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02
#601.
선보이다 (1)
나이트.
어쩌면 흔하디흔한 그 이름.
하지만 그 나이트라는 명칭 앞에 ‘원탁의’라는 말이 붙는 순간, 상황이 달라진다.
이곳의 사람들은 잘 모른다.
유럽에서 원탁의 나이트라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말이다.
유럽의 무인계에서 나이트란 그저 선망의 대상이 아니다. 권력의 대상이 아니다.
그건 명예이고, 자부심이자, 헌신의 증표이다.
유럽의 명문가에 태어난 수많은 아이들처럼 위긴스 역시 언젠가 나이트가 되는 미래를 꿈꿨다.
하지만 현실은 냉엄한 법.
유럽 무인계의 정상이라 할 수 있는 나이트의 자리를 손에 넣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그저 강한 것만으로는 신성한 원탁에 앉을 수 없다.
나이트는 강자가 앉는 자리가 아니다.
이미 원탁을 구성하고 있는 나이트들로부터 원탁에 앉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렇기에 자격이 있는 이가 없다면 나이트의 자리가 비더라도 한동안 공석을 유지한다.
그만큼이나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야만이 앉을 수 있는 곳이 나이트의 자리다.
게다가 자격을 갖춘다고 해서 모두가 나이트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이트의 자리는 각 의장국에 단 한 자리만이 부여된다. 모두가 충분히 나이트의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는 이도 그보다 더 뛰어난 이가 같은 국가 내에 존재하거나, 선대 나이트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나이트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나이트라는 자리는 본인의 능력과 노력, 그리고 시운이 모두 맞아떨어져야 비로소 주어지는 자리인 것이다.
나이트 위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나이트가 되기 위해서 들인 노력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일평생을 통틀어 자그마한 흠결이 하나라도 있다면 결코 나이트는 될 수 없다. 하나의 과정을 통과하면 또 새로운 시험이 기다린다.
평생을 단 한시도 마음 놓지 않고, 스스로를 갈고닦는 자에게만 나이트라는 고귀한 자리가 주어지는 것이다.
강해야 한다.
품격이 있어야 한다.
모든 방면에 우수해야 한다.
원탁의 가공할 정보력은 자그마한 흠결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인생을 통틀어 누구에게나 고귀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돌이켜 보면 그건 정말 지옥 같은 삶이었다.
타인을 의식하고, 스스로를 의식하고, 그리고 세상을 의식한다.
스스로를 몇 번이고 갈고닦는 일이 쉬울 리가 없다. 하지만 나이트 위긴스는 그걸 해냈다.
처음 나이트 서훈을 받던 날은 아직도 기억한다.
그때의 그 벅찬 환희,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느낌.
차디찬 가면으로 얼굴을 가릴 때 느낀, 그 전신이 떨리는 감동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랬지.’
이상한 회한이 가슴에 들어차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트 위긴스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이곳으로 왔다. 나이트가 되기 위해서 인생을 바쳤음에도 말이다.
후회하느냐고?
그럴 리가.
나이트 위긴스는 비릿하게 웃었다.
후회하는 것이 아니다. 후회를 한다면 나이트의 자리를 버린 것을 후회하는 게 아니라, 나이트가 된 것을 후회하겠지.
몰랐던 것이다.
나이트.
그 찬란한 빛에 둘러싸인 위명에 눈이 멀어버렸다. 생각해 보면 위긴스는 나이트가 되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그저 나이트가 되어 세상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의지만 있었을 뿐이다.
의지만 있었다.
나이트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방식을 취해야 하는지에 무지했다. 아무리 나이트란 자리가 직접 그 지위에 오르기 전에는 베일에 싸여 있는 자리라고는 하나, 그런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은 나이트 위긴스의 실수였다.
결국 나이트 위긴스는 모든 것을 버렸다.
지위도, 삶도.
새롭게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하나.
아직 버리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리고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나이트가 되기 위해서 그가 쌓아야 했던 무력.
영국 최강이라 불린 그의 힘 말이다.
“후우우우.”
나이트 위긴스가 깊게 심호흡을 했다.
‘이것도 꽤나 오랜만인걸?’
손에 잡힌 애병이 낯설다. 그러고 보면 나이트가 된 이후로 애병을 휘두르며 싸운 적이 몇 번이나 있던가 싶다. 나이트는 엉덩이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 그들이 처리해야 할 업무량은 살인적이다.
밀려드는 업무를 처리하다 보면 전장에 나가서 검을 휘두를 수가 없다. 애초에 나이트는 총사령관에 가깝다. 전쟁터에 총사령관이 직접 나설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이트에게 일정 이상의 무력을 요구하는 이유가 이 말도 안 되는 업무량을 감당할 수 있는 체력과 집중력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닌가 의심한 적도 있을 정도다.
지금에 와서는 감사해야 할 일이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무력은 반드시 필요하니까.
동양에 비해서 서양의 무학이 뒤처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도 수준에 따라 다른 문제다.
“이제 그걸 증명하면 되겠군.”
오른손에 롱 소드를 들고, 왼손에 지팡이를 든 나이트 위긴스가 가만히 양손을 늘어뜨렸다.
급할 것은 없다. 이미 퇴로는 차단했으니까.
타오르는 불의 벽을 바라보는 영남부 인원들의 얼굴은 이미 파랗게 질린 뒤였다.
나이트 위긴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건 처음 보는 모양이군.”
“무슨 짓을 한 거냐, 이놈!”
최 상무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나이트 위긴스가 그 광경을 보며 양팔을 과장되게 흔들었다.
“참 이상한 일이란 말이지. 물론 동양의 무학이 서양에 비해 나은 평가를 받지만, 그게 한국의 무학이 영국의 무학보다 낫다는 뜻은 아닐 텐데. 당신들은 대체 뭘 믿고 그리 무지한가?”
“……뭐라고?”
“왜 조사하지 않는가. 그대들은 딱히 강자라고 할 수 없는 이들이다. 약자가 강자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오로지 조사하고 또 조사하여 정보를 얻는 것뿐이지. 그런데 왜 그렇게 안일하지?”
나이트 위긴스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확실히 당신들은 뭔가 무뎌져 있어. 일본과 중국이 옆에 있기 때문인가?”
외국인의 눈으로 보면 한국인이란 것들은 좀 이상한 측면이 있었다.
무던하다고 해야 하나?
그가 듣기로는 한국인은 이탈리아인 뺨을 후려칠 정도로 성격이 급하다고 했는데, 막상 겪어본 한국인들은 자극에 너무 둔감했다.
머리 위로 미사일이 날아다녀도 그러려니 하고, 바로 옆에 세계최강대국들이 이를 드러내고 있는데도 남 일처럼 여긴다.
이게 정말 무던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일부러 의식하지 않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모르면 맞아야지.”
나이트 위긴스가 양손에 든 무기들을 흔들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최 상무는 천천히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나이트 위긴스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 불이 보통 불꽃이었다면 지금 당장 몸을 날려 이 자리를 벗어났을 것이다. 피부가 그을리는 정도쯤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저 불꽃에 뛰어들어서 그 정도 부상으로 끝날 것 같지가 않다.
‘하지만 혼자가 아닌가.’
강할 것이다. 강하겠지.
나이트라 불리던 이가 약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혼자다. 사자도 혼자서는 하이에나 떼에 덤벼들지 않는다. 잘못 걸리면 숫사자도 하이에나의 밥이 되는 것이 야생 아닌가.
물론 저 불의 벽을 만들어낸 능력은 인정한다. 하지만 나이트 위긴스 혼자서 자신들 모두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최 상무였다.
“그 용기는 칭찬해 주겠지만…….”
최 상무가 씹어뱉듯 말했다.
“병법의 기본도 모르는 놈이군. 굳이 이쪽에 배수진을 쳐줄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최 상무는 확신했다.
저놈은 신기한 기술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딱히 병력을 운용해 본 적이 없는 게 분명했다. 저 가공할 불의 벽을 적당히 위협용으로만 썼어도 이쪽의 사기가 박살이 났을 텐데, 퇴로를 막아버린 덕에 이쪽도 위긴스를 죽이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어져 버렸다.
당연히 이쪽도 최선을 다할 수밖에.
“지혜가 없는 용기는 우격다짐일 뿐이지. 네 만용에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죽여라!”
나이트 위긴스는 자신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오는 영남부들을 보며 비릿한 비웃음을 머금었다.
“병법이라…….”
이름도 없는 자와 병법을 논해야 한다는 게 지금 나이트 위긴스의 처지라고 생각하니 속이 쓰려온다. 그가 내던진 직위이기는 하지만, 원탁에 있을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그가 원탁에 있었다면 저런 조무래기와 대면할 일 자체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뭐, 로드께서 다시 나를 높이 이끌어주시겠지.”
그렇지 않다면 의미가 없다.
“자, 그럼 어디…….”
막 나이트 위긴스가 전투를 시작하려는 찰나, 등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아!”
나이트 위긴스가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다. 잠시 잊었다.”
“어떻게 자식을 잊을 수 있어요!”
나이트 위긴스가 빙그레 웃고 말았다.
‘자식이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딸에게조차 나이트 위긴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딸의 차가운 시선을 당연히 감내해야 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혈연을 끊어가며 이루어야 할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강진호에게 받은 가장 강렬한 인상은 강함 따위가 아니었다. 강진호가 강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새삼스레 충격을 받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강진호가 인상적이었던 점은 그가 어느 것 하나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총회를 이끌어가는 막중한 임무와 중국과 일본의 견제를 받는 부담 속에서 가족과의 거리를 둘 것이다.
그게 더 편해지는 방법이니까.
드러난 곳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드러나지 않은 삶에 집중했겠지. 적어도 나이트 위긴스라면 그랬을 것이다. 그게 현명한 길이니까.
하지만 강진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모든 부담을 버텨내며 어느 것 하나 놓지 않았다. 인간 강진호서의 삶과 무인 강진호로서의 삶을 양립시켰다.
‘대단한 양반이지.’
나이트라는 자리에서 버텨내기 위해서 가족과도 데면데면해질 수밖에 없던 위긴스에게는 그 모습이 너무도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강진호가 할 수 있다면, 위긴스 자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상으로 힘들어지겠지만, 힘든 것이 못난 것보다는 낫다.
나이트 위긴스가 엘레나의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머리에 손을 댔다.
“조금만 기다리고 있거라.”
“굳이 머리에 손 안 대셔도 할 수 있는 거 알고 있거든요?”
“녀석하고는.”
나이트 위긴스가 엘레나의 머리를 살짝 과격하게 쓰다듬었다. 그러고 나서 손을 떼자 엘레나의 주변에 투명한 막이 생겨난다 싶더니, 이내 엘레나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마치 커다란 비누 거품에 들어간 것처럼 말이다.
“서론이 길어져서 미안하군.”
나이트 위긴스가 몸을 빙글 돌리고는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럼 빠르게, 빠르게 가보도록 하지. 나도 쓸데없이 시간을 끄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
쿠웅!
나이트 위긴스의 지팡이가 바닥을 강렬하게 내리찧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