을 다시 하게 해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번들거리는 상체와 양 팔목에 차여져 있는 각반.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절로 막혀온다.
“꽤나 낭만적이군.”
등 뒤에서 강진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제야 이현수는 조금 진정할 수 있었다. 적으로 만난다면 최악이지만, 아군으로는 최고인 자가 지금 그의 뒤에 있었다.
“생긴 것답지 않게 말이야.”
“큭큭큭.”
바토르가 낮게 웃었다.
“그래도 이미지와 적당한 곳을 고른 건 칭찬해 주지.”
“누추한 곳으로 모신 것은 사과하지. 마땅한 곳이 없어서 말이야.”
말과는 다르게 바토르는 이곳이 꽤나 마음에 든다는 얼굴이었다.
“인정할 건 인정하라고. 지금의 무인들은 다들 이런 처지지. 결코 드러나서는 안 되고, 남들의 눈을 피해 자신이 최고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지. 그것을 즐기는 이들끼리만 말이야.”
“꿈보다 해몽이군.”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그건 네 입장이겠지, 홍왕의 개.”
바토르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다른 이였다면 별것 아닌 움직임이겠지만, 워낙에 커다란 바토르의 표정은 모두에게 너무도 선명히 보였다.
“그 혓바닥, 조심하는 게 좋을 텐데?”
“내 혀는 내가 알아서 하지. 충고는 고맙지만 말이야.”
강진호가 태연하게 말을 받자, 바토르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멀리서 봤을 때와는 조금 다르군. 살기만 봤을 때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멍청이일 것 같았는데.”
“그 얼굴로 다른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가?”
“……말로는 못 당하겠군.”
바토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좋다. 강진호, 이국의 무인이여. 이 하찮은 땅에 그대와 같은 무인이 있다는 것이 나를 얼마나 기쁘게 하고 있는지 그대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강진호는 대답 없이 가만히 바토르를 노려보았다.
“그대 역시 마찬가지겠지.”
“…….”
“이 불모의 땅에서 갈증에 시달렸겠지. 그대의 전부를 걸어 싸울 수 있는 적이 없음에 말이야.”
강진호가 피식 웃고 말았다.
“지금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음?”
“지금이 21세기라는 걸 감안해 줬으면 좋겠군. 내가 싸우고 싶었다면 그냥 비행기 타고 중국이든 어디든 가면 그만이야.”
바토르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핫! 내 말이 그게 아니라는 걸 너는 알고 있을 텐데.”
“그리고 하나 더 정정해 주자면…….”
바토르가 흥미롭다는 듯이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너 따위로는 내 갈증이 풀리지 않아.”
“…….”
순간, 바토르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오만하군. 더없이 오만해.”
“그럴지도 모르지.”
“그 오만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바토르가 몸을 빙글 돌리더니, 그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쿠웅!
바토르가 내려선 곳은 투견장 안이었다. 사람 수십이 들어가도 될 것 같은 철장이 바토르가 들어서는 순간 너무도 좁아 보였다.
“들어와라. 네 오만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강진호가 피식 웃더니 몸을 돌렸다.
“도망가는 거냐?”
“성질 참 급하군.”
강진호는 느릿한 걸음으로 차로 돌아가더니, 뒷좌석을 열어 청루와 홍루를 빼냈다. 아직은 아공간이라는 외국의 기술을 완벽히 익히지 못해서 이런 거추장스러운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검인가?”
“맨손을 원하나?”
“아니, 아니지. 네가 검사라면 그것도 좋다. 나는 최상의 너를 상대하고 싶을 뿐이다.”
강진호가 가볍게 웃었다.
투사.
바토르를 정의하자면 그래야 할 것이다.
신경전을 펼치기는 했지만, 함정도 파지 않고 정정당당히 싸우기를 원하는 이 순수한 투사에게 악감정이 생길 리 없었다. 그저 서로 딛고 선 곳이 다를 뿐.
찰칵.
청루와 홍루를 허리에 찬 강진호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한 대 피우고 시작하자고.”
“……여유가 넘치는군.”
“굳이 긴장할 이유도 없으니까.”
강진호는 느긋하게 담배를 피웠다.
하지만 그의 표정과 다르게 그의 가슴은 천천히 불이 붙고 있었다.
담배를 빼 문 것도 과도하게 흥분하는 가슴을 달래기 위한 조치였다.
‘오랜만이군.’
그러고 보면 정말 오랜만이다.
그저 그와 싸우고 싶어 하는 적을 맞이하는 것은 말이다.
수많은 함정을 뚫고 어떻게 해서든 그를 죽이고 싶어 하는 적들을 돌파해 왔다.
하지만 이자는 다르다.
그저 강진호와 싸울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즐거워한다. 현대에서 그가 만난 무인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예전에는 꽤나 끔찍하게 여기던 모습이기도 하지.’
현대인의 사고방식으로 중원에 떨어진 강진호는 저런 무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전투의 즐거움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마저 하찮게 여긴단 말인가.
현대의 격투가들에게 칼을 쥐어 주고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는 데스 매치를 치르라고 하면 다들 미쳤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중원에서는 그게 일상이었다.
그 빌어먹을 야만.
경멸하고 욕해온 그 야만이 오랜 세월을 지나 지금 그의 앞에 되살아났다.
‘우습군.’
하지만 그 야만을 다시 바라보는 심정은 생각만큼 혐오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뭐랄까…….
어이없는 일이지만, 조금 향수를 자극당하는 기분이랄까?
“후우…….”
강진호는 담배를 빨았다. 그러고는 내뱉었다. 다 피운 담배를 바닥에 던져 발로 비벼 끈 강진호가 천천히 투견장으로 걸어갔다.
그런 강진호의 앞을 이현수가 가로막았다.
“강진호 씨.”
“비켜 있어. 금방 끝내고 올 테니까.”
“……믿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현수의 눈에는 감출 수 없는 불안함이 어려 있었다.
그도 강진호가 질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 바토르를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도 바토르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강진호는 이현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고는 투견장으로 걸었다.
끼기기익.
투견장의 문을 열자 날카로운 쇠 마찰음이 들려왔다. 꽤나 오래 방치된 듯 잔뜩 녹이 슬어 있었다. 강진호는 몸을 숙여 안으로 들어가 투견장의 문을 닫았다.
가만히 강진호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던 바토르가 씨익 웃었다.
“마치 투견이 된 기분인데?”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군.”
“자네는 낭만을 좀 익힐 필요가 있겠어.”
강진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만 움직이면 다 날아가 버릴 우리가 무슨 의미가 있지?”
“적어도 그림은 나오지 않는가.”
강진호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 중국…… 아니, 몽골 놈은 생긴 것답지 않게 섬세한 면이 있었다.
그리고…….
‘재미는 있군.’
우리 안에서 주변을 둘러보자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뻘겋게 녹이 슬어 있는 우리.
그리고 그 위에서 두 사람을 비추는 조명.
도시의 소음과는 다른, 선명한 정적.
굳이 분위기를 따지자면 나쁘지 않았다.
“강진호.”
바토르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대초원의 전사, 바토르다. 오늘 너의 목을 가져갈 이다. 하나 너무 억울해하지 마라. 나는 너를 인정했다. 네가 비록 오늘 죽는다 하더라도 너의 혼은 나와 하나가 되어 살아갈 것이다.”
마치 엄중한 예식을 치르는 것처럼 바토르가 강진호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본 강진호의 입에서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큭큭큭큭.”
“……뭐가 우습지?”
“꼴같잖아서.”
“……놈!”
바토르가 막 뭐라고 항변하려는 순간, 강진호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시작인가?’
바토르가 예상했다는 듯 양팔을 들어 올렸다. 마기를 끌어 올린 마인은 평소보다 폭력적이 된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바토르는 강진호의 공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그에게 날아온 것은 검이 아니라 말이었다.
“혼이 어떻다고?”
강진호는 웃어버렸다.
이놈은 전혀 모르고 있다.
죽는다는 게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말이다.
죽음을 겪어보지 못한 이는 절대 알 수 없다.
하지만 괜찮다.
이제 알게 해줄 테니까.
그도 겪어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가르쳐 주지.”
스르르르릉.
강진호의 양손에서 청루와 적루가 뽑혀 나왔다.
조명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던 적루와 청루가 일순 검게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강진호의 발아래에서 검은 마기가 울컥울컥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발끝에서 시작된 마기가 전신을 휘감아 오르고, 그 어둠 속에서 붉디붉은 강진호의 두 눈이 불타올랐다.
그 기괴한 광경에 바토르마저 일순 몸이 굳어버렸다.
수많은 전투를 겪어온 그조차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공포스러운 모습이었다.
‘이게 진짜 마인이라는 건가?’
세상의 절망을 모두 모아놓은 듯한 모습을 한 강진호가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죽음이 무엇인지 말이야.”
강진호의 마기가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