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530
#529.
격렬하다 (4)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이현수는 공터에 제멋대로 주저앉아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도무지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뭘 보고 있는 거냐고…….”
이건 사람의 싸움이 아니다.
인간과 인간이 이리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떻게 사람이 산을 부수고 하늘을 날아오른단 말인가.
무학은 그런 것이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만들어주는 것.
하지만 이건 정도가 너무 심했다.
‘나는 그동안 대체 뭘 보고 살아온 거지?’
그는 드러나지 않은 세계의 주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겨우 그에 안주하지 않고 드러나지 않은 세계를 움직이는 이라고 스스로 자부해 왔다.
멍청하게도.
병신 같게도.
자신이 속한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그 표면만을 보고 이것이 전부라 생각해 왔다.
바다 위를 나는 바닷새가 바닷속이 얼마나 깊은지 알지 못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이현수는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바다의 깊은 심해를 목도하고 있었다.
그건 차라리 공포였다.
포말이 너울대고,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가 아니라,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깊은 심해의 압력을 전신으로 받아내는 느낌이었다.
알고 있던 세상이 무너진다.
그리고 지금까지 상상도 해본 적이 없던 새로운 세상이 그의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무의미하다.’
이들 앞에서 병력이란 개념은 의미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던 것.
왜 홍왕은 적극적으로 세력을 키워내지 않았을까?
아무리 삼왕이 서로 견제하느라 움직일 수 없다는 이유가 있다 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라면, 적어도 자신이라면 어느 정도의 리스크를 감수하는 선에서 끊임없이 세력을 키웠을 것이다.
어떻게든.
그렇지만 삼왕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을 보좌하는 수많은 이들 역시 그들을 움직이게 하지 않는다.
이게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를 주시하는 이현수의 가장 큰 의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이현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중이떠중이를 아무리 끌어모아도 의미가 없는 거야.’
그가 생각하는 세력과 그들이 생각하는 세력이 다른 것이다. 조무래기를 아무리 모은다고 해도 저들에게 대항할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
영남회 전체가 달려들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고 생각한 강진호조차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준 게 아니었다. 그런데 대체 병력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런 세계를 일단 한 번 봐버리면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단 하나의 고수.
일천의 무인보다 하나의 고수가 우선된다. 그렇다면 굳이 눈에 보이는 세력을 확충하는 데 열을 쏟을 필요가 없다. 한 명의 고수를 길러내는 것이 더 이득이니까.
그동안 이해가 가지 않은 모든 실타래가 동시에 풀리는 느낌이었다.
‘홍왕계에는 저만 한 고수가 얼마나 있는 거지?’
새삼스럽게 홍왕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저 바토르라는 자도 너무도 두렵다. 홍왕은 그런 바토르를 수족처럼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저 머리로만 이해하던 중국과 한국의 전력 차가 피부로 실감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자신들에게도 있다.
저들과 대등하게 맞서는 자가. 아니, 대등, 그 이상으로 맞서는 자가 말이다.
이현수는 강진호의 등을 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동아시아 최약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땅.
그 땅을 대표하여 강진호가 저들과 맞서고 있는 것이다.
‘눈을 떼지 마.’
지켜봐야 한다, 이 싸움을. 어떤 결과가 나온다 하더라도 말이다.
바토르는 조금은 당황한 눈으로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길게 갈라져 피를 흘리고 있는 커다란 가슴.
일반적인 무인이라면 죽고도 남았을 상처다. 바토르의 육체가 너무도 거대하기에 피육의 상처로 끝난 것이지, 일반적인 육체였다면 심장까지 간단하게 베이고 말았을 것이다.
‘대체 얼마 만이지?’
그의 육체가 피를 흘린 것이?
그의 육체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것은 그 혼자만의 평가가 아니었다. 그와 겨뤄본 이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그리 평했다.
그보다 강한 이는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그보다 강한 육체를 가진 이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토르의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자부심에 금이 가고 있었다.
바토르가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숨길 수 없는 노기가 그의 눈을 통해 드러나고 있었다. 그의 육체가 침범당했다는 사실이 그에게 끔찍한 굴욕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너…… 곱게 죽지는 못할 거다.”
강진호는 태연하게 바토르의 말을 받았다.
“생긴 것과 성격을 조금 맞춰주면 나도 상대하기 좋을 텐데 말이야.”
“뭐라고?”
“생채기 조금 난 것 가지고 징징대지 말라는 소리다.”
“…….”
강진호가 적루와 청루를 빙글 돌려 파지했다. 팔이 떨어지고 다리가 통째로 잘려 나가도 전진한다. 그리고 배에 창이 틀어박혀도 되레 밀고 들어가 창을 박은 이의 목을 자르려 들던 게 마교의 마졸들이다.
특히나 그의 친위대였던 마염(魔炎)들은 그런 싸움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았다. 그런 강진호의 입장에서 보자면, 생채기 하나 났다고 부들대는 바토르가 우습기 짝이 없었다.
‘모르는군.’
하기야 당연하지.
겪어봤을 리가 없지.
인간의 목숨이 바닥에 떨어진 칼 한 자루의 가치보다 못해지는 곳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게 너무도 당연한 곳을.
그 육체로 거친 야성(野性)을 과시하는 바토르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잔혹한 야만(野蠻)을 겪어보지 못했다. 너무도 정중하고 올발라서 헛웃음이 날 정도니까.
“나는…….”
바토르가 뭔가 말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강진호의 검이 휘둘러지면서 검끝에서 시커먼 마기가 초승달처럼 길게 뿜어졌다.
사아아아악!
예리한 칼로 비단 폭을 가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검은 검기(劍氣)가 바토르를 향해 날아들었다.
바토르의 얼굴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빠르지 않다.
이 검기는 결코 빠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바토르는 물러설 수 없었다. 지금 강진호는 이 일검으로 그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이미 한 번 무너진 그 육체로 이 검기에 맞설 것인가, 아니면 자존심과 자부심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피할 것인가.
이런 선택을 강요당한다는 것 자체가 굴욕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더욱 굴욕적인 것은 그가 지금 이 순간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조금 전이었다면 피할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의 공격을 그의 육체로 받아내고 나서 쓰러뜨리는 것이 그의 자부심이고, 그의 방식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한 번 강진호의 공격으로 상처를 입은 그의 육체가 과연 저 공격을 버틸 수 있을 것인가.
“크으윽!”
바토르는 물러서지 않았다.
자존심을 버리고 승리를 취하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다. 그런 승리는 승리가 아니다. 상대의 힘을 당당히 받아내고 이루는 승리만이 진심으로 웃을 수 있는 승리인 것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바토르가 바닥에 발을 박아 넣고는 가슴을 쫘악 폈다.
단전에서 휘몰아친 내력이 육체를 순환하며 피부와 근육을 단숨에 강철보다 단단히 강화한다.
그리고 그 강화된 육체에 강진호의 검기가 틀어박혔다.
까가가가각!
날카로운 칼로 우둘투둘한 쇳덩어리를 긁어내는 듯 기분 나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바토르는 저도 모르게 흘러나올 뻔한 비명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강진호의 검기는 그의 육체를 베지 못했다. 하지만 충격이 없던 것은 아니다. 절로 헉! 소리가 날 만한 거대한 충격이 그를 덮쳤다.
‘버텨냈…….’
고통을 참아내고 고개를 든 바토르는 보았다.
거대한.
지금까지 본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시커먼 검기를.
조금 전에 날린 일검(一劍)은 그저 인사에 불과했다는 듯 집채만 한 크기의 검은 검기가 그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바토르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건 마치 악의(惡意)의 덩어리 같았다.
검게 이글거리는 태양과도 같은 검기.
검기를 구성하고 있는 공력의 한 올, 한 올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기괴하고 끔찍한 모습이었다.
저걸 받아내라고?
저걸?
느리다.
너무도 느릿하다.
보통 사람조차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속도로 느릿하고, 또 느릿하게 날아드는 검기.
“……이 빌어먹을 놈이.”
강진호는 그를 쓰러뜨리려는 것이 아니다.
그를 피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자부심을 모조리 버리고 옆으로 달아나 목숨을 부지하라고 그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악마 같은 의도가 너무도 똑똑히 느껴지는 일검이었다.
하나 무시할 수가 없다.
그의 육체가 아무리 강하다고는 하나 저만한 공격을 정면으로 먹고도 버틸 수 있을 것인가.
바토르는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의 패배는 ‘피하지 못한다’가 낳은 결과였다. 인간의 반응속도를 초월한 공방의 결과, 누적된 대미지를 버티지 못한 바토르가 결국 무릎을 꿇는다.
이것이 지금까지 그가 받아들인 패배였다.
하나 지금은 그 경우가 다르다.
상대의 공격을 받아낸다는 것을 단 한 번도 고민해 본 적 없는 바토르에게 지금 강진호는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자신의 육체에 대한 믿음이 과연 어디까지인지 확인해 보자는 듯 말이다.
“이 개자식아아아아!”
바토르가 고개를 숙이며 거대한 고함을 토해냈다.
콰아아아아아앙!
하지만 그 고함 소리는 금세 거대한 폭음에 짓눌려 버렸다.
강진호의 검기가 폭발하며 거대한 불꽃을 피워 올렸다. 그건 차라리 폭발이라기보다는 소용돌이에 가까웠다.
지면에 충돌한 마기가 하늘로 치솟는다. 회전하고, 또 회전하며…….
검은 마기의 소용돌이가 순식간에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광포하게 휘몰아쳤다.
그런 후에…….
마치 그 모든 것이 환상이었다는 것처럼 순식간에 그 자취를 감췄다.
검기의 소용돌이가 사라져 버린 공터에서 바토르는 주먹을 꽉 쥔 채 우뚝 서 있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 그에게 우뚝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고민해 봐야 할 문제였다.
굴욕감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전신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자에게 우뚝이라는 말은 결코 어울리지 않으니까 말이다.
“피했군.”
낮은 비웃음.
딱히 웃음을 흘린 것도 아니고, 그저 말을 한 것뿐이지만,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저 목소리에 담겨 있는 비웃음과 조롱을 말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바토르의 몸이 움찔했다.
“몇 번이고 봤던 광경이지만…… 유쾌하지는 않단 말이지.”
강진호가 이죽이듯 말했다.
“신을 믿는 자가 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광경은 말이야. 네 육체에 깃들어 있는 신은 네게 믿음을 주지 못했군.”
“강진호.”
벌벌 떨리는 육체와 다르게 바토르의 음성을 착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까지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와 다르게 말이다.
“너는…… 너는 건드려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 해서는 안 될 짓을 했어.”
“크크큭.”
강진호의 입에서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병신 같은 소리를 하는군. 선을 넘은 지는 이미 오래야.”
그리고 그 선은 너희가 먼저 넘었지.
나를 건드린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 알게 될 거야. 내가 알려줄 테니까 말이야.
“이건 시작일 뿐이야.”
“우오오오오오!”
눈에 핏발을 잔뜩 세운 바토르가 귀가 찢어질 듯한 고함을 지르며 강진호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