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565
#564.
회의하다 (4)
[쉰다고 하지 않았어요?]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강진호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구요.”
[강진호 씨 마음이지, 왜 그게 마음대로 안 돼요? 쉰다면 누가 뭐라고 해요?]“그건 아니지만…….”
강진호는 할 말이 궁해지는 것을 느꼈다.
[거참,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네.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면 휴식을 해야죠. 쉴 수 있을 때 쉬지 못하면, 일해야 할 때 제대로 일할 수 없다는 것 모르세요?]“알죠.”
전화라는 게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지금 입가에 떠오른 쓴웃음으로 분명 또 트집을 잡혔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 것 같네요.”
[아뇨. 제가 보기에는 지금이 그때 같은데요.]“……그런가요?”
본인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최연하는 조금도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제가 처음 만났을 때 강진호 씨는 백수나 다름없었어요. 일도 안 하는 한량이었죠.]“그렇게까지는…….”
[맞잖아요. 그 피자집인가 뭔가를 연 것도 조금 뒤였으니까.]“그랬나 보죠.”
그럼 백수 맞지.
하지만 이건 좀 억울한 일이었다. 군대에서 전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으니까. 그때 백수가 아닌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내가 봐도 너무 바빠 보여요. 대체 뭐가 그리 할 일이 많아요?]강진호는 다시 한 번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명명백백하게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밝힐 수 있을 리 없다. 그건 최연하는 이 세계로 끌어들이는 결과가 되어버릴 테니까.
이미 최연하는 한 번 고초를 겪었다. 이 세계에 어설프게 얽혀든 대가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 일에 대한 미안함이 아직 강진호의 가슴에 바늘처럼 박혀 있는데, 또다시 그런 일을 벌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네요. 왜 바쁜지 모르겠는데, 시간이 잘 안 나네요.”
[안 돼요.]“네?”
휴대폰 너머로 최연하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은 휴식을 가져야 하는 법이에요. 강진호 씨라고 예외가 있을 리가 없어요.]“음…….”
[버틸 수 있는 한계가 크다는 건 그만큼 많은 피로가 쌓인다는 뜻이에요. 터질 때 더 크게 터지겠죠. 저는 그 꼴은 못 봐요.]강진호의 얼굴에 살짝 의혹이 어렸다.
‘뭔가 평소와 다른데?’
평소의 최연하라면 ‘당신은 지금 그냥 잘못되었으니까, 그냥 내 말을 그대로 들으면 된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상대의 잘못된 점을 제대로 지적하고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은 전혀 최연하스럽지 않은 일이었다.
[저도 이번에 멘탈이 나갈 뻔했거든요.]“무슨 일 있었어요?”
[열심히 해보자고 스스로 너무 재촉한 게 문제였나 봐요. 몸이 안 받쳐 주는데 열심히만 하다 보니, 결국 컨디션이 무너져서 앓아누웠어요. 하루만 회복이 늦었어도 전체 촬영 스케줄이 박살이 났을 거예요. 강진호 씨라고 이런 일이 없다고 장담하실 수 있어요?]“으음…….”
[평소에 무리를 하다 보면 강진호 씨가 가장 필요한 순간에 제대로 활약할 수 없게 될 거예요. 그런 걸 바라시는 건 아니죠?]“물론입니다.”
그건 강진호가 가장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결국은 재충전이 필요한데, 재충전을 해야 할 때마다 주변에서 자꾸 일이 터져서 문제가 생긴다는 거잖아요. 결국 강진호 씨가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확실히…….”
듣고 보니 그런 경향이 있었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다. 그 피부 관리숍이 강진호에게 정말 휴식을 주었는가는 둘째 문제다. 거기까지 쉬러 갔는데, 그곳까지 바토르가 쳐들어오니 뭘 어쩌겠는가.
일을 할 수밖에.
[그럼 결론은 간단하네요. 주변의 개입을 받지 않는 완벽한 휴가가 필요한 거잖아요. 그럼 그렇게 하면 되죠.]“그게 쉽지 않으니까요.”
“……예?”
[마침 제가 좋은 곳을 알아요. 좀 덥지만 강진호 씨는 더위를 잘 안 타고, 좀 습하기는 한데 역시나 강진호 씨는 괜찮겠죠. 그 두 가지를 빼면 나름 괜찮은 곳이에요. 경치도 나쁘지 않고, 음식이 좀 짜증 나게 맵기는 하지만 강진호 씨는 역시나…….]“사천?”
[정확해요.]강진호는 웃고 말았다.
지금 최연하가 가 있는 곳이 사천이다. 최연하는 강진호에게 자신이 있는 사천으로 놀러 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네요.”
[그렇다니까요. 사천으로 와요. 제가 와 있어보니 좋더라구요.]“분명 전에 전화했을 때는 지옥 같다고 한 것 같은데?”
[제가요? 에이, 설마요. 저는 그런 적 없어요. 여기 좋다니까.]수화기 건너편에서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진호는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재미있다니까.’
이상하게 요즘은 조금 피곤하다 싶으면 전화기부터 잡게 된다. 최연하의 천진난만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다.
그리고 뭐랄까…….
“그럴 거면 차라리 남국으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휴양지가 나을 것 같은데? 중국보다는?”
[무, 물론 그럴 수 있죠. 하지만 그런 데는 가서 할 게 없잖아요.]“뭘 안 하려고 가는 건데…….”
[그렇긴 하죠. 그런데 그게…… 에이, 저도 그런 데 여러 번 가 봤는데, 별로 재미가 없더라구요. 여기가 훨씬 나아요.]예전에는 없던, 살짝 놀리는 맛이 있다고나 할까?
강진호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알았어요. 시간 내서 한 번 들를게요.”
[정말이죠?]“내가 딱히 거짓말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그렇지만요.]최연하의 목소리에서 살짝 들뜬 기색이 느껴졌다. 그 목소리를 듣자 강진호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언제 와요?]“시간 만들어 봐야죠.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아요. 그러다가 내가 촬영 끝내는 게 더 빠르겠어요. 그럼 진짜 머리채 잡을 거예요.]강진호가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빨리 잡아볼게요.”
[이 남자, 믿어야 할지 모르겠네.]“도착했어요. 그럼 다음에 전화할게요.”
[네. 저녁에 전화 좀 해줘요. 저 심심해요.]“보구요.”
[매정한 양반.]강진호가 전화를 끊고 차를 몰았다. 이제는 강진호의 차량을 알아보는 이들이 자연스레 주차장으로 그의 차를 들여보내 주었다.
적당한 곳에 차를 주차한 강진호가 지하 주차장을 걸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으로 오른다.
문이 열리고 안쪽으로 걸어 들어간 강진호가 이제는 낯이 익은 이들의 인사를 받고는 안쪽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낯빛이 거무죽죽한 한 남자가 그를 반겼다.
“오셨어요?”
“…….”
강진호는 다크 서클이 턱까지 내려와 있는 조규민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전쟁이라도 났나요?”
“전쟁이 낫죠, 차라리. 그럼 총 들고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니까요.”
조규민이 한숨을 쉬며 앞쪽 소파를 가리켰다.
“앉으시죠.”
“예.”
소파에 앉자 조규민이 물어보지도 않고 커피 머신에서 커피를 내렸다.
“아이스로?”
“네.”
커피에 얼음을 채운 조규민이 자신의 앞과 강진호의 앞에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생각 이상으로 복잡합니다.”
“그래요?”
“네. 그냥 단순히 재단을 만드는 일이라면 별로 어려울 게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되어버리면 별로 의미가 없죠. 나름 국가 지원도 받아야 해서.”
“국가 지원요?”
“네.”
강진호가 눈을 찌푸렸다.
“그걸 굳이 받아야 하나요?”
“네. 필요합니다.”
조규민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굳이 그런 것 없이 이쪽 자본만으로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물론 그 방법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국가의 재정이 들어온다는 것은 국가의 승인을 받은 재단이라는 뜻이고, 그러면 여러 법률적인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그게 아닌 사설 재단은 결국 이런저런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죠.”
강진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법률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다 보니 조규민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예를 들어 보육원을 하나 세운다고 해도 법률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많습니다. 새로운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것에도 여러 승인이 필요하죠. 결국 나중에는 국가 인증을 받아야 하고, 국가 인증을 받으면 필연적으로 세금이 지원됩니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과정이라는 거죠.”
“음, 그러네요.”
강진호가 볼을 긁었다.
그가 원한 것은 이런 게 아니지만, 필연적인 일이라면 감안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편히 일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이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이니까.
“그것 때문에 좀 지체되고 있습니다.”
“지체랄 게 있나요?”
“대한민국 공무원을 얕보지 마십시오. 적당히 서류 밀어놓고 승인 떨어지기를 기다리면 내년에 승인이 날 수도 있습니다.”
“…….”
“단순히 서류만 들어간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심사를 받아야 하는 과정도 있다 보니, 무작정 빨리 해달라고 재촉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죠. 워낙에 짜증이 나서 그냥 뇌물을 먹여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그건 안 됩니다.”
강진호가 단호하게 조규민의 말을 끊었다.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불법을 저지르면 안 되는 거죠.”
“뜻밖이네요. 강진호 씨는 결과론자이신 줄 알았는데 말이죠.”
“그런 경향이 있죠. 하지만 이건 드러난 일이에요. 그리고 깨끗해야 하는 일이죠. 그러니 이 일만큼은 합법적으로 처리를 하고 싶습니다.”
“네.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그러실 것 같더라구요.”
조규민이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이건 제가 아무리 움직여도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방법은 결국 하나밖에 없는데…….”
“방법이요?”
“네. 불법은 좀 그렇지만, 편법은 써도 되겠죠.”
강진호가 의문 어린 눈으로 조규민을 바라보았다. 조규민이 바라는 편법이라는 게 뭔지 궁금했다.
“강진호 씨는 꼭 이사장 자리에 앉지 않으셔도 되잖습니까?”
“그렇죠.”
“그럼 이사장 자리를 회장님께 드리는 건 괜찮습니까?”
“상관없습니다.”
강진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는 이사장이니 뭐니 하는 직함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전에 말씀하셨던 대로 회장님을 설득해 주십시오. 그럼 일사천리로 일이 처리될 겁니다.”
“회장님을 이사장 자리에 앉히는 것만으로 그게 됩니까?”
“물론이죠. 회장님이 복지 재단 이사장이 된다면 언론 쪽에서도 주목을 할 것이고, 국민적인 관심이 모이게 됩니다. 그 와중에 심사가 지체되고 있어서 아직 재단을 시작하지 못한다는 말이 나오면 관계 부처에 폭탄이 떨어지겠죠.”
조규민이 사악하게 웃었다.
“딱히 불법은 아닙니다. 그저 편법이죠. 이 정도는 용인되겠죠?”
강진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즘 그가 느낀 것은 하나였다. 이제는 해야 할 일을 즉각 처리하지 못하면 일에 치여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는 것이 좋았다.
“회장님은 회장실에 계시죠?”
조규민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방긋 웃었다.
“같이 가시죠.”
앞서 걸어가는 강진호를 보며 조규민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욕도 둘이 먹으면 좀 덜할 테니까요.”
의미심장한 한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