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570
#569.
설득하다 (4)
“건배!”
주영기가 힘차게 잔을 들었다.
허공에서 맥주잔이 거칠게 부딪치면서 사방으로 맥주 거품이 튀었다.
“영기야, 살살 좀 하자.”
“뭔 소리야, 인마! 우리 백수가 취직한 날인데.”
“……백수 아니거든?”
“왜 아닌데?”
“어…….”
박유민이 우물거렸다. 생각해 보면 그는 백수가 맞다. 그것도 게임만 주구장창 해 대는 게임 폐인이었다.
“거 봐, 인마.”
“와, 반박할 말이 없네.”
주영기가 맥주를 쭈우욱 들이켰다.
“크으으으으!”
맥주잔을 탁, 소리 나도록 테이블에 내려놓은 주영기가 눈가를 훔쳤다.
“크, 일도 안 하고 놀고먹기만 하던 잉여 친구 놈이 취직을 하다니.”
“그,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 아니었거든? 나 가게에서 일도 했잖아.”
“인마, 그거 그만둔 지가 언젠데, 여태 놀았던 게.”
“…….”
“요즘같이 청년 실업이 사회문제인 세상에서 대학도 졸업 못한 놈이 학교도 안 다니고 놀고 있는데, 내가 오죽 마음을 졸였겠냐. 이 형이 니들 때문에 요즘 잠을 못 잤다, 잠을.”
“가게 장사가 잘 안 돼서 그런 건 아니고?”
“무슨 소리! 우리 가게는 요즘 무적이야. 죽어라고 쭉쭉 뻗어 나가고 있거든? 매출 빵빵하거든?”
“그래그래.”
강진호가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여하튼 축하한다, 유민아.”
“응, 고마워. 다 네 덕이지.”
주영기의 입술이 튀어나왔다.
“그럼 나는 아무것도 안 했다는 거네? 배고프다는 놈 피자 죽어라 먹여놔도 아무 소용이 없네.”
“……아냐. 고마워.”
“됐어, 인마! 엎드려 절 받기지.”
주영기가 소리를 빽! 질렀지만, 얼굴에 뜬 미소는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박유민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모를 주영기가 아니었다. 퇴근하고 집에 가서도 연습을 하던 박유민이다. 그런 박유민이 드디어 인정을 받았다는데, 어찌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면 이제 숙소 들어가는 거야?”
“그래야지.”
“얼굴 잘 못 보겠네?”
“요즘은 그렇지도 않대.”
“응?”
박유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요즘은 자율주의라서 연습 시간만 지키면 나머지 시간에는 뭘 하든 별 상관이 없는 모양이야.”
“음…….”
주영기가 그건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하튼 다행이다.”
“다만, 음…….”
“응?”
박유민이 머리를 긁었다.
“너희 둘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아무리 내가 예전보다는 쉽게 나올 수 있다고 해도…… 그게 말처럼 되는 일이 아니거든?”
“그렇겠지.”
아무래도 눈치가 보이지 않을 수 없다.
특히나 박유민은 입장이 입장이라 그냥 신입처럼 굴 수가 없다. 다른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 감독도 그걸 원할 것이다.
“처음에는 좀 붙어 있어야지. 놀러 가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말인데, 너희가 보육원에 신경을 좀 써줘야겠다.”
“당연하지, 인마.”
“음…….”
강진호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예전에 내가 처음 게이머 생활 한다고 갔을 때는 원장 수녀님이 계셨거든. 그래서 걱정을 안 했는데, 막상 지금 자리를 비우려고 하니 좀 껄끄러워서.”
박유민이 강진호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부탁한다, 진호야.”
“걱정하지 마.”
강진호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네가 너무 걱정이 많은 거야. 애들 다 혼자서도 잘해.”
“그래도…….”
“무슨 말인지 알아.”
강진호는 박유민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보육원의 아이들은 강하다.
부모 없이 자란 아이들이라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는 버릇이 들어 있다. 대체적으로 다 어른스럽다.
하지만 반대로 한없이 나약하기도 하다.
워낙 정에 굶주린 아이들이라 주변에 지켜봐 주는 이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가 컸다. 그동안은 박유민이 무리를 해가며 그들의 주변을 지켰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역할을 강진호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바꿔야지.”
“응?”
강진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돼. 바꿔야 돼.”
“……바꾼다고?”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그렇고, 원장 수녀님도 그렇고…… 아이들을 위해서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 그건 나쁜 게 아니지. 하지만 넓게 보면 그건 문제야.”
“…….”
“어떤 사람이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끌고 가는 건 바람직하지 못해. 나눠 져야지. 그리고 누군가 희생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불편하지 않게 만들어야지. 마침 시작해야 할 시기야.”
“솔직히 난 좀 걱정 된다, 진호야. 일이 너무 커지는 것 같아서.”
“걱정할 것 없어. 지금까지 하던 걸 조금 더 크게 하는 것뿐이니까.”
박유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업이 두 배로 커지게 되면 할 일이 두 배로 느는 것이 아니다. 사업이 두 배로 커지게 되면 할 일은 제곱으로 늘어난다. 강진호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언제쯤 들어가려고?”
“한 일주일 있다가 바로 들어가야지.”
“그렇게나 오래?”
“……좀 봐주라. 합숙 들어가는 건데.”
강진호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으로 박유민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찔끔하여 박유민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가서는 열심히 해.”
“걱정하지 마.”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그래, 걱정할 필요 없겠지. 박유민이라면 당연히 알아서 할 것이다.
“자, 일단 건배하자.”
주영기가 다시 잔을 들었다.
“뭘 그리 급하게 먹어?”
“인마, 내가 요즘에 술도 못 먹어. 감시가 얼마나 심한데.”
“감시?”
“그래, 인마. 감시. 내가…… 요즘 술도 제대로 못 먹는다.”
“누가 감시하는데?”
“누구긴 누구야.”
주영기가 시무룩해졌다.
박유민이 알 만하다는 듯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수연 씨?”
“……그래.”
“완전 잡혀 사는구나. 그렇게 됐네.”
“에이 씨.”
주영기가 맥주를 쭉 들이켰다.
“안 그럴 것 같았는데…….”
“야, 말도 마. 처음에만 착했지, 요즘은 완전 호랑이야, 호랑이. 술 먹으러 간다고 하면 눈에서 불이 나는데…… 와, 한밤중에도 그렇게 환할 수가 없다. 결혼하면 전기세는 줄겠더라. 에어컨도 필요 없고, 형광등도 필요 없어.”
“결혼 이야기까지 하는 걸 보면…… 생각은 있나 보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잘됐다. 너는 좀 잡혀 살 필요가 있어.”
“인마! 사나이가 여자한테 잡혀 사는 게 말이나 되냐?”
“……지금도 잡혀 사는 것 같은데?”
주영기가 시무룩해서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그냥 참는 거야, 지금은. 나중에 내가 다 탈환할 거야.”
“어린놈이 꿈을 꿨구나.”
“씁.”
속이 탄다는 듯 맥주를 들이켜는 주영기를 보며 박유민이 피식 웃었다.
‘참 신기하지.’
얼마 전에 이렇게 셋이 앉아서 술을 마실 때는 그들 모두 할 짓 없는 백수나 다름없었다. 박유민은 프로게이머를 그만두고 보육원에서 소일하는 중이었고, 강진호와 주영기는 갓 전역한 백수들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다들 자신의 일을 하는 중이다.
그 변화가 조금은 아쉽기도 하고, 좋기도 했다.
“그럼 한동안은 같이 술 먹을 일도 없겠네.”
“그렇지.”
“그건 좀 아쉬운데.”
주영기가 입맛을 다시자, 강진호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보고 싶으면 경기장 가면 돼.”
“인마, 내가 거기 가서 그거 보고 있을 시간이 어딨냐? 가게에서 일해야지!”
“……요즘 느끼는 건데, 너 이상하게 성실해졌다? 군대에서는 안 그러더니.”
“군대에서 돈 주냐?”
주영기가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현대사회라는 건 일한 만큼 돈을 받는 거야. 그런데 군대에서는 돈을 안 주잖아. 그러니까 열심히 안 하는 거지. 지금은 내가 일한 만큼 돈이 나오는데 어떻게 열심히 일을 안 해? 죽어라고 해야지. 말했잖아, 나는 부자 될 거라고.”
박유민이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진호는 놀고먹으면서 부자 되고?”
“……아, 하지 마. 나 지금 진짜 속이 쓰렸어.”
주영기의 너스레에 박유민이 웃음을 터뜨렸다.
강진호도 빙그레 웃었다.
이렇게 기분 좋은 술자리도 오랜만인 것 같았다.
“우승해야지.”
“……아니. 나 후보거든?”
“후보도 우승할 수 있어.”
“현실적으로 이야기 좀 해줄래?”
“현실적이야, 현실적.”
박유민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이놈들은 도무지 말이 통하지를 않는다.
“시작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시작했으면 최고가 되어야지.”
“음…….”
하지만 저 강단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예전에도 그랬지.’
적당히 프로게이머가 된 것으로 목표를 이뤘다 생각하던 박유민을 몰아붙인 것은 강진호였다.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한다는 저 성격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이다.
“이건 팀 게임이라 나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게 아냐. 열심히는 하겠지만, 한계가 있을 거야.”
“그럼 팀을 키워.”
“……그게 마음대로 돼?”
“왜 안 돼!”
주영기가 입에서 불을 뿜을 기세로 소리쳤다.
“인마, 걔들도 프로게이머 아냐! 내가 바닥부터 시작해서 지금 하는 피자집을 국내 최고의 프렌차이즈로 만드는 것과 네가 프로게이머들 데리고 키워서 우승하는 것 중에 뭐가 더 어려울 것 같냐?”
“네가 더 어렵겠지.”
“당연하지! 그런데 나는 하잖아! 나는!”
“……저기, 주영기 씨. 지금 주영기 씨 가게는 하나뿐이거든요? 시작도 못하셨거든요?”
“땡! 틀렸지롱. 이번에 2호점 오픈하지롱.”
“헐? 진짜?”
주영기가 씨익 웃었다.
“저번에는 계획만 있었는데, 이번에 정말 계약 들어갔다. 가게 임대했어.”
“와, 진짜 빠르네?”
“내가 말했지. 나는 대한민국 최고의 피자 가게 사장이 될 거다.”
“돈은 진호가 벌고?”
“하지 말라고! 하지 마!”
박유민이 피식 웃었다.
‘다들 나아가는구나.’
주영기도, 강진호도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고 있었다. 친구로서 그도 질 수 없는 일이다.
“알았어. 우승 한 번 해볼게.”
“약속했다.”
“대신 못했다고 때리지만 마.”
“술통에 담가 버릴 거다.”
박유민은 이놈들은 정말 그럴 수 있다는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살려줘라, 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참 동안 그렇게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어느새 새벽이 되었다.
“아, 씨…….”
주영기의 휴대폰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나,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박유민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나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너 혹시 수연 씨랑?”
“아냐, 인마! 아직 제대로 뭐 해보지도 못했어. 오해하지 마. 얘 성격이 유별나서 집에 늦게 간다 싶으면 난리를 쳐서 그런 거야. 동거 안 해.”
“음…….”
박유민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주영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주영기는 정말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뭐 그리 창피한 일이라고 그런 거 숨기겠냐. 아니라니까.”
“하긴.”
“여하튼 나는 들어가 봐야 할 거 같다. 내가 계산할게.”
“됐어, 인마.”
“어허! 그지 새끼들이 어디! 내가 사장이야, 인마! 사장!”
“……저 미친놈.”
주영기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기어코 카운터로 가 계산을 했다. 강진호와 박유민은 그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완전 잡혀 사는 것 같은데?”
“……우리 아버지 같아.”
강진호의 말에 박유민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언젠가 저 모습이 그의 미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새삼 서글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