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11
#610.
압도하다 (5)
‘제발 좀!’
이현수가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강진호의 대응이 맞다. 지금 이중걸의 집에는 굳이 그들과 적대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도 있을 테니까.
평소 같은 상황이라면 그런 이들을 그때그때 구분해서 제압해 버리면 그만이겠지만…….
‘이놈들은 제어가 안 되겠지.’
사냥개를 풀어놓고 사로잡을 사냥감과 죽일 사냥감을 구분해 라고 하는 것은 과도한 요구였다. 그리고 지금 저놈들의 면상을 보고 있으려니, 차라리 사냥개에게 요구하는 쪽이 현명해 보인다. 이놈들에게는 그게 불가능하다.
그러니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연락을 하는 게 맞기는 하지만…….
‘그럼 기습의 의미가 없어지잖습니까!’
이현수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리 이중걸이 그들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공격의 시점을 알려주는 것 자체가 병법으로 볼 때는 손해였다. 그저 이렇게 담배 한 대 피우고 있는 시간조차도 저들의 진을 뺄 수 있는 건데.
[지금 오겠다는 말씀이시오?]이중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실제로 그가 담담한 건지,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라 그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지금 가지.”
[환영이라도 해드려야 하나?]“사양하지.”
건너편에서 이죽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왕 시간을 알려주는 마당에 십 분만 더 주시면 안 되겠소? 당신 말대로 떠나겠다는 사람들을 모아 보내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할 테니까.]“그러지.”
환장하겠네, 진짜.
이럴 거면 왜 여기로 왔나. 차라리 유니세프를 보내지.
누가 보면 평화 전도사인 줄 알겠네.
이현수의 얼굴에 차마 어쩌지 못하는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상사가 트롤링을 하면 부하 직원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저 상사는 입으로는 민주적인데, 하는 짓은 독재자인 사람이다.
[배려에 감사하지. 선물이라도 준비해 볼 테니, 천천히 오도록 하게.]“선물은 이쪽에서 가져가야지”
[많이 변했구만. 농담도 할 줄 알고.]“피차.”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강진호. 그러자고. 끝을 봐야지.]전화가 끊겼다.
강진호가 고개를 돌려 대화를 듣고 있던 마인들을 바라보았다.
“들었나?”
“예.”
“십 분 뒤에 돌입한다.”
“다 밀어버리면 되는 겁니까?”
강진호가 손을 들어 다시 불빛을 가리켰다.
“저기다.”
“…….”
“깨끗하게 비워둬.”
마인들의 눈이 이글거리며 불타올랐다.
고개를 돌리자 이현수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문제 있나?”
“……없죠.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이죠. 그런데…… 신병을 확보해 줘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흐음?”
강진호가 흥미롭다는 듯이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 * *
턱.
이중걸은 거칠게 전화기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후우.”
그러고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조 이사.”
“예, 회주님.”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
조 이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대답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싸우기도 전에 졌군. 싸우기도 전에 말이야. 우리는 이제 전장에 설 자격도 없다는 말인가? 이제 겨우 판을 벌여서 제대로 한 번 붙어보려고 했는데, 이게 참…….”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회주님.”
“끝난 게 아니다라…….”
이중걸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창가로 걸어갔다. 창가에 서서 창문을 연 이중걸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래, 아직은 끝나지 않았지. 내 목숨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야. 하지만 그 시간도 얼마 남지는 않았겠지.”
“……회주님.”
“됐네.”
이중걸이 고개를 저었다.
“억울할 일이 아니지. 상대가 우리보다 더 영악했을 뿐이야. 나는 이 승부는 나와 강진호에게서 갈릴 거라고 생각했건만…… 이현수가 변수였군. 그놈을 생각하지 못한 게 상황을 여기까지 만들었어.”
이중걸이 씁쓸한 얼굴로 담배를 빨아들였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과거 총회를 이끌 때, 저 이현수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그런 이가 있으면 당연히 경계를 했어야 하는 건데, 워낙 강렬한 존재감을 지닌 이들이 주변에 포진해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이현수에 대한 마크가 부족했다.
조직과 조직의 싸움에서는 개인의 강함보다 머리를 쓰는 한 놈이 더 무섭다는 것을 그리도 잘 알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늙은 게지.’
나이가 들면 경험이 쌓이게 된다. 하지만 거기서 더 나이가 들면 자신이 가진 경험을 활용하지 못하게 된다. 상대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실수?
그래, 실수겠지.
하지만 실수가 반복이 되면 실패가 되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이보게, 조 이사.”
“예.”
“정보가 어디에서 새어 나갔을까?”
“…….”
이중걸이 천천히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물론 이건 내 실수야. 이런 가능성도 생각을 했어야 했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기본 아니겠는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단 말이야. 왜 하필 이때인가.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무르익을 타이밍이었어. 그런데 하필이면 지금 쳐들어오는군. 아군과 적군의 구분이 확실해진 이 타이밍에 말이야. 무척이나 공교롭지 않은가?”
“그 말씀은…….”
“누가 배신했을까?”
이중걸의 목소리는 결코 높지 않았다. 너무 담담하여 오히려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조 이사가 마른 침을 삼켰다.
저 담담함 안에 무거운 분노가 느껴진다. 그리고 그 분노 속에서 작은 서글픔도 배어 나온다.
조 이사는 가슴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중걸은 시대의 거인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한국의 무인계는 지리멸렬했거나, 타국의 식민지 꼴이 되었을 것이다.
제멋대로 흩어져 있던 자유로운 무인들을 모아서 하나의 단체로 엮고, 그들의 이권을 보장해 준 사람이 이중걸이었다. 과격하고 독재적인 방식 때문에 수많은 적을 만들기도 했지만, 그가 한국의 무인계를 만들어냈다는 것만은 그의 정적들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이가 지금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것 같아 조 이사는 차마 이중걸의 등을 볼 수 없었다.
“회주님.”
“……배신당하지 않았다면 가능성은 있었을까?”
“아마 그랬을 겁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겠지. 나는 솔직히 조금 무서웠네.”
조 이사의 눈이 살짝 커졌다.
평생 이중걸의 입에서는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한 말이다. 그 말이 지금 이중걸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내가 퇴물이 됐다는 걸 나 혼자만 모르고 있을까 봐 겁이 났어. 사실 본인은 잘 모르는 법 아닌가.”
조 이사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중걸은 이런 말을 하는 이가 아니다.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든 간에 겉으로는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이였다.
이중걸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조 이사의 가슴에 비애가 차올랐다.
그 누구도 영원히 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누구도 영원히 강할 수는 없다.
적수가 없을 것 같은 강자도 언젠가는 그 자리에서 내몰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게 순리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조 이사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회주님은 여전히 강하십니다.”
“그런가…….”
이중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안심했다는 듯이 말이다.
“운이 없었을 뿐입니다. 회주님의 계획대로 모든 일이 흘러갔다면, 분명 그 강진호도 회주님을 당해내지는 못했을 겁니다.”
“고맙군. 빈말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고마워.”
“빈말이 아닙니다.”
조 이사의 목소리가 오히려 달아올라 있었다. 담담한 이중걸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말이다.
“그럼 하나 물어도 되겠는가?”
“예. 얼마든지 물으십시오.”
“이보게, 조 이사.”
“예!”
이중걸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왜 배신했는가.”
정적이 찾아들었다.
고요함.
지금까지는 들리지 않던 시계 초침 소리가 넓은 거실 안을 조용히 메우기 시작했다.
이중걸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닿지 않는 시선.
조 이사가 볼 수 있는 것은 이중걸의 조금은 초라해진 등뿐이었다. 하지만 그 등이 지금 무엇보다 무겁게 조 이사를 짓누르고 있었다.
“고민할 것 없네. 탓하자고 하는 게 아니니까. 자네도 알지 않는가. 이 나이가 되면 원한이라든가 증오 같은 감정에 무뎌지기 마련이지. 그러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그리된단 말이지.”
이중걸이 툴툴대며 웃었다.
“그저 알고 싶은 거야. 자네의 말이 빈말이 아니라면, 왜 굳이 나를 막아섰냐는 거지. 차라리 자네가 빈말을 하고 있다면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려 했네. 그런데 이상하지. 내가 보기에는 자네는 정말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그런데…….”
지금의 이중걸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그 누가 짐작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아무도.
평생에 걸쳐 이룩한 것을 하루아침에 빼앗겼다. 그리고 쓸개를 핥는 심정으로 자신의 것을 되찾기 위해 숨죽이고 기다렸다.
목숨? 안정된 삶?
그런 건 진즉에 내다 버렸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총회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모든 계획이 시작도 하기 전에 좌초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가장 믿어온 자의 배신으로.
어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그를 배신하고, 그를 지옥의 불구덩이로 밀어 넣은 이의 눈이 여전히 신뢰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대체 어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기에 이중걸은 기다렸다.
그는 짐작할 수 없는 일의 해명을 듣기 위해서.
“알고 계셨습니까?”
“몰랐지. 알았으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겠지. 그저 생각을 좀 해봤을 뿐이야. 대체 누가 개입해야 일이 여기까지 흔들릴 수 있는지를 말이야. 그랬더니 답이 나오더군. 자네밖에는 없어. 모든 계획과 모든 시점을 알고 정확히 나를 찌를 수 있는 이는 자네밖에 없단 말이지.”
이중걸이 몸을 돌렸다.
진물 가득한 그의 눈이 조 이사를 정확히 응시했다.
“말해보게나, 조 이사. 아니, 조남평.”
이중걸이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왜 그랬나?”
“…….”
“대체 왜?”
씁쓸한 얼굴로 이중걸을 마주 보던 조 이사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회주님.”
“그래, 말하게나.”
“저는 회주님을 신뢰합니다. 회주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드린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알아주십시오.”
“그래서 묻는 것이네. 자네의 말에서는 진심이 느껴졌거든. 그런데…… 나를 신뢰한다면서 왜 나를 배신한 것인가?”
조 이사가 눈을 감았다.
어쩌면 이건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보다 더 잔인한 대답이 될지도 모른다.
“이현수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
이현수.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이중걸은 피가 거꾸로 치솟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이현수.
또 그놈이다.
또!
조 이사가 조금은 안타까운 얼굴로 이중걸을 바라보다 가만히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저항하려 했습니다. 모른 척 시치미를 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중걸의 눈에 체념이 들어섰다.
“그가 뭐라 하던가?”
“그는…….”
담담하게, 또 담담하게.
조 이사가 입을 열었다.