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562
#561.
회의하다 (1)
“강진호 씨.”
이현수가 조금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낮다고 해서 그의 가슴까지 차분한 것은 아니었다. 강진호의 말을 듣는 순간부터 그의 가슴은 마치 오랜 시간 만에 첫사랑을 다시 만난 것처럼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나마 차분한 기색을 보여야 한다. 그마저 흥분한 기색을 보이게 되면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라 버릴까 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강진호가 가만히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그저 차분하기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눈빛에 짓눌린 이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약합니다.”
가장 하고 싶지 않은 말.
하지만 해야만 하는 말이었다.
“물론 그저 나약한 것만은 아닙니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총회는 최근 몇 달간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영남회와의 신경전과 국지전에 지속적으로 소모되던 인력을 내부로 돌릴 수 있었고, 영남회를 큰 부작용 없이 흡수하여 명령 체계의 일원화를 이루어냈습니다. 그저 총회의 개념이 아니라 대한민국 무인계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건국 이래 이만큼이나 강한 힘을 보유한 적은 없을 겁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따지자면 지금보다 무인계가 융성하던 적은 있었다. 하지만 각기 파벌로 나뉘어 있던 한국의 무인계가 지금처럼 일통되어 한목소리를 낸 적은 없었다.
그리 따져 본다면, 지금은 대한민국 무인계의 최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지금의 총회가 역사상 가장 강하다고 해서 주변국들과 상대가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가 힘을 기르려 하는 것을 주변국들이 그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겁니다. 그들에게 위협이 되려 하면 씨를 말리려 들겠죠.”
통역을 받은 위긴스가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미스터 리, 이대로 힘을 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이곳을 중립국으로 내버려 두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균형 외교를 하려던 이들의 종말은 언제나 동일했죠.”
“물론 그 부분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극단적인 움직임은…….”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지금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바토르가 입을 열었다.
“큰 착각을 하고 있군. 이 일에 관해서는 주인의 말이 절대적으로 옳다.”
“……어째서입니까?”
“그들은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지.”
바토르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전국시대는 숨을 죽인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국가의 경계를 허물고 봐라. 동아시아는 지금 수많은 군벌이 난립하는 전국시대다. 그런 곳에서 양손을 내리고 고개를 돌리고 있는다 해서 달라질 게 있을 것 같은가?”
“바토르 님.”
이현수가 한숨을 쉬었다.
“전국시대라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하는 게 있으시군요. 우리가 역사로 배우는 전국시대는 짧은 한 페이지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수백 년에 걸친 분란의 역사입니다.”
“흐음?”
“숨을 죽인다면 최소 몇 십 년간의 시간은 벌 수 있다는 거죠. 아무리 시대가 빨라졌다고 한들 말입니다.”
“흐하하하하하핫!”
바토르가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터져 나온 바토르의 웃음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 웃음에 담긴 것은 명백한 비웃음과 경멸이었다.
“주인이 몸담고 있는 곳이라 얼마나 대단한 곳인가 했는데, 이제 보니 헛똑똑이들이 제 잘났다고 나대는 곳이었군.”
“바토르.”
강진호가 살짝 굳은 목소리로 부르자, 바토르가 즉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무례하지 마라. 존중하라.”
“예, 주인이여.”
바토르가 강진호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다른 점을 고려하지 못한 것은 내가 아니라 그대다.”
“……어째서입니까?”
“역사 속의 전국시대는 나라와 나라의 싸움이다. 왕국과 계파의 차이를 모르는군.”
이현수의 눈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왕국이란 결국 혈통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내 시대에 끝내지 않아도 나의 아들이, 나의 후계가 나의 목표를 대신 이루어주지. 하지만 지금 너희가 상대하고 있는 이들은 혈연으로 이어지는 곳이 아니다. 내 대에서 끝내지 못한다면 결국 끝나 버리는 것이지.”
이현수의 미간이 좁아졌다.
“홍왕도, 다른 왕들도 나이가 들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수명이 다하기 전에 천하를 일통하려 할 것이다. 그 싸움은 이제 머지않았어.”
“으음…….”
이현수가 그건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이 침음을 삼켰다.
“그 와중에 방해가 되는 곳은 어떻게든 정리하려 하겠지. 그 정리가 어떤 방식이든 말이야. 결국 주인의 의견이 옳다. 다가올 거대한 전쟁에 맞추어 힘을 키우지 못한다면, 결국 이곳은 전쟁에 휘말려 끝장이 날 것이다.”
“저 역시 동의합니다.”
나이트 위긴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원탁에 있으면서 수많은 분쟁 지역들을 봐왔습니다. 모든 상황이 저마다 달라서 확실히 이 길이 맞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는 괜찮겠지’라는 식으로 안일하게 대처한 이들은 모두 그 대가를 치렀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현수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강경책으로 나가는 것은 멸망을 앞당길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의 기대치가 다르지 않습니까.”
이현수는 몇 번이고 입을 열려고 하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어 버렸다.
이들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건 게임이 아니라고.’
이게 게임이라면 실패하는 순간 다시 시작하면 된다. 하지만 이건 게임이 아니다. 실패하는 순간 모두가 죽는다. 그렇다면 리스크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 이현수의 생각이었다.
“자극하지 않고…….”
그때, 강진호가 이현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상대를 자극하지 않고 강해질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하지. 그래서 그 방법은?”
“…….”
이현수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적당히 둘러댈 수 있는 방법은 수십 가지가 있지만, 그중 정말 이현수가 완벽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이 없던 것이다.
강진호는 그런 이현수를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완벽한 방법을 알아내는 건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
이현수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하지만 완벽한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건 최악의 수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게 그가 리더가 될 수 없는 이유, 보좌로 남아야 하는 이유였다.
세상에 완벽한 시나리오는 존재하지 않는다. 때로는 눈을 질끈 감고 빤히 보이는 리스크를 외면하며 달려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이 시기와 방법을 정하는 것을 결단력이라 한다. 이현수에게는 결단력이 부족했다.
“더 나은 방법이 나오면 말하도록. 그럼 언제라도 멈추고 제안한 방법을 따라갈 테니까. 하지만 그전에는 내 방식을 따라주면 좋겠는데?”
이현수가 한숨을 쉬었다.
강진호가 그저 닥치고 따라오라고 해도 따라가야 하는 게 이현수의 입장이다. 그런데 강진호가 저리 정중하게 나와주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따르겠습니다. 다만, 강진호 씨가 말씀하신 대로 저는 이 상황을 멈출 방법을 찾을 겁니다.”
“이쪽에도 최선을 다해준다면, 그게 더 좋겠지.”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이현수는 속이 탄다는 듯 물을 쭉 들이켰다.
‘내가 지나치게 현실주의적인가.’
꿈을 논하는 자리에 현실을 밀어 넣는 것처럼 황망한 짓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현실을 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꿈을 꾸다 죽는 것은 사양이다. 인간은 언제나 대지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니까.
“목적은 확고합니다.”
강진호가 입을 열었다.
“주변국들이 실질적으로 위협을 가해오는 이상, 그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저 혼자 할 수 있었다면 저 혼자 했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개인의 강함이라는 것은 결국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이미 한 번 겪었다.
그것도 처절하게.
그가 아무리 천하제일인이었다 한들 정사마의 고수들의 합공 앞에서는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전쟁이란 그런 거지.’
하지만 억울할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더 강한 이라면 당연히 합공을 해서라도 쓰러뜨려야 한다. 상대가 나보다 강한데 순순히 일대일로 붙어서 져줘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패하고 나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나서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니 강해져야 한다.
그뿐 아니라 모두가. 그 누구도 그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말이다.
“강해져야 한다는 목표는 명확하고, 그 방법에 대한 고민도 있습니다. 하지만…….”
강진호가 고개를 돌려 모두를 선명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도 그의 시선을 외면하지 않았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죠. 이제는 저도 압니다. 제가 모든 것을 할 수 없고, 제가 하는 것보다 다른 이가 했을 때 더 나은 일도 많다는 것을. 그러니 힘을 빌려주십시오. 같이 나아가고 싶습니다.”
방진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 이거였지.’
이곳에서 가장 강진호에게 불만이 있어야 하는 사람은 사실 이현수가 아니라 방진훈이다.
아무리 방진훈이 강진호의 도움으로 총회의 회주 자리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방진훈은 허수아비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주도적인 결정권은 이미 강진호에게 넘어가 있고, 그 결정에 대한 영향력은 오히려 이현수가 더 강했다. 누가 이런 상황에서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방진훈은 놀랄 만큼 불만을 갖지 않고 있었다.
스스로도 그 이유가 궁금했는데, 이 순간 그 이유가 확실해졌다.
강진호는 홀로 걷지 않는다.
무인이란 그런 존재다.
강한 자는 자신이 우월하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타인의 말보다는 자신의 결정을 더 신뢰한다.
이중걸도 그랬고, 김석일도 그랬다. 그리고 방진훈조차 자신의 계파 내에서는 독재자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강진호의 결정적인 다른 점이 그것이었다.
저 사람은 이전의 지도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면서도 스스로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스스럼없이 손을 내민다.
때로는 고집을 부릴 때도 있지만, 그 와중에도 귀를 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함께 걷고 있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곳은 강진호의 왕국이 아니다. 그들이 함께 이끌어 나가는 공동체였다.
“그럼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방진훈이 웃으며 말하자, 강진호도 미소로 방진훈을 반겼다.
“얼마든지요.”
“일단 다른 건 모르겠고…….”
방진훈이 미소를 지우지 않고 말했다.
“제 회주 자리는 일단 보장을 좀 해주시죠. 요즘 갈수록 저보다 센 사람들이 영입되고 있어서 제가 좀 불안하거든요.”
“…….”
공동체고 개뿔이고 일단 실리부터 찾고 보는 방진훈에게 강진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