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529
#528.
격렬하다 (3)
강진호의 청루와 적루가 바토르의 전신을 누빈다.
팔, 옆구리, 그리고 목.
본연의 날카로움만으로도 쇳덩어리를 양분해 버릴 명검들이 강진호의 기운을 받아 수십 배의 예기를 뿜어냈다.
하지만 그뿐.
카앙! 카앙! 카아앙!
세상의 모든 것을 갈라 버리던 강진호의 검이 바토르의 육체만은 뚫지 못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검을 적중시켰음에도 바토르의 육체는 강진호의 검을 튕겨내고 있었다.
“소용없다!”
바토르는 강진호의 공격을 무시하고는 주먹을 휘둘렀다.
“큭!”
강진호의 입에서 처음으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수도 없이 자리한 빈틈이 오히려 미끼가 되었다. 피하려 했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던 느린 주먹이다. 하지만 피하지 않고 상대의 빈틈을 노린 대가가 지금 강진호를 조여오고 있었다.
빠르게 끌어당겨진 두 검이 십자(十字)로 교차하며 바토르의 주먹을 막아낸다.
아니, 막아내야 했다.
쿠우웅!
바토르의 주먹이 강진호의 검을 후려치는 그때, 강진호는 순간적으로 하늘을 보았다.
‘뭐?’
지독한 비현실감.
순간적으로 다른 차원에 진입한 것 같은 기이한 감각이 사라지는 찰나, 전신에 끔찍한 격통이 몰려들었다.
“끄윽!”
그러더니 등이 바닥에 처박힌다.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콰득!
손을 뻗어 바닥을 움켜잡은 강진호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였다.
“우욱!”
입가로 피가 솟구친다.
일격.
단 일격이다.
그 일격의 대가로 강진호의 내부가 모두 뒤틀려 버렸다. 파열된 내장에서 역류한 피가 끝도 없이 입으로 뿜어져 나온다.
“쿨럭.”
손을 들어 입가를 훔친 강진호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야지.”
바토르가 한껏 입을 벌려 웃었다.
“일격으로 죽으면 안 되지. 우리는 좀 더 즐겨야 하잖아. 그렇지 않아?”
“…….”
강진호의 눈이 붉게 일렁였다.
외공을 익힌 자를 상대하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수도 없는 외공을 상대해 보았다. 그중 가장 껄끄러운 이들은 역시나 소림의 무승들이었다.
정교함을 바탕으로 하는 타 명문들과 다르게 소림은 육체의 단련 역시 게을리하지 않는 이들이었다. 내외공이 동시에 경지에 오른 그들은 금강불괴(金剛不壞)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육체를 담금질해 냈다.
하지만 이것과는 다르다.
제아무리 완벽한 육체를 손에 넣는다고 하더라도 한계는 존재한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한계.
아무리 무공을 익힌다고 해도 인간은 새처럼 날 수 없고, 물속에서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의 육체가 가진 선천적인 한계를 완벽히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저 바토르의 육체는 그걸 해내고 있었다.
과거, 그가 겪어본 그 어떤 외공의 소유자보다 지금 바토르의 경지가 높다.
그 사실이 강진호를 고양시키고 있었다.
있다.
이 세상에도.
예전 그가 존재하던 세상을 뛰어넘는 강자가.
“크크큭.”
강진호의 입에서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그 광경을 본 바토르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
“미치기라도 한 건가? 웃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닐 텐데?”
강진호가 웃음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고맙군.”
“……뭐?”
강진호가 허리를 폈다.
여전히 그의 입과 코로 피가 흘러나오고 있지만, 그 양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사실 조금 무서웠다.”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여기에는 없을까 봐. 내가 더 올라야 할 곳이 말이야.”
바토르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그저 예전의 무위를 되찾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릴까 봐…… 조금은 무서웠고, 조금은 허무했지. 그런데…… 덕분에 알게 되었다. 이 세상에는 아직 가능성이라는 게 있군.”
“가능성?”
“그래.”
강진호는 웃어버렸다.
누구도 그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
한국의 무인들이 벌벌 떨던 이들도, 그리고 일본에서 왔다는 이들도, 심지어는 서양에서 왔다는 이들마저 말이다. 그저 예전의 무위를 조금 되찾은 것만으로 너무도 쉽게 그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인간이란 한 번 오른 산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그 산이 더 작아진다면 어쩔 텐가.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산악인이 설악산에 만족할 수 있는가?
하드 모드로 플레이하던 게임을 이지 모드로 플레이하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가?
적어도 한 분야에 모든 것을 걸고 치열하게 달리던 이들에게 난이도가 하락한다는 것은 즐거움보다는 지루함을 가져다주기 마련이었다.
강진호가 딱 그런 심정이었다.
이곳의 무인들은 나약하다. 너무도 나약하다.
그렇기에 실감이 나지 않는다.
세상 어딘가에 대단한 강자가 있다고 누군가 떠들어 대도 그 말이 피부로 와닿지 않는다. 홍왕이니 마스터이니, 말을 들어도 흥미가 동하지 않는다.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이 육지인데, 저 어딘가에 바다가 있다는 말을 듣는다고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발견한 것이다.
강을.
끝이 없는 대양으로 향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도도한 강을 말이다.
그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도 기뻐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놈.”
하지만 바토르는 그리 기쁜 얼굴이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지금 강진호의 시선이 그에게 향해 있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굴욕감.
목숨을 걸고 싸우는 상대가…….
그것도 자신의 일격을 먹은 상대가 전투 중에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굴욕이었다.
“이노오오오오오옴!”
바토르의 전신이 격하게 떨렸다.
이마에는 핏대가 투둑투둑 불거져 나오고, 꽉 마주 물린 이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감히 나를 앞에 두고!”
강진호 역시 바토르의 투기에 반응했다.
지금까지의 바토르 역시 강한 투기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지금 바토르가 내뿜는 투기는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죽인다!”
전신이 짓눌리는 것 같은 압력.
“좋군…….”
강진호는 신음하듯 말했다.
그랬다.
예전에는 이랬다.
강자와 승부를 겨룬다는 것은 언제나 이랬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의지, 그리고 서로를 죽이고 말겠다는 적의가 기이한 압력을 만들어낸다.
손끝이 저릿저릿할 만큼 말이다.
너무도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각이다.
“미안하군.”
강진호는 순수한 마음으로 사과했다.
“고통 없이 죽여주고 싶은데……. 아직 나는 예전의 나를 모두 되찾지 못했거든. 그래서 조금 아플 거야. 이해해 주길 바라지”
“잘도 지껄이는구나.”
“말은 이제 됐어.”
무인의 승부에 말은 필요하지 않다. 할 말이 있다면 주먹으로, 그리고 검으로 하면 된다.
강진호가 양손에 들린 검을 늘어뜨린 채 천천히 바토르를 향해 걸었다.
‘음?’
바토르의 얼굴이 일변했다.
이상하다.
강진호는 그저 걸어오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머리가 아닌 몸이 느끼고 있었다. 어깨가 들썩거리고, 다리가 움찔거린다.
당장에라도 튀어 나가라는 듯이 말이다.
‘이게 무슨…….’
그리고 또 한 걸음.
“욱!”
바토르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뭐냐?’
걸음.
걸음, 그 자체가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강진호가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거대한 압력이 일어난다. 기세 자체가 유형화되어 마치 천 근 바위처럼 바토르를 짓누르고 있었다.
‘들은 적이 있다.’
내력이 아닌 기세로 상대를 압박하는 무공.
하지만 그건…….
“마교인가?”
바토르가 이를 악물었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건너 건너 듣기로 분명 과거 마교에 그러한 무학이 있다고 했다.
소림의 사자후(獅子吼)처럼 그저 전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대로는 당한다.’
알고 있다면 대처도 할 수 있다. 상대가 걸음을 이어가도록 두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찮은 짓을!”
바토르가 크게 진각을 밟았다.
쿠웅!
강렬하게 바닥으로 내리꽂힌 발을 따라 지면이 쩌적쩌적 갈라진다.
강진호가 디뎌야 할 지면까지 일격에 부숴 버린 바토르가 솟구쳐 오른 바윗덩어리를 그대로 걷어찼다. 그러자 거대한 바위가 강진호를 향해 포탄처럼 쏘아진다.
“흡!”
짧은 기합성과 함께 강진호가 자신에게 날아드는 바위를 베어냈다.
스슷.
비단을 베어내는 것처럼 깔끔한 소리와 함께 강진호에게 날아들던 바위가 정확하게 둘로 나뉘어 좌우로 튕겨 나갔다.
그러더니 바위가 갈라진 틈으로 노한 얼굴의 바토르가 파고들었다.
“네놈!”
양 주먹을 모은 바토르가 그대로 주먹을 내려친다. 강진호가 바토르의 주먹을 피해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콰아아아아아앙!
하지만 바토르의 주먹은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바토르의 양손이 바닥을 내려치자마치 운석이라도 꽂힌 것 같은 거대한 크레이터가 만들어지며 사방으로 충격을 뿜어냈다.
“큭!”
강진호의 몸이 그 가공할 충격력에 공깃돌처럼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죽여주마!”
바토르가 악귀 같은 얼굴을 한 채 아직 허공에서 내려서지 못한 강진호를 향해 뛰어올랐다.
강진호는 허공에서 몸을 한 번 뒤집어 균형을 잡고는 튀어 오르는 바토르를 맞았다. 아니, 맞는 것이 아니다. 몸을 뒤집은 강진호가 허공을 걷어차고 아래로 쏘아진다.
바토르의 주먹이 가공할 힘을 싣고 뻗어졌다.
지독한 풍압.
그리고 지독한 내력.
스치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육체 따위는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도 남을 무시무시한 위력의 일권(一拳)이었다.
하지만 그 권을 바라보는 강진호의 눈동자는 변화가 없었다.
들끓어 오르는 혈기와 차가운 한기를 동시에 담은 강진호의 눈이 번뜩인다.
스르륵.
강진호의 몸이 마치 뱀처럼 바토르의 주먹을 타고 내려갔다. 의복은 바토르의 힘을 이기지 못해 모조리 찢겨 나가고, 피부는 시커멓게 죽는다.
하지만 강진호의 몸은 영활하게 움직였다.
“이!”
바토르의 일권을 흘려낸 강진호의 검이 휘둘러진다.
카아아아아앙!
거대한 해머로 쇳덩어리를 내려친 것 같은, 높고 날카로운 음성.
그런 후에…….
촤아아아악!
“크윽!”
처음으로 인간의 육체가 만들어내기에 온당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이놈!”
어느새 바토르의 왼쪽 가슴이 길게 갈라져 있었다. 바토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갈라진 가슴을 움켜잡았다.
치명상은 아니다.
뼈를 가르지 못했고, 심장에 닿지 못했다.
하지만 상처를 입은 것 역시 사실이다.
지금껏 바토르의 육체를 뚫지 못한 강진호의 검이 드디어 바토르의 육체에 제대로 된 상처를 입히는 데 성공한 것이다.
“큭!”
바토르가 자세를 바로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자 검을 늘어뜨린 채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 강진호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 육체…….”
강진호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신이 깃들어 있다고 하지 않았나?”
비웃음.
누구라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개 같은 놈이!”
분노한 바토르를 보며 강진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네 신은 너를 버린 모양이군.”
신이 사라진 곳에는 악마가 깃들기 마련이다. 강진호의 육체가 진득한 마기로 물들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고통 없이 죽여주지 못하는 걸 사과하지.”
강진호는 더없이 악해 보이는 미소를 띠며 적루와 청루를 바토르에게 겨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