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546
#545.
응집하다 (5)
처리라는 말은 쉽게 꺼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강진호와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워딩이 아니라, 강진호를 처리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 미묘한 어감의 차이를 감지하지 못할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그…….”
대답이 바로 나오지 못했다.
대체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하는가 하는 싸늘함만이 흐르고 있었다.
‘머저리 같은 것들.’
그 말이 나와주기를 그토록이나 바라고 있었으면서 막상 이야기가 나오자 시선 피하기에 바쁜 것을 보라.
하기야 이중걸 역시 이런 반응을 기대하고 말을 조금 일찍 꺼내기도 했다. 덕분에 이중걸은 싸늘해진 실내의 공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의지의 문제겠지요.”
“의지만 가지고는…….”
은근슬쩍 발을 빼는 움직임이 보였다. 이중걸은 허허롭게 웃었다.
‘이미 늦었다.’
이 말이 나와 버린 순간, 이곳에 있는 이들은 공범이 된 것이다. 공범이 살아남는 법은 완전범죄를 만들어내든가, 자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중걸이 은근하게 입을 열었다.
“강진호는 여러분에게 관심이 없소이다. 여러분이 뭘 한다고 해도 방진훈처럼 힘을 실어주지는 않겠죠. 결국 뒷방에서 늙어가느냐, 아니면 내 권리를 되찾는냐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다른 말은 그저 겉치레로 한 것뿐이다. 그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강진호는 여러분에게 관심이 없다’였다. 만약 여기서 배신을 하고 강진호에게 뛰어가 상황을 알린다고 해도 당신에게 떨어질 콩고물은 없다는 뜻이었다.
다들 그 말뜻을 알아들은 듯했다.
나름 노회한 생강들만 모아놓았더니, 두 번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 하나는 좋은 점이었다.
“그렇다는 건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라는 거군요.”
조 이사가 말을 받았다.
좌중을 한 번 둘러본 조 이사가 시선을 이중걸에게 고정했다.
“그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겠군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전 회…… 아니, 회주님.”
조 이사가 호칭을 바꾸는 것으로 돌아갈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 강진호라는 자는 만만치 않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자는 절대 상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기에 있는 분들도 다들 같은 생각이실 겁니다.”
침묵.
다른 이름으로 암묵의 동의가 쏟아졌다.
“다만! 그럼에도 회주님께서 이 말을 꺼냈다는 것은 나름의 복안이 있으시다는 뜻이겠지요?”
“말하지 않았습니까, 제게 방법이 있다고 말입니다.”
“……혹여 그 방법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니오.”
이중걸이 고개를 저었다.
“방법은 입으로 나와야 방법이 되는 법이지요. 하나 그 방법이라는 것은 동지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방에 있는 이들을 모두 믿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조 이사가 고개를 돌려 모두를 바라보았다.
“저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조 이사의 시선을 받은 이들이 일순 움찔했다.
선택의 시간이 왔다.
시선을 돌려 거부를 표할 것인가, 아니면 조 이사와 시선을 맞출 것인가.
하지만 조 이사는 조금 더 노골적이었다.
“우리는 동료이고, 친구이고, 함께 전장을 누벼온 전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이가 들었습니다. 결국 나 하나의 안위를 챙기며 편히 살고 싶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게 현명하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오. 평생 청춘일 수는 없지요.”
“그러니 그런 이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우리는 전우였습니다. 그 길이 달라졌다고 해서 전우의 등에 칼을 꽂지는 맙시다. 그건 어쩌면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 될 테니까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조 이사는 교묘하게 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들은 서로 싸우기도 지독하게 싸워온 이들이다. 방진훈이 이중걸에 대항하기 이전에도 서로 계파를 나눠서 암살까지 시도한 이들이다.
그들에게 대항마를 만들고 전우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고 있었다. 매우 교묘한 수작이지만, 지금 그것을 눈치채는 이는 없었다.
설사 알더라도 지금 이 흐름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들에게 전혀 좋을 게 없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조 이사가 손을 뻗어 술 주전자를 잡았다. 뚜껑을 연 조 이사가 손끝에 상처를 내 피 한 방울을 주전자 안으로 흘려 넣었다.
“들을 각오가 되어 있는 분만 들읍시다. 듣지 않겠다면 지금 일어나시면 됩니다. 나 조화평의 이름을 걸고 지금 나가시는 분들에게 어떤 불이익도 가지 않겠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분들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고 싶으면 제게 말씀하십시오.”
조 이사가 으르렁대듯 말했다.
피를 흘려 넣은 조 이사가 술 주전자를 옆으로 건넸다. 술 주전자를 받은 이가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신 역시 손끝에 상처를 내어 피를 흘려 넣었다.
그렇게 천천히 술 주전자가 돌아 마침내 이중걸의 앞에 당도했다.
‘나간 사람은 없군.’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인간이란 분위기에 휩쓸리기 마련이니까. 지금은 눈치가 보여 일어나지 못한 이도 이런 의식을 치르고 나면 자신의 의지로 참여했다고 스스로 기억을 보완해 버린다.
자기합리화란 그런 것이니까.
이중걸은 붉게 물든 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올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는 이들과 다른가?
사람은 시류에 휩쓸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분명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곧 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해 버린다. 결과가 좋을 테니 괜찮다고 말이다.
스스로가 실수한 부분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반성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그럼 이중걸은 어떤가.
지금 실수를 하고 있는가?
‘아니.’
이중걸이 손끝에 상처를 내 피를 흘려 넣었다.
또옥, 또옥…….
피가 술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자, 그럼 이 술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 이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자신의 술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마셔 비우고는 이중걸을 향해 다가왔다.
그 앞에 공손히 앉은 조 이사가 술잔을 내밀었다.
“한 잔 주시겠습니까?”
“……내가 가도 되는 것을.”
“그럴 수는 없지요, 회주님.”
조 이사가 부드럽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섬뜩하게 웃었다.
“모든 것은 체계가 잡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제 술잔에 술을 따라 주시겠습니까?”
이 무거운 짐을 네가 과연 질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
이중걸은 가볍게 웃는 것으로 조 이사의 도발을 받아넘겼다.
“오랜만에 내가 술 한잔 따라 줌세.”
“감사합니다.”
쪼르르륵.
술잔에 술이 차올랐다. 술이 모두 채워지자 조 이사가 술 주전자를 받아 들고는 이중걸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런 후, 두 사람은 말없이 술잔에 가득 찬 술을 쭈욱 들이켰다.
“다시 한 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하네.”
조 이사가 물러나자 알아서 한 사람씩 이중걸의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든 순배가 돌자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좋은 눈이로군.’
이중걸이 미소를 지었다.
수많은 잡음과 문제가 있음에도 조직에서 여러 행사들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스스로가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자신이 소속감을 느끼는 곳에서 벌어지는 행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고취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이제는 모두가 한 배를 탔다고 생각하겠소. 배가 난파되면 같이 죽는 겁니다.”
“살 만큼 살았습니다. 죽을 때 웃으면서 죽을 수 있다면, 그것도 호상이지요. 언감생심 호상을 바랐겠습니까. 이런 기회가 있다는 게 감사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중걸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겉치레는 집어치웁시다. 모두가 하나라고 생각하고 말씀드리겠소. 나는 강진호를 지금까지 지켜봐 왔소. 내가 강진호에게 굴복한 것은 그가 강했기 때문이오. 그렇기에 오히려 지척에서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했지. 어찌하면 그를 잡을 수 있을지를 말이오.”
“…….”
“손녀에게조차 본심을 숨기며 때를 기다렸소이다. 이제는 그 결과를 볼 때지. 모두 내 말을 잘 들어주길 바라겠소이다.”
살짝 혈기가 들끓는 눈빛들을 보며 이중걸은 속으로 웃었다.
‘자, 나를 위해 죽어라.’
노련한 여우는 결코 길들일 수 없는 법이다.
“수고했다.”
“아닙니다, 회주님.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이었지요.”
“그래도 수고한 건 수고한 거지. 내 잊지 않으마.”
“감사합니다.”
조 이사가 황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 이중걸 앞에서도 당당하던 그 모습은 어디에 갔는지, 그의 숙여진 고개는 좀체 올라올 줄을 몰랐다.
“적당하게 바람을 잡아줬어.”
“꼭 연기는 아니었으니까요. 저 역시 이 상황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 와중에 회주님께서 저를 불러주시니,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좋은 사람과 함께할 수 있으면 내 천 리 길을 마다하겠는가. 자네가 함께해 줘서 다행이야.”
“예, 회주님.”
서로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할지는 몰라도 겉으로 드러난 그들의 모습은 주군과 신하의 그것이었다.
“그런데…….”
조 이사는 비어버린 실내를 바라보았다.
차후에 한 번의 회합을 더 하자는 결론을 내리고 모두가 집으로 돌아갔다.
“왜 굳이 회합을 한 번 더?”
“그물에 물고기가 걸리면 어찌하는 줄 아는가?”
“……건져야 하지 않습니까?”
“바로 건지면 물고기는 빠져나가네. 그물에 물고기가 걸리면 우선을 내버려 둬야 하지. 그럼 자기가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에는 그물에 완전히 엉켜 버리고 말거든.”
“아!”
“이 시간이 그물인 게야. 설명해 준다고 해놓고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네. 결국 저들이 배신할 마음을 먹는다고 해도 딱히 전할 말이 없지. 그럼 기다려야지, 다음 회합까지. 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곳에 동조하여 간을 보다가 그쪽으로 달려갔다는 눈초리를 피하기 힘들어지네. 저쪽에서 얻어먹을 것이 없어지면 결국 여기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없겠지.”
“……역시.”
조 이사가 감탄했다는 눈으로 이중걸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총회를 수십 년간 이끌어온 범이다.
아무리 굴속에 가두어두었다고 한들 범이 개가 되기야 하겠는가.
“결국은 자신이 ‘이쪽이다’를 확실하게 느끼고 오면, 그때는 내가 무슨 수를 꺼내더라도 이쪽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없지. 그럼 그 때가 용을 사냥할 시간이다.”
“가능하겠습니까?”
조 이사의 눈에는 일말의 불안함이 어려 있었다.
“걱정할 것 없네. 나도 머리가 없는 건 아닐세. 강진호가 심계가 깊다고는 하나, 나 역시 만만치는 않네. 그런 내가 확신을 가지고 하는 일이네.”
“믿습니다.”
“그리고…….”
이중걸이 비릿하게 웃었다.
“아까 자네의 말은 인상 깊었네. 독이 파고들면 상처 부위를 도려내야 한다고?”
“예.”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지.”
조 이사가 의문 어린 눈으로 이중걸을 바라보았다.
다른 방법?
“이독제독. 독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더 쓴 독을 삼켜야 하는 법이지. 설사 그로 인해 죽더라도 말이야.”
말끝에 어린 이중걸의 섬뜩한 표정을 보며 조 이사는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강진호.
그는 강하다.
하지만 그는 알게 될 것이다. 세상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다.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물론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겠지만 말이다.
“느긋하게 가보세. 그리 급할 것 없으니까 말일세.”
이중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