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577
#576.
조여오다 (1)
“손녀분이 혈기가 넘치는 것 같습니다.”
“후우…….”
방 안으로 들어오는 이를 보며 이중걸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게나 말일세.”
“아무리 회주님이라도 혈육의 정을 떼어낼 수는 없는 법이죠.”
미묘한 도발이었다.
결국 너도 혈육 앞에 흔들리는 사람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중걸은 이런 도발을 꽤나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다. 안정된 세상에서는 충견이 필요하지만, 이런 난세에서는 독이 바짝 오른 늑대가 더 도움이 되기도 하니까.
“걱정할 것 없네. 혈육 앞에 흔들릴 내가 아니니까.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조 이사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이중걸은 혈육 같은 것을 신경 쓰는 이가 아니었다. 그의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그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괜한 말씀을 드렸군요.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없네. 예전의 나였다면 지금의 자네가 매우 고까웠겠지만, 내가 몰락한 건 그런 말을 고깝게 들었기 때문이라는 걸 이제는 알거든. 그러니 달게 들어야지. 달콤하게 말이야.”
이중걸은 이제 안다.
어떤 음식으로 식사를 하느냐가 그 식사의 가치를 매겨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최고의 식사는 쓰러뜨린 적의 시체를 보며 먹는 식사였다.
흙투성이의 주먹밥 한 덩어리라고 해도 천상의 맛처럼 느껴지겠지.
“반응은 어떤가?”
“기울었습니다.”
“흠…….”
이중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 시간을 준 게 정답 같습니다. 대부분은 이쪽으로 동조하더군요. 개중 조금 움직임이 선명하지 못한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감시를 붙여뒀으니 별일은 없을 겁니다.”
“동료애는 중요하지.”
이중걸이 손을 뻗어 유리를 살짝 두드렸다.
“결속이라는 것은 유리 같은 것이지. 힘을 주면 너무도 쉽게 깨어지지만, 막상 깨려고 하면 의외로 단단한 것. 적당히 프레셔를 조절하여 깨지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는 법.”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그 외에는?”
조 이사가 살짝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흠?”
“……아무래도 보고를 드리고 움직이기에는 애매한 면이 있어서 제가 먼저 영남회의 장로들과 접촉을 해보았습니다.”
이중걸의 눈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그러자 조 이사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좋은 일이지. 하지만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은 그 책임도 가져간다는 것을 알고 한 일이겠지?”
“……물론입니다.”
“좋네, 좋아. 조 이사, 자네나 나나 이제 예전 같지는 않지. 내가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아야 하고, 자네도 예전처럼 명만 들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좋은 변화지. 다만…….”
이중걸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조심하게. 조심해야 해. 우리는 지금 움직임 하나하나를 조심해야 하는 처지네. 자네의 실수 때문에 계획이 어그러진다면, 나는 자네를 용서하지 못할 것 같군.”
조 이사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담담하다.
하지만 담담하기에 더 두려웠다.
강진호?
물론 그는 무섭다.
하지만 그가 무서운 건 그가 강하기 때문이다. 장로들이 그 강한 강진호를 두고 왜 이중걸을 따르겠는가.
그저 예전의 영광을 되찾고 싶어서?
천만에.
모두 아는 것이다.
이중걸이 얼마나 집요한 자인지.
그 집요한 자가 뒤에 숨어 계획을 세운다면, 그 계획이 얼마나 철저할지 말이다.
“그래서 반응은?”
“긍정적입니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지. 차라리 잘된 일이야. 하지만 비밀 엄수가 잘되는지는 꾸준히 감시해야 할 것이네.”
“명심하겠습니다.”
이중걸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하나 흘러가는군. 일이란 게 항상 이렇지. 시작할 때는 너무도 더뎌 사람을 답답하게 하지만, 일정한 시점을 넘어버리면 사람이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로 빨라진다니까.”
“버거우십니까?”
“조금은 그렇지. 나도 나이가 있으니까. 하지만 뭐 어쩌겠나.”
이중걸이 턱수염을 매만졌다.
“그 강진호를 상대하는 일인데, 쉬우면 안 되지. 쉽다면 뭔가 잘못되고 있는 거니까. 지금이 딱 적당하지.”
“그 부분에 대해서 다들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문?”
“예.”
조 이사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들 지금의 총회를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있습니다. 하지만…… 회주님께서 저 강진호를 어찌 상대할 것인지에 의문을 가지더군요. 더구나 최근에는 강진호의 주변에 다른 이들마저 들어서지 않았습니까? 그 바토르와 나이트 위긴스라는…….”
이중걸의 얼굴에 냉소가 차올랐다.
“시답잖은 외국 놈들을 다 끌어들이는군.”
“바토르와 나이트 위긴스는 시답잖다고 할 만한 인물들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 한국에 있는 무인 중 그들을 상대할 수 있는 이는 강진호가 유일할 것입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시답잖은 건 마찬가지야.”
이중걸이 조 이사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은 보통 착각을 하곤 하지. 무인계를 지배하는 것은 강한 무인이라고 말이야.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대한민국에 나보다 강한 무인이 없어서 내가 총회를 지배했겠는가?”
“…….”
“모두들 궁금해했지. 나와 김석일이 승부를 가른다면 누가 이길 것인지에 대해서. 멍청한 짓이지. 내가 김석일과 승부를 가를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서로 손에 들고 있는 총을 내려놓고 주먹질을 하는 군인도 있다는가?”
“그런 군인이야 없겠죠.”
“마찬가지야. 결국 마지막에 이기는 것은 조직이지. 나는 그걸 일찍부터 알았기에 내가 수련할 시간을 버려가며 조직을 만들어냈네. 이 많은 무인들 사이에서 강한 무인 한둘이 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것 같은가?”
“하지만…….”
조 이사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 이중걸을 보며 물었다.
“결국 일전에 저희가 방 회주에게 무너진 것은 그 강한 무인 하나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강한 무인 하나 때문이 아니지. 전력의 계산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야. 강진호가 나를 치러 올 수 있다는 사실을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걸세. 그걸 몰랐던 게 내 실착이었지.”
조 이사가 살짝 불안한 눈으로 이중걸을 바라보았다.
이중걸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안다. 하지만 그 강진호를 생각하면 가슴 한쪽이 서늘해져 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모르겠는가?”
“……제가 회주님만 한 머리가 있었다면 회주님의 밑에 있진 않겠죠.”
“그거, 미묘한 말이로군.”
이중걸이 안쪽으로 걸어와 소파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 앉은 이중걸의 모습에서 연륜이 느껴진다.
“변수였단 말이지, 내게 있어서 강진호는. 등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알지 못한 게 실수였지. 하지만 이제는 입장이 반대란 말이지. 나는 이미 강진호에게 한 번 패했네. 그리고 강진호는 자신에게 패한 이가 다시 자신에게 달려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 걸세.”
“……아!”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는 어찌 보면 철저한 승부사지. 그리고 무인이지. 내가 그에게 도전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겠지만, 그 도전의 방식이 다르다고 믿을 사람이야.”
조 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경향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차근차근 뒤를 찌를 준비를 할 수 있는 게지. 그래서 내가 자네에게 자꾸 비밀 엄수를 강조하는 걸세. 여기는 최적의 위치지. 등잔 밑이란 말이야. 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내가 여기서 칼을 갈고 있다는 걸 그가 알 리가 없지.”
“그렇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날카로운 칼을 가는 일이야. 그리고 그를 계속 지켜보는 거지. 그런 후에 틈을 만들어내면 돼. 그다음에는 칼을 잘 찔러 넣는 것만 남은 거지.”
“그럼 그 칼은…….”
이중걸이 피식 웃었다.
“칼이 되고자 하는 이가 너무 많아서 탈이지. 강진호는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적을 만들었어. 그는 자신의 강함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겠지만, 곧 알게 될 걸세. 개인의 강함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 조직이 왜 무서운 것인지 말이야.”
조 이사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알 수 없다.
이렇게까지 들었음에도 그는 이 승부에서 누가 승리할 것인지를 점칠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강진호라는 존재는 가늠되지 않는 미지의 존재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이중걸을 믿고 따르는 일뿐이었다.
“아마 그쪽에서 먼저 움직임이 있을 거야.”
“예?”
“일련의 변화에 대해 동요하는 장로들을 달래려 하겠지. ‘너희의 몫을 빼앗는 것이 아니다’, ‘총회는 변함이 없다’면서 입에 사탕을 물리려 할 거야. 누군가는 그 생각을 하겠지. 그게 아니라면 답이 없는 놈들인 거고. 그리 멍청하지는 않을 테니, 분명 누군가는 움직일 걸세.”
“거기서 납득한 척을 해서 안심시키자는 거군요. ‘우리는 당연히 너희의 편이다’라는 식으로?”
“멍청하긴.”
이중걸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게. 강압적으로 나가.”
“예?”
“드러내 놓고 불만을 논하는 동안에는 별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할 걸세. 우리가 자신들의 예측 안에서 움직인다고 안심하겠지. 그러니 빤하게 움직이란 말일세. 적당히 방진훈에게까지는 소리를 치고, 강진호가 등장하면 숨을 죽이는 척하면 되겠지.”
“……어렵군요.”
“어려울 것 없어. 자연히 그렇게 될 거니까. 아니면 강진호와 드잡이라도 벌여볼 텐가?”
“…….”
말없이 입을 다무는 조 이사를 보며 이중걸이 쓰게 웃었다.
‘이게 현실이지.’
권한을, 권리를, 그리고 총회의 미래를, 자신들의 지위를 되찾고 싶다고 온갖 불만을 늘어놓지만, 막상 그 원흉이 되는 이와는 맞싸울 각오가 없는 이들. 지금 이중걸을 따르는 이들은 딱 그 정도의 수준이었다.
물론 이중걸은 이들을 믿지 않았다.
손에 든 패는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그 패에 모든 것을 거는 건 멍청한 짓이다. 결국 마지막에 믿을 수 있는 이는 자기 자신 하나뿐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는가.
‘물러 터졌어.’
그가 강진호였다면 총회를 장악한 그 순간, 이중걸을 죽였을 것이다. 후환은 남기는 게 아니니까. 그 강진호의 무름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중걸 역시 알고 있다.
두 번의 기회는 없음을.
이번에 실패한다면, 그는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모두 사용해 주지.’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지고, 오물 구덩이에 몸을 던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비겁하다고 욕먹어도 좋고, 저주받아도 좋다. 그가 만들어내야 하는 것은 결과니까.
피와 오물로 얼룩진 승리의 장에서 텁텁한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모두의 손가락질은 차라리 찬사가 될 것이다.
‘자, 이제 시작이다, 강진호. 등 뒤에서 날아오는 칼이 얼마나 무서운지 너도 이제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느꼈던 것처럼.’
노회한 여우가 그 이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움직이려는 자, 이용하려는 자,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까지…….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은 이들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