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579
#578.
조여오다 (3)
“회장님, 이게…….”
황정후 회장의 책상 주변에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어서 와.”
“이게 다 뭡니까?”
“보면 모르나. 서류 아닌가?”
“아니, 무슨 서류를 이렇게…….”
황정후가 피식 웃었다.
“내가 요즘 은퇴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야. 나도 시류를 따라가려고 컴퓨터고 뭐고 열심히 배웠는데, 막상 일을 해야 한다 싶으면 화면에 있는 건 도무지 못 보겠더라고. 그래서 웬만하면 서류를 뽑아서 확인하네.”
“그럼 이게 다…….”
“거,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걸로 시간을 끄는구만. 일단 앉지.”
황정후가 책상에서 일어나 앞쪽의 소파로 나왔다. 황정후가 손을 뻗어 자리를 가리키자 일단 조규민과 강진호도 자리에 앉았다.
‘대단하네.’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해오지 않은 분야에 뛰어든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고령인 황정후에게는 아마도 더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어떻게든 적응할 시기를 가진다든가, 다른 이들에게 웬만큼 일을 맡겨놓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분야를 찾는 식으로 일을 진행할 것이다.
하지만 황정후는 아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저럴 수 없었다. 누가 저런 열정을 보이겠는가.
‘저 열정이 지금의 회장님을 낳았겠지.’
조규민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최근 황정후가 열정을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예전의 황정후처럼 열정을 되찾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얼굴이 좋아 보이십니다.”
“안경점 가봐.”
“예?”
“야, 이놈아. 잠도 제대로 못 자서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구만, 늙은 내 눈에도 보이는 게 네 눈에 안 보이면 안경점에 가봐야지.”
“……죄송합니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요, 회장님.
조규민이 입을 삐죽 내밀고는 고개를 슬쩍 돌렸다.
“저저저…… 저 화상.”
황정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전에는 더없이 믿음직하던 조규민이건만, 나이가 들수록 더 어려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많이 보셨습니까?”
강진호가 입을 열자 황정후가 피식 웃었다.
“많이 봤냐고? 이제 수박 껍질에 혀를 댄 거지. 아직 핥지도 못했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멍청한 소리.”
황정후가 역정을 냈다.
“젊은 패기가 좋은 게 아니야. 그냥 밀어붙인다고 그걸 추진력이라고 하는 줄 알아? 사람이 뭔가를 죽어라고 밀어붙일 때는 반드시 된다는 확신이 있어야 해. 그리고 그 확신이라는 건 이해에서 나오는 거야. 내가 이 일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거기에서 확신이 나오는 거지.”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추진력이라면 황정후’라는 말은 그도 들은 적이 있었다. 젊을 적 별명이 불도우저였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 말로는 불도저겠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앞뒤 따지지 않고 밀어붙이는 걸로 보였겠지만, 황정후의 추진력 뒤에는 이만한 노력이 있던 것이다. 스스로 확신을 갖기 위해서 얼마나 공부하고 노력했을지를 떠올리니 새삼 황정후가 달라 보였다.
“그럼 언제쯤 수박 다 핥는 겁니까?”
“공부는 평생 해야 하는 거야.”
“평생 기다리면 됩니까?”
“그렇기야 하겠나.”
황정후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제 말 안 해도 좀 알아서들 피워. 뭘 새삼 예의 차리고 있어? 맞담배질만 몇 년을 해놓고.”
“……그렇긴 하네요.”
황정후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강진호를 노려보았다.
이 속 늙은 놈이 어린 체를 할 때마다 배알이 살짝씩 뒤틀린다. 속은 자신보다 더 늙은 놈이 말이다.
“형이라고 해줄까?”
“절대 싫습니다.”
“……나쁜 놈.”
혼자만 늙었다는 생각에 황정후가 우울해졌다. 예전처럼 다시 서류를 들기 시작하자 자신이 늙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예전에는 수백 페이지를 쉬지 않고 읽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열 페이지만 넘어가도 눈이 아프고 집중력이 떨어졌다.
근성으로 극복하고 있기는 하지만, 새삼 이 나이에 뭔가를 시작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닫고 있는 황정후였다.
“괜히 맡아 가지고.”
“회장님, 사실 저희가 이렇게까지 바라지는 않았습니다만…….”
황정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세상에 대충이 어딨어! 무슨 일을 하든 대충은 없는 거야. 안 했으면 모를까, 일단 시작을 했으면 바짓가랑이 양말에 쑤셔 넣고 죽어라고 달려야지. 그게 당연한 거 아냐?”
예, 그게 당연하죠.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그걸 못하죠. 그래서 당신이 황정후인 거구요.
“그래서 부르신 이유가?”
“……넌 진짜 애가 정이 없구나. 늙은 놈이 이렇게 한탄을 하는데 위로의 한마디 없이 꼭 그렇게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야겠냐?”
“빨리 회의를 끝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아서요.”
황정후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조규민을 돌아보았다.
“언제부터 이놈 혀가 이렇게 매끄럽게 돌아갔냐?”
“……회장님, 예전의 강진호 씨가 아닙니다. 요즘은 저도 한 번씩 깜짝깜짝 놀라요.”
“사람 냄새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던 놈이 이제는 능글맞기까지 하구나. 좀 익혀보려고 했더니, 너무 익혔네. 탔어, 아주 그냥.”
“품평은 거기까지로 충분합니다.”
강진호가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노구를 이끌고 열심히 했다는 티를 내고 싶은 것은 안다. 하지만 겉치레 같은 칭찬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에라이, 썩을 놈아.”
황정후도 그런 강진호의 기색을 느꼈는지 툴툴거리며 웃어버렸다.
“바랄 놈에게 바라야지.”
“하하…….”
조규민이 어색하게 웃어 상황을 넘기자 황정후가 입을 열었다.
“대충 너희가 하려는 것과,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에 대해 알아봤다. 아직은 제대로 파고들지는 못했겠지만, 대충은 감을 잡았다.”
대충이라…….
조규민이 고개를 슬쩍 돌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류들을 보았다.
책상 위에 탑을 쌓고 있는 서류들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반면, 바닥에 내려놓은 서류 탑들은 정돈되지 않은 듯 삐뚤빼뚤하다.
책상 위에 있는 서류는 아직 보지 않은 것, 그리고 책상 아래에 있는 책들과 서류들은 이미 읽어본 것들이다.
책상 아래에 놓여 있는 서류들이 훨씬 많다. 저 많은 자료들을 다 보았는데 저걸 대충이라 할 수 있을까?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준전문가는 충분히 자신할 수 있을 정도의 자료량이었다.
“먼저 묻자.”
“예.”
“네가 하려는 게 뭐냐?”
강진호가 살짝 고개를 꺾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네가 복지 재단인가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건 알겠다. 그런데 이건 방향성이 너무 없어.”
“음…….”
황정후가 한심하다는 듯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뭘 거창한 거라도 하는 듯이 굴더니, 니가 하는 건 결국 지금 보육원 아이들에게 해주고 있는 걸 좀 더 넓혀보겠다는 것 아니냐?”
“일단은 그런 마음입니다.”
“돈은 어쩌고?”
“돈이요?”
황정후가 책상에 놓인 서류 한 장을 꺼내 강진호에게 내밀었다.
“이게 너희 성심 보육원인가 뭔가 하는 곳에 들어가는 돈이다. 일 년 치가 얼마인지 확인해 봐라.”
서류를 읽은 강진호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많지?”
“……생각보단 괜찮은 것 같습니다만?”
“네 지갑에서 따로 나간 돈은 포함 안 된 거 아니냐.”
“엄청 들어가는군요.”
강진호는 순식간에 납득했다.
그의 지갑에서 나간 돈을 제외한다면, 이건 정말 최소 생활비다. 그런데도 이만한 돈이 들어간다면 보육원을 돈 먹는 하마라고 불러야 한다.
“그 보육원 애들 해봐야 몇이나 되냐? 얼마 안 돼. 그렇지?”
“예.”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네가 일을 추진한다면, 결국 네가 할 수 있는 건 이만한 보육원을 전국에 몇 개 더 설치하는 것밖에는 없다. 그게 네가 원하는 거냐?”
“아닙니다.”
강진호는 서류의 금액을 보고는 눈을 찌푸렸다.
“그런데 이 정도 금액은 제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열 개가 더 생긴다고 해도…….”
“이 멍청한 놈아!”
황정후의 호통에 강진호가 움찔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게 어디 일 년, 이 년 문제냐?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돈을 때려 박으면 열 개가 아니라 스무 개를 만든다고 해도 몇 년은 버티겠지. 그런데 그 돈이 다 떨어지고 나면 어쩔 거냐? 지금까지는 네가 책임을 졌지만, 이제는 돈이 없으니 알아서 각자 도생하라고 할 거냐? 그때 가서 다른 보육원으로 애들을 보낼 거냐?”
“……그러면 안 되죠.”
“애초에 재단이라는 것에 이해가 없어, 이해가! 재단은 자본을 출연해서 그 돈으로 뭔가를 하는 곳이 아니다. 출연한 자본을 굴려서 거기서 나는 이익금으로 뭔가를 하는 곳이다. 왜? 지속 가능한 일을 하기 위해서지. 니가 지금 가지고 있는 돈으로 펑펑 써서 해결하려면 재단을 왜 만들어? 기부를 하면 그만이지!”
강진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조규민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조규민이 어색한 얼굴로 웃어버렸다.
“회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아니, 그럼…….”
강진호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1억이라는 돈이 있으면 그 1억으로 뭔가를 하는 게 아니라, 그 1억을 투자해서 나오는 돈으로 뭔가를 한다는 말입니까? 그 1억은 계속 보유해 놓고?”
“그렇죠. 여러 방면으로 굴립니다. 은행에 장기 적립금으로 넣어 이자를 활용하기도 하고, 부동산으로 임대료를 얻어내기도 하고…….”
강진호가 혼란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은행에 넣어봤자 기껏 몇 프로 나오는데요?”
“네. 그 돈으로 하는 겁니다.”
“1억을 놔두고 몇 백만 원어치만 한다구요?”
“……그게 재단입니다, 강진호 씨.”
강진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럴 거면 안 만들죠. 재단을 왜 만들어요!”
조규민이 쓴웃음을 지었다.
대한민국의 일반적인 재단들은 대부분 그런 식으로 자금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재단의 사유화라든가, 세습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겉으로는 이만한 돈을 투자해서 우리가 좋은 일을 한다고 생색을 내지만,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자본금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금만으로 재단을 운영한다.
수많은 이들이 이것에서 착안하여 재단을 만들었다. 좋은 일을 하는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법을 이용하여 세금을 회피하고 상속세를 지불하지 않았다.
최근 들어 이러한 사태에 대한 문제 제기가 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여전히 미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식으로 운영하라는 게 아니라, 그런 식으로 운영하는 게 보통이라는 거다. 물론 너는 그럴 생각이 없겠지.”
“예.”
“그럼 문제는 무척이나 간단해지지.”
황정후가 피식 웃고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무척이나 거만한 투로 강진호를 보며 말했다.
“돈 벌어와.”
“……예?”
“지금 니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뭘 제대로 해볼 수도 없으니까, 돈 벌어오라고.”
“…….”
“‘지금 있는 돈으로 다 해결되겠지’라는 마음으로 할 거면 애당초 시작도 안 하는 게 나아. 네가 바라는 정도는 절대 못한다. 그러니 무척 간단하지. 여기서 접든가, 아니면 돈 벌어와. 무슨 말인지 알겠어?”
강진호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한동안 조규민과 황정후를 번갈아 바라보던 강진호의 눈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벌어오죠.”
투기가 넘실넘실 흘러나온다.
“그 돈이란 것.”
투지 넘치는 강진호의 표정을 본 황정후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