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591
#590.
습격하다 (5)
문을 열고 들어오는 강진호를 보며 이현수가 조금 멍하게 입을 열었다.
“뭔가 좀 후련해 보이십니다?”
“준비운동 좀 했다.”
“거기 피 묻었는데요?”
“내 피 아니라서 괜찮아.”
이현수는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물론 그게 당신 피일 리는 없겠지요. 그런데 거기 피가 묻어 있다는 것은 누군가는 피를 흘렸다는 건데, 그걸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할 말은 많다. 항상 할 말은 많았다.
하지만 말이 입 밖으로 나와도 딱히 상황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 말은 그저 공허한 메아리가 될 뿐이었다.
“……많이 때리셨습니까?”
“다들 멀쩡해. 저녁쯤이면 괜찮아질 거야.”
“다행이군요. 써먹어야 할 이들이 많이 다치면 문제니까요.”
강진호의 눈이 빛났다.
써먹는다?
그 말은 그들이 움직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준비는?”
“물론 끝났습니다. 모일 이들은 다 모였죠.”
“흐음.”
강진호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역시 닮았어.’
과거 청마도 이런 식으로 일을 진행하고는 했다. 뭔가 할 거라는 기미를 계속 풍기다가 그때가 다가오면 강진호조차 모든 일을 파악 못한 시점에 갑자기 움직인다.
정신없이 청마의 말을 따라 움직이고 나면 생각한 것 이상의 결과가 나와 있었다.
당시의 강진호는 그 상황에 대해 딱히 불만이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제대로 설명해.”
이제는 휘둘릴 생각이 없다.
“여기 있습니다.”
이현수 역시 강진호를 부리겠다는 생각은 없다는 듯, 서랍 안에서 장부 하나를 꺼내 강진호에게 내밀었다.
“뭐지?”
“인명장이죠.”
“인명장?”
“정확하게 말하면, 살생부라고 해야 할 겁니다.”
살생부라는 어감이 주는 섬뜩함에 강진호가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는 짓을 했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이현수도 빙그레 웃는 것으로 강진호의 미소에 화답했다.
“언제부터 준비한 거지?”
“물론 처음부터입니다.”
이현수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저는 인간을 믿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간은 믿지만 인간이 착하고 얌전히 있어줄 거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자신의 것을 빼앗긴 인간은 결코 납득하지 않습니다. 되찾기 위해서 이를 갈죠.”
“그래서 지켜보고 있었다는 건가? 그들이 움직일 때까지?”
“아니죠.”
이현수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지켜보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어정쩡한 불만분자들을 모두 품고 가야 하니까요. 저는 그런 식으로 비대하기만 한 조직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도려내야 할 부분은 제대로 도려내야 남아 있는 부분들이 신선해지거든요. 괴사한 조직은 절단이 답입니다.”
“약을 풀었군.”
“조금 쳤을 뿐입니다. 엉덩이 무거운 노인들을 움직이게 하려면 옆구리를 찌르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강진호가 헛웃음을 지었다.
“못된 버릇을 아직 고치지 못했군.”
“원하신다면 바르고 착한 어린아이로 거듭나겠습니다. 상사의 취향에 맞추는 것도 아랫사람의 도리니까요. 하지만…… 그걸 원하십니까?”
“아니.”
강진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배신하지 않는다는 확신만 있다면 아군은 악당인 쪽이 좋았다. 선한 아군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아군이 있다면, 적절히 제어해 주는 것만으로 일을 좀 더 쉽게 풀어갈 수 있었다.
지금처럼.
강진호는 장부를 펼쳐 보지도 않고 이현수에게 되던졌다.
이현수가 강진호가 준 장부를 받아 들었다.
“보지 않으십니까?”
“거기에 있는 이름을 본다고 내가 뭘 알 것 같지는 않군. 내가 아는 이는 오로지 한 명뿐이라서.”
“글쎄요. 익숙한 이름이 하나 더 있을 것 같습니다만?”
“익숙한 이름?”
“아뇨. 그것 역시 재미겠죠.”
이현수가 미소를 지으며 강진호에게 다가와 담배를 꺼내 내밀었다.
“한 대 하시겠습니까?”
“고맙군.”
강진호가 담배를 입에 물자 이현수가 불을 붙였다.
“얼마나 할 생각이지?”
천천히 담배 연기를 뿜어낸 강진호가 묻자, 이현수가 강진호의 건너편에 앉으며 말했다.
“생각 같아서는 모두 도려내 버리고 싶지만,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생각도 하지 않고 가담한 이들도 있습니다. 저는 엄벌주의를 선호하지만…… 음, 아무래도 한국의 무인계는 계파가 꽤나 활성화된 곳이라서요. 무작정 다 죽인다면 아랫사람들에게도 영향이 갈 겁니다. 혈연은 무서운 거죠.”
“그래서?”
“처리해야 할 이들만 처리하죠.”
“그 구분은?”
“음…….”
이현수가 가만히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개인적으로 기준을 세우기는 했지만, 이 기준이 강진호 씨의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습니다. 확인하시고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새로운 기준을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 기준이라는 건 의미가 없겠지.”
“예?”
“반드시 죽여야 할 이가 누구지?”
이현수가 가만히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의미로 이 말을 하는지를 탐색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이윽고 대답이 나왔다.
“이중걸입니다.”
“그렇군.”
이중걸이라…….
강진호가 미묘한 얼굴로 웃었다.
“익숙한 이름이군. 안타까워.”
“정말 안타까우십니까?”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모르겠군.”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현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가끔 보면 이 사람도 속이 검다니까.’
그가 왜 이중걸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건지는 너무도 빤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저리 의뭉을 떨고 있으니 재미있을 수밖에.
“준비는?”
“방 회주를 따르는 이들과 우호적인 영남부의 세력들, 그리고 나이트 위긴스와 바토르 님께서 나서주시기로 했습니다.”
강진호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렇게 요란할 필요가 있나?”
“이건 과시입니다.”
“과시?”
“예. 첫째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어정쩡하게 머물러 있는 이들에게 강진호 씨의 힘을 제대로 다시 한 번 보여줘야 합니다. 강진호 씨의 힘이 그저 개인의 힘이 아니라 이제는 확고한 세력화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줘야겠죠.”
“둘째는?”
“외부의 놈들에게도 보여줘야죠. 이제 총회는 더 이상 파고들 틈이 없다는 걸 말입니다.”
“복잡하군.”
강진호가 머리를 긁었다.
아무래도 이쪽은 취향이 아니었다. 그는 싸우는 것에 이런저런 이유를 붙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가 싸워야 하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적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적과 아군의 구분만 확실하면 된다. 적이 어떤 놈이든, 무엇을 위해 그와 대적하는 것이든, 그런 잡다한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죽고 죽이는 사이에 무슨 이유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언제 시작하면 되나?”
“음, 그건 조금 고민인데…… 이왕이면 빠를수록 좋겠죠. 사실 지금 준비가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완벽한 준비를 기다리는 것보다 저들이 예상하지 못할 때 치고 나가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언제지?”
“네. 오늘 저녁입니다.”
강진호가 입을 다물었다.
그냥 긴장하라고 한 말에 불과한데, 그게 현실이 된 것이다.
“그렇게 급박하게?”
“저희가 급박하면 저들도 급박하겠죠. 조건은 나쁘지 않습니다. 거기에…… 정비되지 않은 싸움이라면 아무래도 이쪽이 유리하겠죠.”
강진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지만, 저 해가 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밤이 찾아온다.
조금 다른 의미로 정말 오랜만에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강진호는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이현수는 그 광경을 보며 몸을 떨었다.
직접 보지 않은 이들은 모를 것이다. 저럴 때의 강진호가 얼마나 섬뜩한 표정을 짓는지 말이다.
‘참 기괴하지.’
이현수가 지금까지 본 이들 중에 가장 미친놈은 단언하건대, 강진호다. 심지어 예전의 그 외도(外道)마저도 지금의 강진호만큼 미쳐 있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놈은 확연하게 미친놈이었으니까.
멀쩡한 얼굴로 인외의 길과 평범한 삶을 오가는 강진호처럼 괴물 같지는 않았다.
이 사람은 지금 피를 갈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바깥의 세상에서는 부모 없는 아이들을 돕기 위해서 준비를 하고 있다. 그 어느 쪽도 위선이 아니고, 위악이 아니라는 점이 이현수를 소름 돋게 만들었다.
“강진호 씨.”
강진호가 가만히 이현수를 돌아보았다.
“아마 이건 도화선이 될 겁니다.”
“도화선?”
“이 일이 끝나면 한국은 완전히 정리가 됩니다. 그럼 남은 게 없습니다. 내부 정리가 끝나면 결국 외부로 뻗어 나가기 마련입니다. 타국 역시 그걸 알고 있습니다.”
“흐음.”
“정리가 끝나는 순간, 우리를 무너뜨리려 하는 세력들이 움직일 겁니다. 지금보다 더 격렬하고 강력하게. 그 흐름은 거부할 수 없습니다.”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고 계시…….”
“머리를 쓰는 놈들은 한 번씩 멍청한 소리를 한단 말이지.”
“……예?”
강진호가 손을 뻗어 담배를 물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나중 일을 걱정할 머리가 있으면 지금 닥친 일을 완벽히 해내는 걸 고심해. 크게 멀리 보면 자세히는 보지 못하는 법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강진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바람 좀 쐬고 오지.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까 말이야.”
“예.”
“아, 그리고…….”
“예?”
강진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조심하도록 해.”
“……무슨 말씀이신지?”
“이럴 줄 모르고 독기를 바짝 세워뒀거든. 며칠 뒤에 독기가 조금 빠지면 쓸 만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바로 일을 치를 줄은 몰랐지.”
이현수의 얼굴이 굳었다.
강진호가 말하는 대상이 누군지는 알고 있다. 조금 전, 강진호가 박살을 내버린 마인 놈들을 말하는 거겠지.
‘조심하라고?’
강진호는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심지어 저 바토르를 상대할 때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저 말을 한다는 건…….
“미친개를 이렇게 잔뜩 풀어놓게 될 줄은 몰랐거든. 통제가 안 될 테니 신경 쓰라고. 내가 있는 곳이면 상관없겠지만, 내가 없는 곳에서는 아마…… 적보다 무서운 아군이라는 게 뭔지 알게 될 테니까.”
“……절대 다른 쪽으로는 가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노력이야 해보지.”
강진호가 빙그레 웃고는 밖으로 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이현수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왜 다들 모르는 거지?”
이현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일이 아닌가. 저들이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걸. 이현수조차 강진호의 손바닥 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무슨 배짱으로 강진호를 적대하려 든단 말인가.
물론 믿는 구석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현수가 상상도 하지 못한 뭔가가 있겠지.
하지만 저들은 모르고 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강진호 역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인 게 아니다. 적의 크기를 가늠하지 못한 이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은 확고한 죽음밖에 없었다.
이현수가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이 평화로운 광경은 사라지고 어둠이 내릴 것이다.
그리고…….
“피 냄새는 원 없이 맡겠군.”
천천히 서쪽으로 움직이는 해를 바라보며 이현수가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